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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참선과 기도의 의미

by 격암(강국진) 2021. 12. 29.

2021.12.29

나는 참선을 배운 바 없다. 다만 내 글이 종종 그러하듯이 세상에 있는 것에 대해 이런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이것은 그에 대한 기록일 뿐이다.

 

사실 나는 참선을 배운 적은 없지만 종종 참선하듯 자세를 취하고, 그러니까 양반다리를 하고 손을 편하게 놓고 눈을 감고 있을 때가 있다. 왠지 그렇게 하면 마음이 편하고 종종 내가 그 자세가 필요하다고 여겨져서 하는 것이다. 이걸 내가 종종 참선을 한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 글의 문맥에서는 이름이야 뭐라 부르던 상관이 없다. 그러니 여기서는 이걸 구분하지 말도록 하자. 

 

그런데 도대체 참선은 왜 하는 것일까? 왜 효과가 있는 것일까? 참선을 할 때 우리는 두 가지의 극단속에 동시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기도도 마찬가지라, 참선과 기도는 이어지는 면이 있는 것같다. 그 극단의 하나는 온 세상이 나로 가득 차는 경험이다. 우리가 눈을 감고 자극이 별로 없는 곳에서 잠들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을 자세를 취하는 것은 우리의 오감을 세상으로 부터 닫아버리는 것이다. 이제 세상은 우리에게 뭘 보여주지도 뭘 들려주지도 않는다. 우리가 뭔가를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의 맥박이나 숨소리이고 우리의 생각일 뿐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아주 작고 보잘것 없는 공간이지만 우리 자신이 마치 신같은 존재가 되는 공간에 존재하게 된다. 그 공간안에 존재하는 것은 별로 없지만 그 것은 전부 우리 자신의 일부다. 그러니 거기서 일어나는 일은 전부 우리 탓이다. 우리가 생각하니 결과가 생기는 것이다. 신같은 존재가 된다고 하니 참선에 대해 과대망상증을 가지는 것이라 생각하지는 마라. 내 말은 단지 이 공간에서는 우리가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미룰 수 없다는 뜻이다. 참선의 공간안에 존재하는 것은 우리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눈을 뜨고 세상을 살 때 우리는 세상의 공격과 지원을 받아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습관적으로 이건 내 탓이지만 이거 저거는 내 탓이 아니다. 나의 의지가 저런 일을 만든게 아니다라고 말 한다. 그런데 과연 내 탓과 남 탓을 하는데 있어서 그런 구분이 흑백논리적으로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일을 제대로 하고 있을까? 우리는 오만하거나 겁에 질려서 마구 잡이로 남의 탓을 하거나 모두 내 탓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과 같은 존재라고 하지만 뒤집어 말하면 우리는 참선의 공간에서 벌거벗고 아무 것도 없는 존재가 된다. 아무 것도 없고 혼자만 있으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느끼려고 하게 된다. 멈추면 자신이 보인다. 만약 평상시의 우리가 한시도 멈추지 못하고 몸을 움직이고 떠들어대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자신의 텅 비어있음을 감추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멈추면 자신이 보이니까 끝없이 자극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참선은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보게 하고,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온전히 책임지게 한다. 그것은 때로 공포를 벗어던지는 일이고 때로는 오만을 벗어던지는 일이다. 멈춰서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도 망하지 않고 세상도 평온하다. 참선은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은 세상의 자극으로 인해 생겨난 부질없는 감정적 반발이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다. 욕심도 부끄러움도 그렇다. 벌거벗은 빈 몸이 될 때 우리는 공포에 빠질 수도 있고 편안할 수도 있다. 우리가 아무 것도 가진게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공포고 사실 애초에 아무 것도 필요없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편안함이다. 

 

그런데 참선은 또 하나의 반대편 극단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것은 내가 사라지는 경험이다. 참선이 나를 가득 채운 세상을 만드는 일이라고 말하고 그 반대의 것을 말하니 모순되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같은 것의 다른 표현이고 우리가 이해한 나라는 것이 뭔가에 달린 일이다. 축구선수는 축구를 안하면 뭐가 될 것인가? 그냥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가? 사회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은 세상에서의 위치, 세상으로부터의 자극에 의해 만들어 진다. 팔을 가지고 있어도 평생 팔을 쓰지 않았다면 우리는 자신이 팔을 가지고 있는 줄도 모를 수 있지 않을까? 이처럼 우리는 그냥 우리를 아는게 아니라 살면서, 여러가지 상황에 처하면서 자신을 발견해 간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뭘 원하는지도 그냥 아는게 아니라 우리가 발견하는 것이고 심지어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정리하지 않더라도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만들어진 그림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게 된다. 이게 바로 참선을 통해서 없어지는 나다. 누군가 세상의 공동묘지에는 나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무덤이 가득하다라는 말을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존재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떤 역할을 한다. 남편이나 아내로, 직장 상사나 공무원으로 군인으로, 지역 주민이나 한국인으로 우리는 존재한다. 

 

사실 우리는 쉽게 나라고 말하지만 그 의미는 잘 모르고 있다. 당신이 말하는 나는 혹시 당신의 몸뚱아리를 이루는 물질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물질은 당신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당신은 그 물질을 자동차나 집처럼 소유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바닷물과 파도의 관계를 자주 말한다. 우리는 물을 따라 퍼져나가는 파도지 물이 아니다. 생명은 현상이지 물질이 아니다. 우리는 굳이 말하자면 의식에 가깝다. 

 

우린 온갖 사회적 경험적 이유로 만들어진 자아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자아상은 사실 정확하지 않다. 어쩌면 매우 틀려있을 수 있다. 당신은 망치처럼 휘둘러지고 있는 조각상일 수 있다. 스스로가 망치로 사용된다는 사실 때문에 혹은 자기가 못을 잘 박는다는 사실 때문에 자기가 망치인 줄 알 뿐이다. 그런데 세상으로부터 눈을 감을 때, 어쩌면 진정한 자기를 보려고 할 때 이 자아상은 흐려지고 약해진다. 어찌보면 사라진다. 당신이 박사거나 교수거나 부자거나 잘생기거나 운동을 잘한다는 사실도 같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 거짓된 자아상이 사라질 때 우리는 조금 더 편견없는 상태, 조금 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알고보면 당신은 온통 허무한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있을 수 있다. 산에 오르고자 길을 나섰는데 지금 놀이터에서 놀고만 있는 것일 수 있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게 당신이 맞는가? 

 

눈을 감았을 때와 뜨고 있을 때 우리는 같은 사람일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거리가 지나치게 멀어져서는 안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이따금 멈추고 눈을 감아야 한다. 이게 내가 이따금 참선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이유다. 어쩌면 참선이란 애초에 이런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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