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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아버지의 죽음

by 격암(강국진) 2022. 7. 18.

2022년 7월 13일 장인어른이신 김유동옹께서 돌아가셨다. 친아버님이 수년전 돌아가셨으니 이제 나는 두 분의 아버님을 모두 잃은 셈이다. 4일장을 치르고 화장터에서 아버님의 수골을 기다리며 아버님의 삶과 죽음을 생각해 본다. 

아버님은 일제시대인 1934년에 태어나신 이래 부산 반여동에서 자라고 나이 드시고 89세가 되도록 사신 분으로 알고 있다. 아버님이 어떤 분인가 이제와 생각해 보면 아버님은 평생 여러 일들을 하셨지만 결국 아버지였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을 졸업하신 후 전화국에서 일하거나 대리점 사업을 하고, 금속공장을 운영하시기도 하셨지만 그 일들은 그다지 길게 가지못했거나 아버님의 삶에서 중심을 차지하게 되지는 못한 느낌이다. 아버님은 이따금 LG집안과의 인연을 말하시고는 했고 그 딸인 아내는 내게 아버님이 일찌기 금속공장을 하다가 노조 문제가 커지자 공장을 접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으나 그 내용은 길지 않았고 자세히는 모른다. 다만 아버님의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후일 사업에 크게 성공했고 그 이후에도 아버님과의 좋은 관계를 이어나갔다는 것, 동네의 어려운 사람들을 두루 많이 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실제로 집안에 감사패 따위가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본 적도 있다. 내가 그 세번째 딸인 아내와 결혼한 것은 1997년의 일로 아버님은 이미 상가임대를 하면서 노년을 보내기 시작한 이후였다. 그런 나에게 아버님은 유복한 동네유지처럼 보이는 분이었다. 문중이나 그 동네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사람들이 와서 상의하는 동네어른 같은 존재말이다. 

이런 아버님은 뭘 갈망하고 중요하게 생각했을까? 89세가 되도록 사시는 아버님에게는 100세가 넘는 누님이 계시기도 하다. 그래서 아버님에게 이 집안은 장수집안이라고 감탄한 말씀을 드리자 아버님은 아니라고 말하시면서 정작 당신의 아버님은 일찍 요절했다고 말씀 하셨다. 그러니까 20대에 가문의 장자로 가족을 돌보기 시작한 이래 아버님은 60년을 그렇게 사신 셈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것이 아버님 삶의 몸통이 되었다. 즉 어린 동생을 돌보고 자식을 낳아 대를 이으며 가문을 이어지게 하는 것이 아버님의 삶이었던 셈이다. 그러고 보면 아버님은 물려받은 재산을 잘 간수하여 물려줘야 한다거나 집안이 화목해야 한다는 것을 틈틈이 말씀하시고는 했다. 

사람은 자신이 가지지 못했던 것을 자식에게 주려고 하기 마련이다. 20대에 가장이 되신 아버님이 가장 가지지 못했던 것은 오래 사는 아버지가 든든한 뒷배로 버텨주시는 것이었을 것이다.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하신 말씀을 들으면 아버님은 관리를 열심히 하셨을 뿐 타고난 건강체질은 아니어서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것을 잃고 버티며 사셨다는 인상을 받는다. 40대에 이미 척추협착으로 걸음이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한 것이 한 예고 위암수술에도 살아남으신 것이 또 다른 예다. 아버님은 신경증도 계셔서 수면제 처방을 10년째 받으며 우울증과도 싸워오셨다. 그리고 그렇게 오래 살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자기에게 해주지 못했던 일을 늦게 얻은 막내 아들, 무려 6명의 딸이 태어나고 나서 얻은 막내 아들에게 해주려고 노력하셨다. 바로 기다려주고 인맥을 만들어 주고 부담은 나중에 질 수 있도록 재촉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대를 잇기 위해 이렇게 많은 자식을 낳은 일은 여러 모로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일찍 가장이 되고 사업도 하시고 동네의 대소사에 관여하며 살아오신 아버님의 장례식은 유달리 화려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무려 6녀 1남을 두시고 사셨기 때문이다. 사람이 많으니 장례가 화려해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아버님은 직장에서도 장사나 사업에서도 끝까지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사람은 잃지 않은 느낌이다. 즉 아버님은 인간관계를 매우 중요시하며 살아오신 분이었고 그것은 그분이 아주 뛰어난 기억력으로 사람들의 여러 일들을 잘 기억하는 것에서도 나타나고는 했다. 

나는 아버님과는 다른 사람이다. 그래서 감히 그 삶의 성패를 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버님이 즐겁게 사시다 가셨는지 그것이 외롭고 견디는 삶이었는지 확실히 말할 수없다. 그러나 가지많은 나무가 편하기만 할 리가 없다. 자식이 7명이어도 아무런 부담이 되지 않는 삶도 없다. 나는 적어도 그 삶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참으며 본인의 삶을 완성하려 노력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평생 고향인 부산을 지키며 일곱아이들을 결혼시키고 대를 이어줄 똘똘한 손자를 보는 것을 인생의 즐거움으로 아셨던 아버님은 나이만큼이나 옛 가치에따라 사신 분이다. 그리고 그걸 다 이루시고 돌아가셨다. 

아버님은 공평하셨지만 엄격하신 분이었다. 고집도 대단하셨다. 예를 들어 의사같은 전문가가 뭐라고 한들 쉽게 승복하는 스타일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분은 아니셨다. 그것은 어느정도 집안의 질서를 지키는 기둥으로 사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본인의 삶의 틀을 깨기는 힘든 분이셨다. 그러나 일관성있는 삶을 90년가까이 사셨다는 것만으로도 아버님의 삶은 의미가 있다. 

돌아가시기 두주쯤 전에 아버님은 갑자기 폐병으로 호흡곤란증상이 생기셔서 병원에 입원을 했고 나는 한주간 병간호를 했다. 아버님 사위가 된지는 사반세기가 되지만 이때 아버님과 나는 가장 많은 말을 나눴다. 이때야 이르러 나는 아버님과 진짜 부정에 가까운 것을 나눴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이렇게 돌아가시고 나니 그 마지막 정이 감사하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하다. 그 한주간 여러번 안아드렸지만 몇번 더 그랬으면 좋았을거라거는 생각도 들고 친해지자 서둘러 가버리시니 야속하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아버님은 이제 여한이 없다고 병원에서 자주 말씀하셨으나 나의 두 아버지는 모두 나에게 어느 정도의 죄책감을 남기셨다.
 
이제 그 삶을 완성하신 아버님. 남겨진 사람들은 이제 스스로 잘 살아갈 겁니다. 가장의 굴레를 벗고 편안히 쉬시기 바랍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사위 강국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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