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5
우리는 누구인가? 이 세상은 어떤 곳인가? 이걸 생각하는데 있어서 본질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구체적인 뭔가의 본질이 뭔가를 묻기 전에 애초에 본질이란 것 자체가 뭔가를 좀 더 일반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걸 지적하기 위해 두 개의 예를 들어 보자. 여기 도토리같은 씨앗이 있다고 하자 그리고 이 씨앗의 미래는 무엇인가라고 누가 묻는다고 하자. 그 씨앗이 어딘가에 심어져 싹이 트고 나무가 되었다면 이 씨앗의 미래는 그 나무인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다고 할 것이다. 우리는 살아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 살아있지 않은 것을 생각해 보자. 여기 한방울의 잉크가 있다. 그것이 만년필의 펜촉끝에서 떨어져서 하늘을 날고 결국 컵속의 물 위로 떨어진다. 그리고 그 물에 잉크는 퍼져나간다. 누군가가 이 잉크방울의 미래를 물었다고 해보자. 잉크방울은 그 컵속에 있는 잉크가 퍼진 물이 된 것인가? 아니면 이 경우 물에 닿는 순간이 그 잉크방울의 최후순간이 되는 것이고 그 이후에는 잉크방울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인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잉크방울은 물과 섞이는 순간 사라진다고 생각할 것이고 혹은 이런 선택이 그저 말장난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적어도 씨앗의 미래를 이야기할 때보다는 훨씬 더 답에 대해 머뭇거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잉크방울이 물과 섞이는 순간 사라진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다면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다. 컵에 물을 담아서 양지에 놓아두면 알게 되듯이 사실 물은 증발한다. 그러니까 엄격하게 말하자면 잉크방울이 물에 닿기 전에도 그 잉크방울 속의 물들은 공기속으로 확산하고 있었다. 그래서 잉크방울이 물 위가 아니라 대리석 바닥에 떨어져도 그것은 마르고 결국 잉크자국이 되고 만다. 그런데 어떻게 공기속을 날고 있었던 잉크방울은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물과 섞이면 존재하지 않게 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애초에 여기 잉크방울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한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은 어떤 의미로 우리가 생각하는 물질이 아니고 순간을 포착한 관념이며 사실 물질이라는 것 자체가 관념이다. 잉크방울은 관념이다. 애초에 그것은 엄밀하게 존재한다기 보다는 우리가 관념적으로 순간을 포착해서 만들어낸 세상의 일부분이다. 그리고 이것은 반드시 잉크방울 같은 물질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주목할 만한 예는 원자일 것이다. 애초에 영어로는 자를 수 없다는 뜻을 가진 원자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 물질이 아닌가? 여러분은 원자도 원자핵과 전자로 갈라지고 쿼크같은 더 기본입자로 구성된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원자는 기하학에 나오는 삼각형이나 원만큼이나 관념적인 존재다. 우리의 상식과 사고는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만들어 진 것이기 때문에 원자의 성질을 말할 때 등장하는 양자역학은 그런 상식으로 이해될 수 없다. 원자는 물질이지만 입자이며 파동일 수 있는 존재이고 원인이 없이 결과가 나오기도 하는 존재다. 우리가 감각적으로 느끼는 의자나 물같은 물질들의 성질에서 추론해서 생각할 수 있는 '관념이 아닌 물질'이라는 식의 생각은 적용되지 않는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원자가 아니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 자신내지 인간 혹은 생명일 것이다. 너무 비약하지 않기 위해 생명에서부터 이야기해보자면 생명은 물질이 아니라 바다에 생긴 파도처럼 현상이라는 것을 깨닿게 된다. 즉 설사 원자가 변하지 않는 기본입자라는 생각따위를 인정하더라도 수없는 원자들로 이뤄진 것들은 모두 그 자체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바다라는 매질위에 생긴 파도처럼 물질이라는 매질위에 생긴 현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물질이 아니고 물질로 이뤄진 세상에 생겨난 하나의 파도다. 잉크방울만 흐릿한 경계선을 가지고 환경과 끝없이 뒤섞이고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은 더하다. 살아있는 것은 그 환경과 대개 더 많이 더 빨리 물질을 교환한다. 그래서 여기에는 더욱 심각한 본질의 문제가 생긴다. 우선 우리 자신이 살아있는 생명이다. 이렇다고 할 때 나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너는 또 뭔가? 어제 나에게 돈을 빌려준 너는 오늘의 너와 같은 사람인가?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왜 나는 오늘의 너에게 빚을 갚아야 하는가?
더 빨리 더 많이 변하는 것들 앞에서 우리는 잉크방울에게 하듯이 간단히 순간을 포착한 관념을 가지고 존재를 논하기가 어려워진다. 우리는 표면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하지 않는 뭔가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는 바로 본질이 필요하다. 이런 믿음의 대표주자는 바로 영혼이다. 이 믿음에 따르면 살아있는 것은 이 영혼이라는 것을 가진다. 그리고 이것은 바뀌지 않으며 심지어 죽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조그만 아기가 커서 성인이 되고 노인이 되어도 그 사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본질의 파악은 반드시 영혼같은 것에서만 멈추지 않는다. 칼을 든 나와 칼을 버린 나는 같은 사람이다. 칼의 소유가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바꿀만한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칼에 어떤 사람이 죽었다면 그 사람은 나에게 죽음을 당한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논할 때 내가 소유한 칼은 의지를 가지지 못한 비본질적인 부분이다. 이 소유는 칼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론적으로는 두 사람이 서로의 심장을 교환해서 이식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장기이식이나 헌혈이 보편화된 시대를 사는 우리는 그 두 사람의 본질이 바뀌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가 내 손을 가져가서 자기의 팔에 붙인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즉 본질적으로 바뀐 것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뇌를 서로 바꿀 수 있는 기술을 가졌다고 할 때 그걸로 서로의 뇌를 바꿔도 우리는 그 사람을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까? 뇌와 함께 정체성도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흥미롭게도 고대 그리스인은 뇌가 펌프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생각은 심장으로 했다고 믿었다고 한다. 과거의 사람들이라면 심장교환은 물론 피교환만 해도 그 사람의 본질이 침해당했으며 따라서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했을 것이다.
질문은 당연히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뇌의 본질은 무엇인가? 뇌라는 이름 하나에서 우리가 멈춰야 할 이유는 없다. 전두엽과 측두엽, 시각피질과 해마조직등 당신의 뇌는 여러가지 부분들로 나뉘어 있다. 그리고 실제로 로보토미라고 해서 전두엽의 일부를 파괴하는 것을 치료로 여겼던 뇌의학의 흑역사도 존재한다. 이렇다고 할 때 뇌가 곧 그 인간이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전두엽이나 시각피질은 우리의 본질이 아니고 소유물인가? 그렇다면 변연계가 우리의 본질인가? 요즘 늘어가는 질병인 치매를 생각하면 물질이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우리는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뇌가 부분적으로 기능을 잃어가고 그 기억이 사라져갈 때 우리는 여전히 그 사람이 그 사람으로서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야 할까? 우리는 물론 기능이 줄어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망한 이후에도 그 시신을 마치 그 사람처럼 다루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관습이 있다. 그러니까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은 것정도로 어떤 사람이 자신의 본질을 잃었다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옳을까?
본질에 대한 생각은 이렇게 우리의 몸안으로 자꾸 좁아만 들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 자아를 자신의 본질이라고 여긴다. 당신은 김씨 집안의 장자라거나 여자라거나 어떤 대기업의 이사라거나 한국인이라는 것을 당신의 본질이라고 여길지 모른다. 당신의 본질이 당신의 가문이라면 그것이 무너질 때 당신의 삶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그걸 위해서는 무슨 일을 해도 정당화가 가능하다. 돌을 던지면 그 돌은 떨어질 것이다. 이것은 당연하다. 자신의 본질이 가문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가문을 위해서 하는 일은 자신의 개인적 의지와 상관없이 당연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직장인이면 회사가 사람을 죽이라고 해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정조나 성적인 매력를 소중히 생각하는 여자라면 그것을 위해서는 사람을 죽이건 자살을 하건 어쩔 수가 없다고 여길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본질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없으면 살 수도 없고 살아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본질의 문제는 장자는 빈배 이야기에서도 나타난다. 빈 배가 강물을 따라 흘러서 나의 배에 부딪힐 때와 누군가가 탄 배가 그렇게 했을 때 보통 후자의 경우 우리는 화를 낸다. 빈 배와 사람이 탄 배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빈 배가 나를 위협하는 것과 사람이 탄 배가 그렇게 하는 것은 서로 다르다. 그런데 뭐가 다를까? 뭐가 본질인가?
다시 도토리로 돌아와보자. 도토리가 땅에 떨어져서 자라고 나무가 되었다. 도토리의 미래는 나무인가? 이제 다른 단어들을 생각해 보자. 산이며 책상, 꽃 그리고 바다나 국가같은 것도 생각해 보자. 이런 것들도 모두 우리가 어떤 순간을 포착하여 만들어 낸 관념에 임의적으로 본질을 추가해서 시간적으로 오래 오래 존재하도록 만든 것이 아닌가? 심지어 우리 자신도 그런 과정의 결과물이 아닌가? 우리는 물질인가 관념인가? 뭐가 우리의 본질인가?
절대적인 의미에서 본질은 무의미하고 삶은 부조리하다. 하지만 본질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외면할 수 없다. 다른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저 편의에 의해서 만들어진 환상이라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논리적으로나 말의 흐름에 따라 그걸 간단히 받아들이는 것과 이런 말을 진심으로 깊게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 다르다. 어제 누군가가 당신에게 상처를 주었는데 당신은 오늘의 그는 어제의 그가 아니므로 나는 그에게는 단 하나의 유감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어제의 당신은 집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의 당신은 어제의 당신과 같은 사람이 아니므로 그런 재산따위는 꼭 내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그걸 남에게 줘버릴 수 있는가? 설사 그럴 수 있다고 해도 당신은 정말 아무 것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어떤 것에도 집착이 없는가?
진정한 본질, 절대적 본질따위란 없다. 우리가 이 말을 깊게 받아들인다면 나와 너의 구분은 세상에 없다. 생명이란 바다위에 생긴 파도와 같은 현상이고 적어도 이 지구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관점에 따르면 모두 하나의 바다위에 생겼다가 없어지는 형제와 같은 파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이 부조리하다는 것, 삶에는 본질이 없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아무 것도 줄 수 없다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려서는 안된다.하지만 한명의 유한한 인간으로서 우리가 간단히 우리의 본질, 우리의 삶을 포기할 수도 없다.
이 두 개의 모순된 이야기들을 동시에 긍정하고 동시에 잊지 않는 것은 긴장을 불러 일으킨다. 그런데 그것이야 말로 인간의 삶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섯불리 자신을 버리고 모든 것을 허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발전은 커녕 살 수가 없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긍정만 하면서 지금의 자신에 머물러만 있는 사람도 어떤 의미로 인간의 삶을 산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돌멩이의 삶이나 타고난 본능에 따라 사는 짐승의 삶이다. 그래서 물리학자 쉬뢰딩거는 인간의 삶의 본질을 스스로를 초극하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 지금의 자기를 소중히 여기면서도 새로운 자기를 갈망하는 것이 진짜 인간이지 과거에 파뭍혀서 사는 존재는 진짜 인간이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의식의 기본적 성격이라고 말한다. 숨쉬기처럼 단순하게 반복하는 행동들, 그저 과거를 반복하는 행동들은 대개 우리의 의식바깥쪽으로 가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깨어있는 인간, 의식을 가진 진짜 살아있는 인간이란 자기를 초극하기를 포기하지 않은 인간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변하지 않는 본질따위를 인정할 수 없고 인정해서도 안된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지금이 있게한 과거와 현재로 이어지는 우리의 본질에 대해 고민해야 하고 그 본질을 인정하면서도 그 본질을 부정하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절대 변하지 않는 본질이 있다고 믿으면 가망없는 인간은 영원히 가망없을 것이다. 반면에 잘난 인간은 영원히 잘난 존재일 것이다. 이건 자기 부정이 아니면 과대 망상으로 가는 길이다. 반면에 본질따위가 없다는 것에 철저하면 우리는 허무주의에 빠지게 될 것이다. 내일의 나는 지금의 나와 관계없는 존재인데 내가 미래를 대비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어느 쪽으로 가도 우리는 함정에 빠진다. 그리고 이에 대한 고민이 없을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그렇게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그렇지만 국가적으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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