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12
우리는 언제나 비교에 의해서만 무언가에 대해서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여기 강국진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여러분이 강국진을 여자와 비교할 때면 우리는 그에 대해 남자란 어떤 것인가를 중심으로 알게 될 것이다. 강국진을 고릴라와 비교한다면 우리는 인간이라는 종을 중심으로 그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강국진을 돌멩이와 비교한다면 우리는 생명이라는 것을 중심으로 그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대개 지식을 이러한 비교를 통해서 얻어낸다는 것을 잊는다. 그것도 아주 자주 그렇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무엇과 비교하고 있는지가 무의식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고 할 때에도 이미 그것이 뭔지를 거의 정확히 알고 있다는 가정속에서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는 그것에 대한 지식이란 우리의 무의식의 사소한 수정이나 확장에 지나지 않게 된다.
예를 들어 여기 옷이 한 벌있다고 해보자. 그리고 편의상 이 물건의 이름을 철수라고 해보자. 이 때 우리는 철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옷이라는 생각 때문에 우리는 이 옷의 크기가 이러하고 모양이 이러하며 브랜드가 이렇고 가격이 이러하고 촉감이 이러하다라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철수에 대한 지식을 누적시키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철수가 옷이라는 내 말 때문에 사실 여러분은 철수를 이미 어떤 분류 시스템의 한 구석에 몰아넣고 있다. 스무고개를 하듯 그것을 생각해 보면 철수는 무생명이며, 사람이 만든 물건이고, 크기는 사람만 하며, 몸을 가리기 위해서 사람이 쓰는 물건이라는 식이다. 즉 철수는 옷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래 이 세상의 물건들은 어느 하나도 특정한 분류시스템에 영원히 소속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철수를 오물속에 넣으면 철수는 순식간에 걸레가 될 것이다. 철수를 만드는 데 쓰이는 재료를 다른 곳에 쓴다면 원자재가 될 것이고, 철수를 이용해 누군가를 공격한다면 그것은 무기가 될 것이며, 철수가 자연분해가 가능한 소재라면 그것은 심지어 생명체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어떤 남자의 재산만 관심이 있는 여자가 있다고 해보자. 그 여자가 저 남자는 어떤 사람이래라고 묻는 질문은 사실상 그 사람 부자야? 라는 질문일 것이다. 외모에만 관심이 있는 여자의 경우는 그 사람 잘생겼데? 라는 질문이 된다. 집안을 보는 사람은 그 사람 집안은 뭐하는 집안이래?라는 질문이 될 것이고, 스포츠 광이라면 스포츠는 좀 한데라는 질문이 될 것이며, 바보들에게 질린 여자라면 그 질문은 그 사람은 좀 똑똑하데?라는 질문이 될 것이다.
이렇게 뭐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으로 등장하는 지식은 우리가 그 대상을 무엇과 비교하고 있는가에 따라 무한히 달라질 수 있다. 비교는 다르게 말하면 환경이나 배경이다. 정신적인 수준에서 강국진을 여자 옆에 놓고 질문을 던지는가, 고릴라 옆에 놓고 질문을 던지는가, 돌멩이 옆에 놓고 질문을 던지는가가 바로 비교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교의 대상을 의식화한다는 것은 환경이나 배경을 의식화하는 것이고, 뭐뭐란 무엇인가를 이러한 의식화없이 던지는 것은 우리가 비교대상이 되고 있는 어떤 것을 지극히 당연한 것, 바뀔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럴 때 우리의 지식은 굉장히 한정되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교의 대상, 환경과 배경을 고민하는 일은 가장 생산적인 사고 방식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삶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해 여러분이 무슨 답을 떠올리든 여러분은 도대체 삶을 무엇과 비교하고 있는 것인가? 삶의 반대는 죽음인가? 아니면 다른 한국인의 삶이나, 대학 동창생의 삶이나, 형제 자매의 삶인가? 삶이란 지금 시대의 삶과 과거의 삶을 비교할 때의 삶인가? 삶이란 하나의 사상이고 형식이라서 서로 다른 구조를 가진 삶들과의 비교속에서 파악되는 것인가? 삶이란 인간의 삶과 바이러스나 조개같은 다른 생명체의 비교를 통해서 파악되는 것인가?
그 답이 무엇이 되건 누군가가 삶은 아파트다라는 지식을 절대적 진리로 여기다가 이러한 비교의 문제를 생각하고 시야를 넓힐 때 그의 삶의 방식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본질을 묻는 질문은 영원히 확실하게 답해질 수 없다. 다만 그 질문을 묻는 배경이 크게 달라질 때 우리의 생각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일찌기 장자는 세상사람들이 달팽이 뿔 위에서 싸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게 옳니 저게 옳니를 따지기 전에 그들의 생각의 바탕에 있는 인식의 지평의 넓이가 너무 좁기 때문에 그들은 어리석게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그 뜻일것이다. 그리고 그럴 때 우리는 내일 죽을 거라고 시한부 선고를 받아놓고는 오늘 농사일을 어떻게 하는지, 시험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친구가 나보다 더 좋은 차를 사서 자랑하는 것이 아니꼽네 아니네 같은 문제로 삶을 낭비하게 되는 것이다.
본질을 묻는 뭐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필요에 의해서 필요한 정도만 답해질 수 있는 질문이다. 우리는 어떤 질문이 던져질 때 그것이 던져진 배경에 주목해야 한다. 그 배경에 따라 사실 답은 크게 달라진다. 우리는 워낙 하나의 환경에서 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배경이라는 것이 상식적으로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 환경이라는 것을 언제나 당연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에 까지 빠진다.
그러나 여행을 가자면 여행복을 준비해야 하고, 땅을 파자면 땅파는 도구를 준비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중심으로 사물을 보게 되면 우리는 이 환경이라는 것에 주목하게 되고, 그것을 당연시 여기지 않게 된다. 옷은 예뻐야 한다는 생각에 빠진 사람도 건설현장에서 일할 때는 튼튼하고 편한게 핵심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뭐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우리가 그 질문을 둘러싼 비교대상과 환경을 두루 살펴보는 일은 어떤 것의 쓸모는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걸 잊을 때 우리는 당첨된 복권을 이미 들고 있으면서도 그걸 찾아헤매다가 자신이 들고 있는 복권을 찢어버리는 사람이 되게 된다. 자식이 아인쉬타인으로 태어났는데 그 아이를 구박하면서 한숨만 쉬는 격이랄까. 언제나는 아니라도 대부분은 우리의 인식의 넓이가 문제의 원인이다. 더 넓은 인식의 지평속에는 더 넓은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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