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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인생의 맛

by 격암(강국진) 2022. 1. 8.

2022.1.8

나는 때로 아침일찍 거리에 나설 때면, 특히 입김이 허옇게 보이는 추운 겨울날 그렇게 할 때면 세상이 참 아름답다고 느낀다. 대개 그런 날은 거리에는 별로 사람이 없다. 그리고 햇살이라도 비치기 시작하면 코와 귀가 짱짱하게 느껴질 때도 나무며 간판이며 지나가는 자동차들 조차도 참으로 아름답다고 느끼며 그 순간에는 더이상 아무런 것도 필요없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전보다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도 사라지고, 이제부터는 어디로 가야할까 하는 생각이나, 아내의 걱정, 돈문제에 대한 고민따위도 사라지고 만다. 그냥 나는 멋진 풍경속에 있을 뿐이다. 비록 그 광경이 사진을 찍어 잡지에 실릴 그런 광경은 아니지만 나는 그래서 그 모습이 더 마음에 든다. 고고한 풍경은 물론 아름답고 우리를 압도하지만 그곳은 내가 살아갈 장소는 아니다. 게다가 많이 보면 질린다. 그런 풍경도 필요하고 아름답지만 인생의 진짜 맛은 만두를 찌는 솥에서 허옇게 김이 나오는 것을 보는 것에 더 많이 있다. 내일도 보고 내년에도 봐도 질리지 않을 풍경이다. 

 

나는 문득 아내에게 혹은 아이들에게 이걸 보여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다시금 생각해 보니 그건 부질없는 일이다. 가족도 서로 같지가 않아서 그들도 내가 보고 즐거워하는 것을 전부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아이들은 이런 걸 보여줘 봐야. 춥기만 한데 아빠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면서 빨리 들어가자고 할터이고 아내조차도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아쉬운 일이다. 인생의 맛을 모르는 것이 아닌가? 그걸 모르고 바쁘게 움직여 봐야  헛일이 아닐까? 

 

사람들은 종종 나이가 들면서 헛된 것에 집착하고 매이게 된다. 남이 가지지 못한 자동차나 집을 가진다거나 명예를 얻는 일에 빠지고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껍질에 빠져서 거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스스로 뒤집어 쓴 의무들에 갇히기도 한다. 껍질이니 아니니 하는 것이 정해진 것은 아니다. 포르쉐를 타고 즐기는 일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도 우리는 그것을 즐길 것인가? 그게 아니라 그저 남에게 보여주는 일에서 즐거움이 나오는 거 아닌가? 일을 하고 돈을 버는 일에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부자인 것을 자랑하고 싶은 것이 핵심이 아닌가? 뭐가 좋은 집인지, 뭐가 좋은 차인지, 뭐가 좋은 옷인지에 대해서는 사실 하나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

 

남에게 자랑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기는 하다. 남에게 인정받는 기쁨은 아주 크다. 하지만 불안한 일이다. 예전에는 미인의 기준이 지금과 달랐다고 한다. 뚱뚱한게 미덕일 때도 있었고 기괴하게 마른 것이 매력적일 때도 있었다. 수렵채집을 하는 부족에서 일등신랑감으로 여기는 사람과 서울에서 그렇게 여기는 사람이 같을 리가 없다. 남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이렇게 크게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바뀌는 것이고 자세히 보면 그냥 변덕에 따라서 바뀐다. 그래서 부모나 배우자에게 인정받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평생 괴로움을 겪는 일이 있다. 그들의 기준은 일관성이 없고 지금 없는 것만 찾는데도 그걸 충족시키겠다면서 인생을 허비하게 되는 것이다. 

 

아직 세상에 대해서 잘 모르는 아이들은 그래서 오히려 인생에 맛에 대해 어른보다 더 잘 아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어른들은 이리저리 눈치를 보는데 비해 그들은 좋으면 좋다, 나쁘면 나쁘다라고 표현하며 자신의 느낌에 더 충실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흔한 조개껍데기의 모습에 감탄하는 아이들을 보며 그들의 순진함을 비웃고 비싼 어떤 뭔가를 소중하게 여기지만 정작 교육때문에 인생의 맛을 모르게 된 것은 어른들이 아닐까?

 

사실 요즘 아이들은 유치원생이 하는 말을 들어봐도 이미 자본주의에 잔뜩 물든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그걸 똘똘하다고 칭찬을 하는 어른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과연 그럴까? 외부세계는 바뀐다. 지나치게 빨리 세상에 적응했는데 그 세계가 바뀌고 나면 오히려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이다. 인생의 맛을 모르니 힘들고 비싼 것만 찾을 것이다.

 

소확행,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말이 유행한 것도 오래다. 이는 사람들이 잃어버린 인생의 맛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는게 지루하다는 말과 사는게 너무 바쁘다는 말을 동시에 한다. 돌아보면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한 것도 없고, 기억도 별로 나는 것도 없이 한달이 가고 한 해가 가고 있는 것같다. 그러니 인생이 지루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뭔가 짜릿한 자극이 있는 일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극적인 일을 찾지만 종종 그런 탐색은 벽에 부딪히고 만다. 시간이 없어서 혹은 돈이 없어서 혹은 체력이 없어서 혹은 다른 무언가가 없어서 더이상 그런 걸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할 일은 사실 많다. 공부와 경쟁은 끝이 없다. 그러니 인생은 지루하면서 동시에 너무 바쁘다. 

 

문제는 우리가 인생의 맛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에 있을 수 있다. 우리가 더 빨리 달리지 못한 것에 있는 게 아니라 멈추지 못한 것에 있을 수 있다. 멈추면 이 숲과 저 숲이 전혀 다르게 보일 수도 있는데 달리면서 보느라 숲은 다 숲이니 가봐야 다 똑같을거라고 생각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더 대단한 숲을 찾겠다고 더 빨리 달리면 달릴 수록 모든 게 다 똑같아 보이니 인생이 더욱 더 지루할 수밖에 없다. 이는 옳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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