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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삶의 즐거움

by 격암(강국진) 2022. 1. 28.

2022.1.28

우리는 뭘 위해서 사는가?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인생의 의미나 목적을 묻는 대단한 질문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좀 더 작은 규모로, 좀 더 우리의 일상에 가까운 거리에서도 우리는 이런 질문에 대한 실용적인 답이 필요하다. 삶의 낙 혹은 삶의 즐거움이라고 부르는 이것이 없이는 똑같이 반복되는 매일 매일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삶이 괴로워 진다. 작고 사소한 예를 들자면 나는 곧잘 설거지를 할 때 음악을 듣거나 유튜브를 튼다. 그러면 설거지라는 귀찮은 일이 음악을 듣기 위해 필요한 일로 변하면서 꽤 할만한 일이 되는 것이다. 일상을 견디기 위해 우리는 이런 즐거움이 되는 일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인생의 최종적 목표같은 것이 아니므로 어떤 철학적 정당화같은 것은 필요없다. 요즘 내 삶의 즐거움이 돈버는 것이라면 그것도 괜찮다. 그런 답을 말하는 사람이 내 인생의 궁극적 목표는 돈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은 그저 통장에 돈이 올라가는 것을 보면 즐겁고 마음의 불안감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당장은 그걸로 충분하다. 그렇게 살다가 충분히 돈이 모이거나 혹은 어떤 다른 계기가 생기면 다른 걸 삶의 즐거움으로 삼으면 된다. 오늘 하루는 점심에 햄버거를 먹을 것을 기대하며 산다는 말이 죽을 때까지 매일 점심을 햄버거를 먹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요즘엔 주택에 대해 공부하는 일이 즐겁다고 해서 평생 주택만 보고 살 이유는 없다. 그러니 나와 다른 사람의 답이 똑같아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이같은 말을 적은 후 그걸 스스로 다시 생각해 보면 여기에는 형식과 내용이라는 구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내용에 해당하는 것을 삶의 즐거움으로 삼고 그 이외의 것을 그걸 얻기 위한 형식으로 삼는다. 매일 한편의 시를 쓰기 위해 사는 시인도 청소도 하고 밥도 먹고 산책도 하고 책도 읽으며 돈도 벌고 사람도 만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를 쓰는 것이 불가능하다. 꼭 생활비가 없어서는 아니다. 설사 한동안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도 텅빈 방안에서 사람을 만나지 않고 시만 쓰는 삶을 산다면 그의 시는 점차로 공허해질 것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그것만 먹어서는 계속 맛있을 수 없듯이 우리의 삶은 언제나 내용에 해당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형식에 해당하는 다른 부분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 형식과 내용에 대해서는 오해가 존재하기 쉽다. 무엇이 삶의 즐거움인지는 그것 자체가 가지는 객관적 의미보다는 그 일상을 사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느끼는 의미가 결정한다. 내가 매일 매일 친구와 전화를 하는 걸 삶의 즐거움으로 삼고 산다고 해도 그것이 모두가 그래야 한다는 뜻일리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멈춰서는 안된다. 친구와 전화를 하는 것의 의미가 우리에게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우리가 통화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그것없이 삶의 낙이란 주관적이라 뭐든지 될 수 있다라고만 여기면 마치 뭐든지 선택만 하면 그것이 삶의 낙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여기게 된다. 이런 틀린 생각은 종종 티비나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누군가의 행동을 따라하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뭐든지 좋다는데 답을 모르겠으니 남을 따라하며 대충 그것을 삶의 낙으로 삼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 삶의 즐거움이란 내가 누구인가와 관련이 있고, 그걸 내가 어떻게 하는가와 관련이 있다. 내가 삼시세끼 밥을 먹는 것을 삶의 낙으로 여기는 사람이라고 해보자. 그렇다고 할 때 나는 단순히 남들처럼 밥을 먹는 사람이어서는 안된다. 밥을 먹는 것이 삶의 낙인 이유는 내가 반찬이며 밥의 맛에 민감하고 그것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한잔을 마시면서 이 물한잔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정수되고 어떤 컵에 담겨서 내 입에 들어왔나에 대해서 다 생각하기 때문에 그 물한잔이 특별한 것이다. 이런 특별함이 없이 밥먹고 물마시는 것이 삶의 낙이라고 말하는 것은 흉내에 불과하다.

 

오페라를 보면서 감동을 느끼지도 않으면서 남들이 오페라보러 가는 것을 삶의 즐거움으로 여긴다고 해서 나도 그렇게 하는 것은 자원의 낭비다. 진짜 삶의 즐거움이 되어주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통하는 말이지만 뭔가를 진짜 삶의 즐거움으로 여기려면 차분하게 자신이 정말 이걸 좋아하는지를 되돌아보면서 관심을 줘야 하고, 일단 관심사로 삼기로 했으면 그것에 적절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삶의 즐거움이 실제로 연애일테지만 일반적으로 삶의 즐거움은 우리가 뭔가와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다. 

 

그런데 세상에는 제대로된 삶의 즐거움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삶의 형식에 해당하는 의무에 대한 공포로 하루하루를 산다. 즉 내가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어떤 극단적인 비극이 생겨날거라는 공포를 자신에게 던지면서 매일매일을 의무처럼 사는 것이다. 그것이 단기적으로는 꼭 틀린 말도 아니겠지만 장기화되면 안좋은 일들이 많이 생긴다.

 

우선 그런 사람들은 매우 부지런히 시간낭비를 한다. 삶의 낙을 위해 삶의 다른 부분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의무 자체가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청소도 하고 목욕도하고 직장에서 일도 열심히 해야겠지만 그것이 뭔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의무로 존재할 때 우리는 어느 정도나 그것에 철저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삶의 즐거움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얻고 유지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다른 것들을 한다. 삶의 형식이란 말하자면 그것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녘에 먹을 것쌓아놓고 만화책보는 것이 삶의 낙이라면 그걸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만큼의 삶을 살면 된다. 그러면 지금은 그걸로 충분히 행복하며 그런 즐거움은 일상의 피곤함과 긴장을 보상해 주고 치유해 준다. 그런데 그것이 없는 사람은 대개 쓸데 없는 걱정거리와 일거리를 만들어서라도 바쁘게 살려고 한다. 돈을 어디에 쓸 생각도 없고 돈이 모으는 것이 기쁘지도 않으면서 한푼이라도 더 벌겠다고 미친듯이 일하는 사람이 된다.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다.

 

즐거움이 없고 의무만 있어서 삶이 형식으로만 채워진 사람은 스스로를 계속 협박하고 공포에 빠지게 한다. 그리고 차차 그런 협박은 강해진다. 즐거움이 없는 사람들은 대개 둔감해진다. 뭐 하나 즐거워서 하는 일이 없고 다 의무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밥한끼를 먹어도 그저 먹어야 하니까 먹는 것일 뿐이다. 즐겁지 못한 삶은 자연히 긴장도가 떨어지고 그러면 그 사람은 스스로의 게으름을 탓하면서 더욱 더 열심히 쓸데없는 걱정과 일거리에 몰두한다. 남이 하는 무의미한 말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 그런 일은 대개 결과가 좋지 않다. 걱정이 실제로 문제를 만들어 낸다. 

 

집에 있는 작은 화단을 가꾸는 것을 삶의 즐거움으로 삼자면 우리는 일단 멈춰야 한다. 자세히 살피고 그것이 어떤 일인가를 느껴야 한다. 그래서 그것이 진짜 삶의 즐거움이 되면 우리는 남에게 신경을 쓰지 않게 되고 삶에 여유를 가지게 된다. 즐거움인 부분은 즐기면 되고 즐거움이 아닌 부분은 문제가 생기지 않을 정도로만 하면 된다. 내가 이미 삶의 즐거움을 가지고 있으니 남이 뭐라고 하는 것이 중요할 리가 없다. 이건 경쟁도 아니니까 남이 화단을 두 배나 더 크게 가꾼다고 그걸 부러워할 일도 아니다. 

 

즐거움이 없는 삶은 그 안이 비어있다. 객관적으로 어떻게 보이건, 어떻게 평가되건 그건 바람직한 삶이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 세상이 아직 경험해 보지 않은 진기한 것으로 가득찬 놀이동산같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일거리만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지옥같아서 내가 빨리 죽어야지라는 말만 나온다. 즐거움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그럼에도 실천하는 사람은 적은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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