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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나를 지킨다는 말에 대한 오해

by 격암(강국진) 2022. 1. 26.

2022.1.16

오늘날의 시대가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은 변화의 속력일 것이다. 세상은 인류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더 복잡한 곳으로 변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불가능에 가까운 가혹한 요구를 받는다. 일단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어떤 구석에서 정신없이 바쁘게 살게 만든다. 대개의 경우 학생은 학생이라서 바쁘고 부모는 부모라서 바쁘며, 직장인은 직장인이라서 바쁘다. 바쁘다는 건 고개를 쳐들고 세상을 볼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어느새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지극히 작은 구멍 중의 하나에 처박혀서 자기 합리화와 자기 방어를 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내 삶을 사느라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가 없고, 복잡한 세상에서 사람은 어차피 다 입장이 다른 것이니 어떤 보편성을 추구할 생각도 줄어든다. 세상에 넘쳐나는게 핑게다. 우리는 자기 방어 논리를 배워서 그냥 내 맘대로 살면서 타인에게는 무지하게 된다.

 

자기를 지켜라, 네 맘대로 살아라같은 메세지는 요즘 세상에 넘쳐난다. 이 메세지 자체는 틀린 것이 없지만 여기는 한가지 전제조건이 붙는다. 그건 게을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주변을 살피고, 세상을 살피며, 지금의 자기를 초극하려고 하는 노력이 중단된 상태에서 내 맘대로 살겠다던가, 자기를 지킨다는 말은 스스로를 해치고 남을 해치는 불량아의 변명이 되고 만다. 예를 들어 사회속에서 나와 타인은 연결되어져 있다. 누군가가 자기 돈 100원을 위해 사회가 천억을 쓰게 만든다면 사회적 공분을 살 것이다. 그런데 애초에 세상과 타인에게 관심이 없어서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관심이 없고 나는 그냥 내돈 100원을 지켰을 뿐이라고 말하면 같은 일을 하게 된다. 내 소신대로 산다는 말이 타인에 대한 무지여서는 안되는데 현실적으로는 흔히 그렇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관심없어 나는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 뿐이야' 이런 말이 되고 마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무지와 지금의 자기에게 맹종하는 태도는 일반적으로 문제지만 요즘 시대에는 더 큰 문제다. 시대의 변화에 떠밀려 가는 사람과 시대의 변화를 선도해 가는 사람의 차이는 사회적 양극화를 만든다. 그래서 비만환자가 넘쳐나는 시대는 동시에 엄청난 근육을 자랑하는 사람들의 시대이기도 하고, 가난이 넘쳐나는 시대는 동시에 부가 넘쳐나는 시대이기도 하며, 가장 진보적인 발전의 시대는 가장 퇴행적인 사람들의 시대이기도 하다. 빠르게 변한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인 시대에 자꾸 작은 구멍속으로 들어가면 그 결과가 없을까?

 

우리시대에도 사람들은 그 어렵다는 거시적 시야를 요구 받는다. 예를 들어 시민들은 대선투표같은 일을 해야 한다. 나는 투표란 나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에게 표를 주는 것이라는 말을 상식처럼 하던 사람을 기억한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한 이 말은 사실상 표는 돈받고 파는게 당연하다는 말이나 똑같다. 그런 사회가 망하지 않을까? 투표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그리고 의미적으로도 넓은 시야를 가지고 하는 것이다. 정치란 여러 사람의 협동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나만 잘살겠다는 생각으로 하면 결국 모두가 죽는 게임이 된다. 게임의 법칙을 정하는데 모두가 자기에게 유리한대로 그걸 뒤흔다면 그 결과가 어떨까? 인간은 이기적인 선택을 한다는 말을 당연한 진리처럼 여기면 집단으로서의 인간은 협력이 불가능하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빼앗는 것밖에 없다는 결론이 자동도출되어 모두가 죽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그렇게 짐승같았다면 지금의 번영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들도 다 자기 구멍속에서 너무 오래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들리는 것이다. 가장 영리해 보이는 것같은 잔꾀는 사실 한발만 뒤로 물러서 보면 어리석은 이야기일 뿐이다. 

 

정치만 그런게 아니다. 경제며, 예술이며, 학문이며 세상은 10년이면 몰라볼 정도로 바뀌는데 내 구멍만 신경쓰고 살다보면 뒤통수를 맞게 되기 쉽다. 이게 현대사회를 살기 힘든 점이다. 초중고 졸업하고 대학입시에도 바쁜데 그 10년 20년동안 대학졸업장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세상으로 바뀐다면 고생한 건 어디에 가서 보상받을 수가 있을 것인가. 

 

물론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힘듬은 모든 사람에게 같지 않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대로 양극화가 일어난다. 시대에 떠밀려 가는 사람들은 점점 더 작은 구멍속으로 빠져든다. 과거의 100년이 지금의 10년이라면 이 말은 요즘 사람들은 종종 마치 조선 말엽에 농사짓던 사람처럼 되어간다는 뜻이다. 자본주의가 뭔지도 모르고 외국도 모르고 그저 하던 대로 농사만 짓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곳에서 한 세대가 지나고 나자 땅투기로 부자된 사람, 공장으로 부자된 사람이 나오고, 공부해서 출세한 사람이 나오는가 하면 그저 하던대로 농사만 짓다가 농지도 집도 이것저것 다 빼앗기고 내쫒긴 사람들도 생겼다. 과거에는 이런 일이 몇십년에 걸쳐서 있었지만 요즘은 그보다 몇배나 빨리 일이 진행되는 것같다. 이미 같은 직장에 10년 다니는 사람들이 드물다고 하지 않는가. 몇몇 청년들은 주식이며 NFT며 암호화폐며 메타버스 투자에 빠져들고 있다. 

 

나는 한시도 쉬지 않고 일을 했으니 게으르지 않았다는 말은 꼭 사실이 아니다. 나는 따분해 보이는 입시공부도 열심히만 하면 얻는게 많다고 믿는다. 그러니 세상은 안보고 입시공부만 열심히 한 것도 열심히 산 건 맞다. 직장일에 바쁘거나 농사나 장사일에 바쁘거나 가사에 바쁜 것도 다 게으르게 살지 않은 것이라는 말도 일 리가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게으르게 살았다는 말도 사실이다.

 

참으로 진부한 질문이 되어버렸지만 우리는 얼마나 자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것에 관해 생각해 보는가. 이런건 너무 어렵고 막연한 질문이라 우리는 곧잘 서둘러 머리속에서 지워버리고 다시 우리의 일상으로 눈을 돌린다. 하지만 그 순간 우리는 더 작은 구멍속으로 빠져들어갈 수 있다. 사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어느 정도 지금까지의 자기를 초극하라는 질문이다. 한국인이 아닌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데 한국인이 누구인지를 말할 수는 없다. 내가 누구인지를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의 경계를 벗어나서 우리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 오른쪽과 왼쪽의 두 개의 길이 있는데 나는 왼쪽을 선택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려면 애초에 세상에는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자기 자신은 보이지 않는다. 뭔가를 선택해 놓고도 자신은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모든 것이 원래 그런 것이고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런 질문은 너무 어렵고 온갖 선입견으로 덧칠이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곧잘 회피한다. 자기를 들여다 보지 않고 자기와 대화를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어디서 온지도 모르는 감정에 휘둘리면서 나는 내 맘대로 살거라고 말하고, 나는 틀린게 아니라 남과 다를 뿐이라고 말한다. 너의 그 마음이란 어디서 온 것인지 최소한의 확인은 해보고 하는 말인가? 광고에 속아 쇼핑중독자가 된 사람이 이게 내 마음이라고 할 때의 그런 마음은 혹시 아닌가? 

 

자기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매우 훌룡한 것이다. 어떤 한분야에서 정말 열심히 한 경험이 없이는 얻을 수 없는게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렇지만 동시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사실은 가장 치열하게 사는 것일 수도 있다. 특수하게 바쁜 것과 보편적으로 바쁜 것, 특수하게 게으른 것과 보편적으로 게으른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반대로 보인다. 어쨌건 자기를 지키고 자기 맘대로 산다는 것은 게으른 사람이 할 소리가 아니다. 자칫하면 도박중독자가 나 좀 내버려두라는 말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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