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28
옛 글을 읽다가 새삼 다시 배운 것이 있다. 그건 우리가 말의 함정에 빠져서 세상을 1차원으로 보기 쉽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선거철이라서 진보니 보수니 하는 것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보통 극좌-진보-중도진보-중도보수-보수-극우 뭐 이런식의 나열을 하고 나는 진보와 중도진보를 지지한다던가 보수와 극우를 지지한다던가 하는 식의 태도를 취하기 쉽다. 이러한 사고가 1차원 사고다. 즉 0점에서 100점까지처럼 하나의 점수로 사람들이나 정당을 나열하고 대충 이정도가 내 취향이라는 식으로 어느 부근을 찍는다.
그런데 이런 사고는 당연히 아주 많은 경우 엉터리이다. 아마 실생활에서는 거의 다 엉터리일 것이다. 과학이나 수학처럼 다른 조건들을 정확히 측정하고 조정하는 상황이 아닌 것이 현실 생활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이라는 것을 뽑는 투표를 한다고 해보자. 거기서 여러분은 모든 음식을 매우 짜다 - 보통 - 싱거움으로 구분한 후에 난 짠 음식이 좋아하고 말하면서 짠 음식을 뽑는가? 아니면 매우 매움 - 보통 -전혀 맵지 않음은 더 좋은 기준인가? 어떤 기준이든 이런 식으로 뽑은게 정말 맛있는 음식 뽑기라는 애초의 목적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정치가 이런 식으로 되기 쉬운 이유를 우리는 나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론을 인정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이 1차원적 사고방식을 당연시 한다면 우리 정치가 개판인 이유를 영원히 알 수 없을 것같지 않은가? 사람들이 투표로 맛있는 음식뽑기를 해서 그런 음식들을 모아놓았는데 그 투표방법이 위에서 말한 짜다 안짜다 정도였고 그 결과가 다 쓰레기 같다면 우리는 그걸 당연시 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뽑으니 쓰레기지. 그런데 우리는 지금 왜 각종 의회는 쓰레기같냐고 불평할 수 있을까? 만약 선거가 이런 식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다면 우리가 정치판에 기대를 할 수 없는 이유가 분명하지 않은가? 1차원적인 구조에서는 진보와 중도진보는 서로 가까이에 있으니까 비슷하다. 그런데 정말 이런 식으로 거리감을 가져도 좋은 것일까? 이거 축구선수 손흥민과 피겨선수 김연아는 종목이 다르니까 매우 다른 사람이고 반면에 김연아와 도핑의혹의 러시아 피겨스케이트 선수는 서로 비슷한 사람이라고 하는 논리아닐까?
똑같은 문제는 여러가지 상황에서 발견된다. 대표적인 것이 돈이다. 돈은 시장가치를 측정하는 방법중 하나이기는 하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그 시장가격대로 나열하는 일에 너무 익숙하지 않은가? 그렇게 되면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은 위에서 말한 투표와 같은 것이 된다. 비슷한 시장가격을 가진 것은 비슷한 가치를 가졌다고 단정짓는다. 그렇게 해서 우리 인생에서 소중한 결정들을 처리해 간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까? 20억짜리 집은 무조건 감탄이 나오고, 1억짜리 집은 무조건 시시하다는 생각으로 살면 딱 주식시장에서 소문듣고 투자하는 사람과 같아지지 않을까? 즉 지금 비싼 것은 가치있다는 생각에 열심히 사모으는데 시간이 지나면 그게 폭락하는 것이다. 남들이 다 좋다고 하니까 비싼 사교육도 시키는데 유행이 지나고 보면 그게 다 미친짓이었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진보-보수의 1 차원 사고에 빠지면 나는 진보도 보수도 아니라고 말하면 그 사람을 정치적으로 평가하지 못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적어도 지금 당장 시장가치로 평가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하면 이 사람은 장님이 되고 당황하게 된다. 그런 건 아예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요즘 세상에는 그 시장가치라는게 워낙 빨리 변해서 학교에서 가르치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도 잘 맞지 않는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가정하는 것은 매매시장내에서 어떤 균형점이 발생하고 그 균형점이 안정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미래가 너무 빨리 펼쳐질 때에는 그럴 수가 없다. 아마존은 세계 최고의 기업중 하나지만 쿠팡처럼 내내 적자기업이었다. 왜냐면 회사를 키우는 투자에 모든 돈을 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산과 수익으로 아마존을 평가하면 세상에서 가장 엉망인 기업이다. 그런데 그 아마존이 세계 최고 부자를 만들어 낼 정도로 성장했다. 마찬가지 이야기를 우리는 전기차 회사 테슬라에게도 할 수 있다. 수요와 공급, 시장가치? 그런게 뭔가? 당신의 주변 사람들이 모두 테슬라가 엉터리라고하면 그건 시장가치가 낮은 것이고 그 반대면 시장가치가 높은 것인가?
이 1차원 사고의 억압은 도처에 존재한다. 그건 고의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축구를 잘하는 사람은 세상을 축구실력이라는 기준으로 1차원으로 만들고 싶을 것이다. 학벌이 좋은 사람은 세상을 학벌기준으로 1차원으로 만들고 싶다. 직급이 높은 사람은 세상을 직급기준으로 1차원으로 만들려고 한다. 왜냐면 그런 1차원 구조는 후발주자나 약간 운이 없는 사람들이 선두에 있는 사람을 쫒아오기 어렵게 만들고 심지어 일종의 착취구조를 만들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를 위해서 1차원 사고의 억압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성적만능의 세상에서는 학교시험을 잘보는 사람이 얼마든지 다른 사람에게 잘난척을 할 수 있다. 더 좋은 대우를 받는 것도 더 많은 기회를 가지는 것도 정당화할 수 있다. 부자나 가난뱅이에게 잘난 척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사실 그 가난뱅이가 그 부자에게 돈을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며 심지어 그 가난뱅이가 그 부자를 부러워하지 않는 경우에도 그 부자는 가난뱅이는 나를 부러워 할 것이 틀림없다고 굳게 믿고 그렇게 말한다. 물론 일반적으로 말해 돈은 부러운 것이다. 하지만 이 사고에 빠진 사람은 1차원 사고를 다시 돌아보기 바란다. 당신은 지금 짠 인생이 싱거운 인생보다 좋다는 식의 이야기를 당연시하고 있는 것이다. 전세계에서 이쑤시게 탑쌓기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내가 그것에 관심이 없다면 내가 왜 그 사람을 부러워 해야 하는가?
억압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억압을 피하는 사람이 일반적으로는 현명하다는 뜻이다. 물론 우리는 모든 억압을 피할 수는 없다. 왜냐면 게임의 법칙을 우리가 다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어느 정도는 남이 만들어 놓은 규칙에 따라서 경쟁하고 일하고 댓가를 받게 된다. 하지만 남들이 1차원적인 사고의 억압을 던질 때마다 그 그물에 빠져든다면 우리의 인생은 아주 고달퍼진다. 그 기준에 따르면 당신은 반드시 가치없는 인간이며 죽도록 일해도 당신이 진 빚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야 하고, 우리는 세상의 규칙을 따르면서도 그 규칙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언제나 소수자로 사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언제나 그저 흔한 사람, 보통 사람,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사람으로 산다면 우리의 진짜 인생은 영원히 시작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중간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은 가장 불쌍한 사람에 가깝다. 설사 운이 좋아 재벌 3세로 태어나거나 어떤 분야의 천재로 태어나도 결국은 남에게 이용만 당하는 노예처럼 살 것이다.
이런게 대단하거나 새로운 지적은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세상은 이 1차원적 사고가 득실댄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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