23.5.1
예전부터 느끼던 일이다. 사람들은 너무 팩트가 중요하다는 말에 중독되어 있고 팩트를 따지는 것이 논리적이고 과학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신뢰이며 이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개인적 상황에 오면 그다지 어렵지 않게 납득되는 일이다. 그런데 사회적 판단을 한다던가, 자신이 익숙하지 않은 곳에 가면 우리는 그 팩트가 중요하다는 말에 금방 넘어가고 마는 것이다.
그럼 왜 팩트보다 신뢰가 더 중요할까? 가장 큰 이유는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팩트들이 있으며 그것들의 의미는 수없이 많은 문맥속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걸 다르게 표현하면 홀로 존재하며 의미를 가지는 팩트는 없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너무 시시하게 들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너무 난해한 말처럼 들리는 사람도 있을텐데 이런 말들도 역시 의미를 가지려면 적절한 문맥을 가져야 한다. 이 말들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홀로 존재하며 의미를 가지는 팩트라는 걸 사람들이 믿게 된 것에는 과학과 수학의 발전이 큰 영향을 미쳤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울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그런 과학과 수학의 원리에 의해 조직된 면이 많기 때문이다. 논리적 사고나 환원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태도는 현대 과학과 수학의 뿌리에 있으며 전문화의 진행과 컴퓨터의 사용이 널리 퍼진 사회들에 깊이 뿌리 내렸다.
과학에는 가치 판단이 없다는 말이 있다. 팩트는 그냥 팩트이기 때문이다. 수학은 논리적인 연역을 따라하는데 각각의 수학적 상징조작에는 의미가 없다. A=B라는 건 그냥 사실일 뿐 아무 문맥이 필요없는 사실이며 평가할게 없다. 수학과 과학의 강력함은 그러한 보편성과 엄밀함 때문이다. 내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하건 수학과 과학의 가치를 폄하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경계없는 무한의 보편성때문에 과학과 수학에는 가치판단이 없다. 이 말은 만약 여러분이 어떤 논리적 단계를 거치거나 어떤 팩트들의 나열을 통해 어떤 가치를 판단하는 결론에 이르렀다면 여러분은 어디선가 비약을 했다는 뜻이다. 당연하지 않은 어떤 가설이나 전제를 당연하다면서 슬쩍 집어넣었기 때문에 과학과 수학이 우리의 일상에서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우리는 논리로만 가치판단에 도달할 수 없다.
그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검증되지 않은 믿음이나 가설에 근거해야 한다. 그게 유한한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문제는 그런 믿음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가 아니면 적어도 인식하기 쉬운 상태에서 가지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길고 긴 계산 속에서 길고 긴 팩트의 나열속에서 슬쩍 그런 것들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깊고 깊은 함정에 빠지게 된다. 사실은 뭔가를 믿기로 했는데 자신이 뭘 믿는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가 되었고 모든 결과는 마치 1+1=2처럼 확고한 팩트에 기반한 것으로 믿어지니 어떤 의미로 사람이 미치는 것이다.
이런 것의 대표가 바로 이데올로기다. 일찌기 공산주의는 역사에 대한 이론이 있었는데 그걸 읽은 사람들은 그걸 마치 뉴튼의 고전역학처럼 피할 수 없는 미래를 예측하는 논리적 과학으로 여기곤 했다. 그래서 미친 것이다. 사실 수학적 증명이나 과학적 증명은 그런 이데올로기가 거치는 것과는 비할 수 없는 엄밀한 측정에 근거하고 검증에 근거해서 믿어지는 것인데 비슷하게 형태만 갖추면 그걸 과학이라고 믿어버리니 바보가 되고 미친 자가 된다.
오늘날에도 이 팩트가 중요하다는 말을 광신하여 합리성과는 거리가 멀어졌으면서도 스스로를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들의 눈을 가리는 것은 앞에서 말한대로 문맥을 없애버리고 그 원자적 사실만 보게 만드는 그 습관때문이다. 한국 사람들 중에는 미국에 가서 귀여운 아이를 보면 무심코 머리를 쓰다듬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면 미국에서는 잘못하면 체포될 수도 있다. 왜냐면 미국에서는 아동 성범죄자들에 대한 경각심이 한국보다 훨씬 높기 때문이다. 할머니들이 길가다가 귀여운 아기를 보면 고추를 잡아보기도 하는 한국과는 많이 다르다. 그런데 여기서 원자적 사실은 A가 B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라는 사실 뿐이다. 이게 옳니 그르니 하고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없을 뿐만 아니라 바보짓인 것이다.
한국에서 여자가 12시에 거리를 다닐 수 있다는 것이 미국 뉴욕에서 그래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이건 확률적 계산의 문제이며 어떤 사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혹은 어떤 미래를 보여주는가 하는 것은 그 원자적 사실말고도 기본적으로 그 사실이 일어난 환경이 가지는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당연히 그게 합리적이다. 겨울과 여름에 옷이 달라야 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머리가 굳어진 사람들은 흔히 '원래'라는 말을 너무 자주 쓴다. 즉 그들은 사건이 일어나는 문맥에 대해 무관심하게 어떤 관행이 언제나 다 통한다고 여기면서 원래 그래라고 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원래 결혼을 해야 하고, 원래 집은 사야 하는 것이니까 몇억씩 빚을 내는 것도 당연한 것이며, 맞벌이를 하고 있어도 집안일은 남자가 안하는 것은 원래 옳은 것이고, 반대로 결혼하면 남자가 여자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것도 가장인 남자가 원래 해야 하는 일이다.
예전에 한미 FTA때 한국이 아주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이때도 그렇다. 사람들은 그냥 FTA가 좋다 나쁘다라는 식까지만 말한다. 그것은 물론 응당 논해야 할 것이지만 이건 협상이므로 구체적 협상안이 어때야 하는가를 봐야하고 특히 그 협상을 하는 정부가 어떤 가를 봐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극단적으로 말하면 FTA가 좋고 나쁜게 아니라 그걸 누가 하는가에 따라 다르다. 이명박이 하면 무조건 나쁜 것이고 노무현이 하면 무조건 좋은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내로남불이 아니다. 이건 신뢰의 문제고 과거의 행태에 기반했을 때 어떤 식으로 일이 진행되었을까에 대한 믿음의 문제다.
현실세계는 언제나 회색이다. 그래서 모두가 다 똑같다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산이라는 게 있지만 보통 사람의 재산과 이재용이나 일론 머스크같은 사람의 재산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렇지만 그래도 이 재산이라는 것도 회색이다. 누구도 재산이 있고 없고의 흑백으로 갈리지 않는다. 이재용도 일론 머스크에 비하면 가난한 사람이다.
그런데 세상을 팩트들로 보면 어떻게 될까? 이상하게 3천원 버스비를 횡령한 버스 운전자는 생사의 위기에 몰리는데 3백억이나 1조쯤 해먹는 경제사범들은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런걸 따지냐고 하게 된다. 세상을 흑백으로 보는 사람들은 중요도에 대해 장님이 된다. 그래서 여기서 천원을 아끼면서 아둥바둥하다가 집사러 가서는 1억씩 턱턱 깍아준다. 사기꾼의 말을 믿고 10억짜리 땅을 9억주고 깍아서 샀으니 1억 벌었다고 한다. 모두 그냥 돈이기 때문이다. 모두 그냥 좋다 나쁘다의 흑백 결론이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스님중에 무소유라는 책을 쓴 법정스님이란 유명한 분이 있다. 이분의 일화에 이런게 있다고 들었다. 이분이 출판사에 인세받을 때가 되면 왜 인세를 빨리 안보내냐고 재촉했다는 것이다. 이런게 팩트다. 이것만 들으면 무소유운운하더니 이렇게 돈을 밝히는 중이 없다는 소리가 나올 법하다. 그런데 그 재촉의 이유가 그 인세가 사실은 병원비나 교육비로 기부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라더라는 나중의 이야기를 들으면 신경써서 재촉까지 하는 법정의 인품이 오히려 더 대단해 보인다.
이런게 팩트의 허망함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몇가지 사실들을 들으면 우리가 확고한 결론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법정이 사실은 오랜간 무소유를 실천하며 살아온 사람이라던가, 여러 좋은 일들을 해온 사람이라는 사전지식을 모두 지워버리고 그 팩트만 보는 것이다. 출판사에 돈재촉하는 걸 보니 돈에 미친 사람일세하고 결론내고 더이상 확인해볼 필요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걸 과학적 사고네 논리적 결론이네 하는 것이 팩트 좋아하는 사람들의 행태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실을 볼 것도 없고 논리든 과학이든 무시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두 가지를 모두 고려해야 한다. 첫째로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넓게 봐야 한다. 그래야 믿음이던 신뢰든 현실을 반영하게 된다. 도둑놈이 열쇠를 빌려달라고 할 때와 친절하게 나를 도와주는 청년이 열쇠를 달라고 할 때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바로 그 문제의 사실들로 우리의 믿음을 미세조정해야 하는 것이다. 넓게 보면 팩트보다 믿음이 더 중요하다. 내일 해가 뜨지 않을 것같다는 그럴듯한 증거가 있다고 해도 해는 정말 오랜동안 아침마다 떠올랐다는 것을 무시하고 그 팩트만 보면 바보가 된다.
불행히 너무 많은 사람들이 특히 과학적 훈련이 되지 않은 사람들이 팩트에 중독되어 있다. 그래서 무슨 백과사전처럼 팩트들을 죽 나열하면 그게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우리의 믿음을 재점검 하게 해주는 것들이다. 우리가 뭘 믿는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서 살고 있었는데 그 믿음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가장 중요하다. 도박장안에서 도박의 기술을 나열하고 있는 사람보다 도박장을 빠져나가서 새 삶을 사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더 중요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이야기를 위해서는 오히려 팩트가 너무 많으면 안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 보는 것인데 긴 팩트의 목록은 자연히 중요한 것은 네 안에 있는게 아니라 여기 팩트의 나열에 있다는 메세지를 주게 된다. 힌트를 받았으면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통해 비약하지 않으면 믿음의 재점검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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