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2.4
오늘날 객관적이라는 말만큼 중요시되는 말도 없을 것이다. 합리적이라는 말은 객관적이라는 말과 거의 같은 말로 쓰이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객관적이 되라, 객관적인 것이 중요하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산다. 그러니 자연히 우리는 우리의 말과 행동이 의미가 있고 중요하다는 결론을 만들기 위해 그것들이 객관적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완벽하게 객관적인 사실이란 세상에 없다. 다만 지극히 근사적으로 객관적 사실이 있을 뿐인데 이 차이를 잘 생각해 보지 못하면 문제가 생긴다. 사소한 것부터 말하자면 이런 사람은 남과 싸우게 되기 쉽다. 왜냐면 그 사람은 지극히 불합리한 주장을 남에게 강요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게 되기 때문이다. 큰 것을 말하자면 이것은 문명적 한계 특히 서구 문명의 한계를 보여주는 문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세상에는 엄밀하게 말해 객관적 사실이 없을까? 그 이유는 모든 사실들은 그 사실들이 놓여진 더 큰 문맥 안에서 파악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형이상학이나 전제 혹은 상식이라고 불리는 이 문맥은 적어도 다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길게 말해도 우리에게는 아직 말하지 못한 부분이 남을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모든 사람에게 같은 뜻으로 통하며 절대로 오해될 가능성이 없는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기괴한 문맥을 상상해 내면 어떤 사실도 완전히 다른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비행기가 빛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는 없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일까? 이는 아주 유명한 상대성 이론의 결과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건 객관적 사실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꿈에서 말이야라고 한마디만 더하면 피식 웃고 말 것이다. 어떤 사실도 결국은 전체의 부분일 뿐이며 따라서 다른 문맥에 놓이면 다른 뜻이 된다. 전체의 부분을 보면서 뭔가를 당연한 것으로 가정한다는 사실 그게 문제를 만든다.
다른 예를 생각해 보자.
황금은 무겁기만 하다. 쓰레기나 마찬가지다.
이런 주장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황금이 쓰레기라는 주장에 놀랄 것이다. 왜냐면 평화로운 세상에서는 황금은 보통 그 교환가치로 평가받는 일이 많은데 여기서는 황금의 무게에 집중하면서 황금이 쓰레기라는 결론을 내리기 때문이다. 황금은 사실 아주 여러가지 성질을 가진다. 교환가치도 있고, 황금색을 띄며, 화학적으로 안정적이라 변하지 않고, 먹어도 인체안에서 해를 끼치지 않는다. 전기를 잘 통하고 금속으로서는 매우 무른 편에 속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무게라던가 교환가치라던가 하는 일부에 주목한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가지 측면들을 가진 것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그 중 하나를 떼어낸 후 그것 하나의 가치를 따로 평가할 수 있을까?
사물을 그 부분으로 분할 할 수 있고 그 분할 된 부분을 각자 고려할 수 있다는 환원주의는 오직 근사적으로만 옳으며 때로는 많이 틀리다. 조립식 로보트에서는 한 쪽 팔을 몸의 다른 부분을 건드리지 않은 채 다른 팔로 갈아 치울 수 있다. 하지만 생명체에서는 전체의 몸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 호랑이가 하늘을 날고 싶다면 날개만 필요한게 아니다. 전체 몸이 비행에 걸맞게 바뀌어야 한다. 그러므로 유기적으로 서로 얽혀있는 전체를 하나씩 분해해서 고려하는 것은 마치 산 사람을 죽여서 시체로 만든 후 인간을 연구하는 것과 비슷한 문제를 가져온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그 경우 이미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었던 시체고 살아있는 인간의 특성은 없는 것이다. 뇌에서 분리해 낸 뇌세포 한개를 연구해서 뇌의 기능을 연구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도레미파솔라시도라는 음들을 알면 거기서 교향곡이 나오나?
이것은 부분과 전체의 문제다. 부분으로 전체를 가늠하는 것은 언제 유효한 것이고 언제 매우 큰 오류를 발생시키나? 분명한 것은 모든 인간은 유한한 시야만을 가진다는 것이다. 옷을 고르던, 차를 고르던, 친구를 고르던, 직업을 고르던 우리가 보고 판단하는 부분은 전체의 아주 일부다. 그렇기에 우리의 판단은 서로 달라지게 되고 우리는 그것을 주관적 판단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분이 전체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지만 그것도 정도의 문제가 있다. 불행하게도 세상에는 유달리 시야가 좁은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들은 전체의 일부라고 해도 정말 작은 일부만으로 전체를 판단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판단이 객관적이라고 믿는 실수를 잘 저지른다. 그 결과로 스스로와 남을 불행하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가 어떤 의견을 말할 때 이건 그냥 내 주관적 느낌인데라고 말하면 세상에 싸움 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관적 느낌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가 어떤 말을 하건 그것은 제한된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라고 미리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조선사람들이 일제시대 때문에 근대화되었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라고 말하거나 공자가 중국인이라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라고 말한다. 마치 그것이 과학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데 이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내가 이에대해서 말하기 시작하면 글의 주제가 이상한 곳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나는 위에서 언급한 말들을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겠다. 나는 다만 엄격한 의미에서 객관성이란 환상이며 현실에서는 사실들은 언제나 제한된 의미만을 가진다라고 다시 한번 지적할 뿐이다.
현대인들이 객관성의 환상에 빠져 있는 것은 상당부분 과학의 성공덕분이다. 시공을 초월하는 과학의 강대한 객관성때문에 사람들은 아주 쉽게 과학적 논리를 흉내내면서 자신들의 생각이나 태도가 객관적이라는 잘못된 결론에 빠져든다. 이는 여러모로 틀린 생각인데 첫째로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은 제대로된 과학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둘째로 설사 과학적 연구의 결과라고 해도 많은 것들이 객관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문제는 분리에 있다. 뉴튼의 물리학도 그 첫번째 스텝이 고립계를 도입하는 것이다. 여기 텅빈 공간에 존재하는 하나의 질점이 있다는 식이다. 우리는 당신의 키를 잴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의 키가 177cm인 것은 객관적이고 과학적 사실이라고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과 50kg의 똥은 같은 무게를 가진다는 것도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사실일 수 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의미가 없는 행위나 사실이 존재할 수 없다. 왜냐면 모든 것은 언제나 어떤 문맥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객관적 사실은 없다. 내 키가 177cm라고? 그런 사실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 내 엄지발가락위의 털의 갯수따위는 아무도 세지 않으면서 왜 누군가는 내 키를 쟀을까? 키라는 것이 어떤 문맥에서 흥미를 끄는 요소가 없었다면 애초에 내 키를 재는 행위가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어떤 여성을 볼 때마다 가슴이 참 크군요라고 말했다고 하자. 그 말을 들은 그 여성이 그걸 성추행이라고 주장하자. 이 사람은 이렇게 반박했다. 당신의 가슴이 평균보다 훨씬 큰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나는 사실을 사실대로 말했을 뿐인데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요즘 사람들이라면 이런 반박에 동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특히 그 누군가가 남성이라면 그럴 것이다. 그런데 어떤 남자가 어떤 여성의 가슴크기를 언급하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어떤 '의미'를 가지는 말이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왜 객관적 사실이란게 그렇게 쉽게 달성될 수 있다고 믿을까?
사실 알고 있는 객관적 사실들을 말해봐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금방 수없이 많은 사실들을 나열하면서 그 사실들은 객관적이라고 쉽게 단언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는 지금 그것들의 객관성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는게 아니라는데 있다. 다만 긍정도 하지 않을 뿐이다. 부정하지 않지만 긍정도 하지 않는다. 이 차이를 느껴야 한다.
사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것은 모두 어떤 의도와 이유가 있어서 여러분들이 알게 된 것이다. 이 세상에는 누군가는 알고 있지만 여러분들은 관심이 없기에 전혀 알지 못하는 사실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그런 사실들 말고 하필 지금 알고 있는 사실들을 알게 된 것은 무엇때문일까? 설사 모든 지구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라도 어떤 미지의 외계인이 모르는 사실도 있을 수 있다. 이래도 정말 그것들이 완벽하고 순수하게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내가 흔히 하는 말처럼 객관성이란 동서남북같은 것이다. 우리가 지구라는 행성위에 있는 한 동서남북은 생생한 실체지만 일단 우주공간으로 떠오르면 그것은 허구다. 지구라는 기준점이 없으면 동서남북은 없다. 지구위에 서서 달위에 있는 사람에게 북쪽으로 가라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객관성이란 이런 것이다.
나는 이미 이 객관성에 대한 환상, 분리에 대한 지나친 신뢰가 왜 개인적인 차원에서 싸움을 쉽게 만드는 가를 말했다. 그리고 과학문명을 거론했기에 이미 어느 정도 왜 이것이 문명적인 문제에까지 이어지는가도 어느 정도 언급한 셈이다. 이에 대해서 한두마디만 더하고 이 글을 마치자.
서구인들은 뼈속까지 환원주의에 물들어 있다. 그들은 사회도 개인으로 이뤄져 있다는 개인주의를 깊게 신봉하여 21세기의 할리우드 영화나 드라마도 계속 해서 나, 나, 나를 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이 꼭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나와 사회를 분리하는 순간 우리는 착각에 빠지고 자기를 오해하게 된다. 물을 떠난 물고기는 죽고, 프로야구리그를 떠난 프로야구선수는 의미가 없다. 세상을 뒤흔드는 미인이라고 해도 고릴라 무리안에 있으면 의미가 없다. 나를 구성하는 의미는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과의 관계에서 대부분 나오고 그것을 사소한 것으로 여기는 관점은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먼저 있고 그 나라는 개인들이 모여서 사회가 이뤄지는가? 프로야구 리그와 야구선수의 관계처럼 개인이 사회를 만드는 이상으로 사회가 개인을 만든다.
이런 개인주의적 관점은 사람들이 자기땅을 소유하고 그 안에서 자급자족으로 살아가는 시대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개인들이 사회적 문제로 협력하는 문제는 예외적인 상황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은 모든 것이 아웃소싱되어 있다. 즉 우리는 거의 자급자족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남에게 의존하며 살아서 완전히 고립된 나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개인주의가 문제를 만들지 않을까? 예를 들어 내가 백신을 맞지 않는 것이, 내가 자가격리를 지키지 않는 것이 정말 나만의 판단이 맞는가?
나를 사회적인 존재로만 파악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그 반대도 옳지 않다. 세상없이는 내가 없다. 우리는 매우 유한한 존재이며 우리는 무지의 경계선으로 둘러쌓여 있다. 이를 잊어버리고 쉽사리 객관성운운할 때 우리는 위험에 빠진다. 그 위험 중의 하나는 내가 이 객관적 사실을 저 무지한 자들에게 가르쳐 줘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상대방은 기분이 나쁘지만 꾹 참고 그게 왜 꼭 객관적이 아닌지 설명해 주려고 하지만 그 설명이 이미 우리의 귀에는 들리지 않게 된다. 바로 객관성을 확신하는 그 마음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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