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3.14
당신이 어느 방에 앉아 있다고 해보자. 당신은 당신의 소파 앞쪽의 벽에 시계가 걸려 있는 것을 본다. 그 하얀 벽에는 시계밖에는 없는데 그 시계는 소리도 없이 시계침을 돌리고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세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당신은 잠에서 깨어나고 당신이 보았던 그 시계가 있는 방은 실제가 아니라 꿈의 일부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패러다임이라는 말은 오늘날 아주 흔해진 말이지만 생각해 보면 매우 충격적인 개념이다. 왜냐면 우리가 보고 듣는 것 즉 우리가 아는 것이 사실은 사실이 아닐 수 있다라는 것을 주장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패러다임의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그 패러다임이 보여주는 것만 보게 되고 그 패러다임을 넘어서 세상의 실체를 보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하나의 패러다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계속 반복된 관행을 보게 된다. 그래서 어느새 모든 것은 당연한 일이 되고 당연한 것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우리는 어느새 질문해야 하는 것이 뭔지 자체를 모르게 된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패러다임을 1962년에 발표한 과학혁명의 논리에서 처음 소개한 철학자 토마스 쿤은 과학의 발전을 설명하면서 이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물리학자들조차 이 패러다임의 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런데 물리학자가 누구인가? 이들은 엄밀한 측정과 관찰을 통해 과학법칙을 발견해 온 과학자들이며 컴퓨터를 포함한 정밀한 기계의 도움을 받아 이 세상을 아주 정밀하게 관찰한 데이터를 엄청나게 축적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 하나가 아니라 이런 사람들의 집단인 물리학자 집단도 패러다임의 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을 현미경으로 보고 망원경으로 보고 그것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집단으로 봐도 그렇다. 그래도 패러다임을 벗어나기가 매우 힘들다.
그렇다고 한다면 대충 개인적으로 관찰하고 생각 하는 개인들이 패러다임의 힘을 이겨내기란 얼마나 힘들 것인가?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잠을 자고 있지 않다. 그리고 아마도 당신의 주변의 벽에도 시계가 있고 그 시계는 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패러다임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기억하고 당신이라는 한 개인은 아인쉬타인이니 뉴튼이니 하는 희대의 천재들을 포함한 과학자들 집단보다 더 뛰어나고 조심스럽다고는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 할 때 우리는 물을 수 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이 꿈을 꾸고 있는게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가?
패러다임이란 말은 우리가 여러가지 의미에서 닫힌 세계안에 갇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가 패러다임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사실상 어떤 것도 인식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보고 느끼고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상 어느 정도는 허구라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당신이 사장이고 사원들에게 월급을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컷하는 말이 들려올지 모른다. 알고보니 이 모든 것은 그저 연극이었고 당신은 그저 사장역할을 하는 배우였을 따름이며 당신의 배우자와 자식들도 실은 다 배우라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우리는 그 사람을 과대망상증이나 조현병같은 것을 가진 정신병자로 여길 것이다. 그런데 패러다임이라는 말은 사실 누가 미친 건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어느 날 안정된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회사 바깥으로 떠난 동료 직원을 볼 때 만약 그 사람의 동기를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우리는 말할 것이다. 저 사람은 좀 미친 것같다고. 하는 말도 횡설수설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하지만 어느 날 당신이 뭔가의 이유로 잠에서 깨어나서 그 사람의 말을 이해하게 된다면 세상은 전혀 달라 보일 수 있다. 그때는 꼬박꼬박 늙어서 힘도 없어질 때까지 모든 개인적인 것을 파괴하면서 회사에 다니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미친 사람이고 회사에서 도망나간 그 친구야 말로 정상인으로 보일 수있다. 그리고 당신은 아직도 낡은 패러다임안에 있는 사람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횡설수설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의 말은 너무나 분명한 말이고 과거에 분명한 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이제보니 횡설수설 불확실한 말처럼 들린다.
서양의 철학자들을 포함해서 과거의 많은 사람들은 많은 것을 의심했고 조심스레 자신의 생각을 펼쳤지만 의심 중의 의심은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다. 당신이 만약 당신의 기억조차 의심한다면 당신은 이 글을 읽기 시작했을 때의 그 사람과 지금 이 글의 마지막을 읽고 있는 당신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조차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분명하고 명확하다는 주장도 패러다임이라는 말 앞에서면 당신의 확신은 그저 패러다임이 만들어 낸 환상일 수있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생각해 보면 이 패러다임이란 말은 도가의 도나 선불교의 견성과 비슷한 데가 많다. 도나 불성은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다같은 말은 패러다임에서는 패러다임은 우리가 볼 수 없다는 말로 변화되어 있다. 차이가 있다면 패러다임은 다른 패러다임으로 대체되고 이것이 반복되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득도나 견성은 이런게 아니라 깨달은 상태로 한순간에 도에 이른다는 암시가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러니까 패러다임을 알아채는 것은 득도를 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이다.
이로서 패러다임의 이야기는 자기 완결성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볼 수 없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은 사실이 아닌 것이 된다. 그건 새로운 패러다임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긴 꿈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이런 완결성은 패러다임을 논리나 증거로 깨기가 어렵게 만든다. 우리는 오직 불확실한 비약을 통해서만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패러다임은 이렇게 놀라운 말이다. 그것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에게 아무리 퍼올려도 더 많은 물을 주는 우물처럼 생각할 거리를 준다. 다만 너무 남용되는 경향이 있어서 모든 사소한 변화를 가지고 패러다임의 변화 운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패러다임의 개념에 애매한 점이 본래 있기 때문에 그런 거지만 거대한 변화의 장벽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패러다임 운운하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모처럼 우리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말을 들었는데 그걸 사소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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