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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변명과 설명의 차이

by 격암(강국진) 2021. 12. 28.

2021.12.11

어제는 1999년에 있었던 씨랜드참사에 대한 이야기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다시 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한가지 질문에 빠져든다. 시스템은 뭐하러 있는 것일까? 변명과 설명의 차이는 무엇인가? 미리 말해두지만 씨랜드 참사같은 사건의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건에는 국민들의 마음을 만족시킬 진실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당시의 시스템은 진실을 덮고만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시스템의 본질적 특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즉 시스템은 언제나 설명을 하고 진실을 찾기 보다는 변명을 하기 위해 존재한다. 문제는 그 시스템의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고 그 시스템의 관행을 만드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일 뿐이다.

 

씨랜드 참사를 둘러싼 의혹은 여러가지가 있다. 한 방에 있던 유치원 아이들이 모두 타죽은 이 사건에서 아직도 그날의 유치원 선생님들이 그날밤 어디에 있었는가를 모른다. 화제는 밤 1시 20분에 일어났는데 같은 방에서 자고 있었어야 할 선생님이 그 방에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아예 같은 건물에도 없었을 것같이 보인다. 최소 같은 건물에 있었다면 화제가 있다는데 자기 반 아이들을 데리러 가지 않았겠는가? 겨우 3층건물인데? 그날 화제로 죽은 사람은 사람들을 구하려다가 죽은 것같은 4명의 성인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301호에 있었던 유치원 학생들이었다. 그 방에서 18명이나 죽었다. 2층에서 한명의 아이가 죽었고 500명이나 있었던 다른 아이들은 대부분 바깥으로 대피했었다. 그때 선생님은 어디에 있었는가? 302호에 있던 아이들도 우연히 있던 다른 태권도장관장이 구한 것이라고 한다. 그가 없었다면 302호 아이들도 다 죽지 않을까? 문제의 유치원 선생님은 살아남아 재판을 받았다. 그런데도 진실은 들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또 있다. 아이들을 받았던 씨랜드 수련원의 건물이 화제나기 딱 좋은 건물이었다는 것이다. 전기시설은 무면허기사가 하고, 컨테이너를 쌓아올리고 스티로폴로 대충 단열을 한 가건물이었는데다가 화제경보기는 꺼놓고 소화기는 다 고장이었다. 그런 가건물을 짓고 가짜 설계도를 관공서에 제출했는데도 그 수련원이 허가를 받고 영업을 한 것은 관공서의 윗 사람이 압력을 행사한 탓이라는 양심고백도 있었다. 불이 나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는 건물, 소방차가 들어올 수도 없는 위치에 존재하는 수련원이 영업을 하게 된 배후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다.

 

그런데 시스템은 계속 변명을 늘어놓는다. 불은 건물이 잘못되어서 생긴 것이 아니라 모기향때문이었다. 이건 그냥 사고다. 공무원들은 다 제자리에서 할 일을 했다. 이런 변명은 누군가에게는 설명일 것이다. 그 바닥에서 해줄만한 일이었는데 재수가 없어서 일이 생긴 것일뿐 그거 별거 아니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화제가 날지 모르고 한 짓이었고, 건물주도 몰랐고, 담당관청도 몰랐다고 할 것이다.

 

이때는 1999년으로 한국이 지금에 비하면 말할 수 없이 부패했던 때였다. 군사독재가 끝나고 김영삼 보수 문민정권이 들어섰지만 IMF가 터진 것이 불과 2년전 사건이었다. 사실 밀양에서 고교생들이 여중생을 집단 강간한 사건이 터졌는데 지역유지와 경찰들이 그걸 덮으려고 했던 것이 2004년의 일이었다. 2021년인 지금도 우리는 재벌가문의 갑질같은 이야기를 듣고 권력에 따라 수사가 춤을 추는 것같은 일을 본다. 하지만 20세기에는 아예 그런 일에 분노도 할 수 없었다. 더 대단한 일들이 넘쳐나는 시대여서 그런 갑질이나 편법은 그냥 관행이고 상식이었던 시대였다.

 

어떤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말할지 모르나 나는 그건 과장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굉장히 깨끗해졌다. 세월호 사건이 국민적 충격을 주었던 것은 시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에서는 국민들이 뻔히 배가 가라앉는 것을 보는 가운데 아이들이 죽게 되었다. 유튜브도 없던 20세기에 같은 일이 있었으면 언론과 경찰과 공무원들은 훨씬 더 사건을 은폐하기 쉬웠을 것이다.

 

어떤 한 사람이 갑자기 이유없이 미쳐서 살인 사건을 저질렀다고 하자. 이 사건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납득하기 쉬운 설명을 만들기는 쉽다. 그 미친 살인마가 잘못이고 이 점에 대해 사람들이 은폐를 시도하고 변명을 시도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씨랜드사건같은 것은 진실찾기가 너무 어렵다. 수없는 사람들이 그 사건에 조금씩 연루가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조금씩의 일들은 사실 하나씩 떼어내 보면 사람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쉽다. 많은 것은 그저 관행이고 그저 아주 작고 상식적인 눈감음이다. 유치원생들을 1시 20분에 혼자 자게 내버려둔 선생님이나 싸구려 가건물을 짓고 로비를 해서 영업을 한 수련원장이야 그렇다고 치자. 사실 그 건물을 둘러본 사람들은 하나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왜 유치원생들이 그런 열악한 곳에 가서 자야했을까? 유치원장은 조금 더 이익을 남기고 싶어했을지 모른다. 아니면 조금 더 싸게 그런 행사를 치뤄야 유치원 학부모들로부터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전답사를 하면서 건물이 허술하고, 소화기도 고장났다는 사실을 눈치챈 어른들도 많았을 테지만 그들은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별일 있겠어하고 말이다. 허가를 내준 관공서직원도 별일이 있겠어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별일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원인으로 집어넣지 않는 설명을 만들려고 한다. 나 하나쯤 그 설명에서 빠진다고 그 설명이 엉터리 변명이 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말해 준다. 사실 그들도 어느 정도 같은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변명은 자꾸 누적된다. 그래서 사람이 죽었는데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상황이 만들어 진다. 이렇게 해서 시스템의 설명은 변명이 되어버리는 것이고 진실찾기는 거의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니까 인간이 만드는 시스템은 어차피 변명만 만들게 되어 있다. 다만 어디까지 만족시킬 변명인가가 문제다. 독재자 한명만 만족시키는가 아니면 국민전체인가, 만족을 시킨다면 얼마나 시키는가가 문제다. 사실 한국도 선진국중의 하나가 되었고 비만이 사회문제가 된 나라다. 그런데 세상에는 약이 없어서 죽고 굶어서 죽고 마실 물이 없어서 죽는 아이들이 넘쳐나고, 선진국이 뿌려대는 쓰레기며 매연이 지구를 죽이고 있다. 그걸 우리는 알지만 변명을 만들어 낸다. 매연으로 한국인이 한국인을 죽이면 좀 더 좋은 진실을 찾겟지만 매연으로 한국인이 이름없는 가난한 아이를 죽이는 것에는 좀 더 변명에 가까운 것을 찾는다. 플라스틱때문에 죽는 동물의 문제야 말할 것도 없다.

 

세상은 완벽하지 않다는 것,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위기의 갈림길에 선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누구나 더럽고, 어디나 변명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 현실이므로 깨끗한 척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위선자들이고 술수를 부리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완전히 잊어버린다. 이것은 때로 절망의 결과다. 깨끗하고 아니고를 흑백으로 볼 정도로 머리가 나쁜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전부 이기적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는 그 사실이 자기에게 무제한의 면죄부를 준다고 생각한다. 부끄러움이 없어진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비록 지금도 미래에도 사람과 사회는 완벽해 질 수 없겠지만 내가 이거 인정하고 양보한다고 세상이 안바뀌겠지만 그래도 요정도는 더 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여전히 우리가 가진 것은 변명이지만 그래도 손톱만큼은 더 견딜만한 변명을 만들려고 한다. 이래봐야 소용없다고 해도 부끄러워서 물러날 수가 없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언제나 변명뒤에 숨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는 세상에는 제대로된 설명이란게 없다. 언제나 누군가는 무언가는 망각되고 무시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변명과 설명의 차이가 있다. 비인간적으로 대단한 희생을 하면서 설명을 만들지는 못해도 인간적으로 정말 노력하고 인정해서 만든 것은 설명이라고 불러줄만 하다. 부끄러움을 잊지 않았다면 인정해 줄만하다. 어차피 완벽하지 못하기는 모두가 마찬가지다. 반면에 모두가 썩었는데 왜 나만 아니겠냐면서 남탓에만 매몰되어 전혀 노력하지 않고 만들어 낸 설명, 부끄러움을 잊은 설명은 변명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씨랜드 사건에서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해 거짓말을 하던 유치원선생님은 여전히 소식이 없다. 그런데 정작 씨랜드 화재를 처음 발견하고 신고하고 아이들을 대피시킨 관장님은 아직도 죄책감에 시달린다고 한다. 그는 302호의 아이들을 구했지만 301호의 아이들은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상황은 정전에다가 연기로 가득 차있었고 그들은 불러도 대답도 없던 아이들이었으며 그가 인솔자도 아니고 그냥 우연히 현장에 있었던 사람인데도 그렇다. 창피한 걸 모르는 어른들은 지금도 변명들을 만들고 있다. 창피한 걸 아는 어른들은 그정도면 할만큼 했다고, 오히려 영웅이라고 남들은 말하는데도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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