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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나를 지키기, 생활을 지키기

by 격암(강국진) 2022. 7. 17.

22.7.17

얼마전에 한주간 돌아가신 아버님 병간호를 할 일이 있었다. 병실에서 한주간 바쁘게 병간호를 해보니 새삼 '생각하는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 다시 마음에 와 닿았다. 이 말은 내가 좋아 하는 말인데 출처는 잘 모르겠다. 책과 노트북을 가져가서 바쁜 가운데에서도 물리학 강의 동영상을 녹음하고 편집하는 일을 했던 첫 날은 굉장히 좋은 날이었다. 하지만 환자의 병세가 너무 급해지고 용변을 가릴 수 없어지자 몇일 후 병세가 나쁠 때에는 실질적으로 밤을 샌 것과도 같은 날도 있었기 때문에 곧 나의 하루 하루는 꾸벅 꾸벅 조는 시간과 환자를 돌보는 것으로 거의 다가 채워져 버렸다. 

 

그러나 이렇게 몸이 바쁜 것은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봐야 한 주였고 피로는 누적되었겠지만 그보다 더한 강도라도 그 두배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하고자 하고 해야 한다면 한달이고 두달이고 했을 것이다. 문제는 정신이었다. 종교인들이 매주마다 절이나 교회에 가서 같은 말을 듣듯이 매일 매일 내 정신과 몸을 돌보는 일을 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일을 할 때 나의 정신은 점점 더 그 일에 익숙해 져만 갈 것이 분명했다. 졸리고 피곤한 것을 대처하느라 생각은 단순해지고 글을 쓰거나 읽는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생활이 길어지면 영영 그렇게 할 수 있는 버릇이 없어져 버릴 것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도 쓸 것이 없고 책을 들어도 흥미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세상 뉴스를 들어도 아무런 의견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내 생활을 지키고 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도 없어지고 그저 짐승처럼 반응하고 원초적인 것만을 바라보며 살게 될 것이다. 이거야 말로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는 일의 좋은 예다. 

 

다행히 그 일은 한주만에 끝나고 나는 간병에서 벗어났지만 그 일 이후 나와 세상 사람들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전문간병인이나 간호사는 오히려 나처럼 24시간 일을 하지 않고 대개 교체로 일을 하거나 강도가 약한 간호를 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보다 힘들거나 비슷한 일을 끝없이 하는 분들이 많이 계시다. 단순 노무직을 하시는 분들도 그렇겠지만 의사나 간호사가 트레이님을 할 때도 정신이 없을 것이고, 입시공부에 바쁜 학생들도 어떤 의미로 힘들지만 단순한 삶을 산다. 군대에서 군복무를 하는 사람들도 그렇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단순히 몸이 바쁘고 힘이 든다는 것이 핵심은 아니다. 반대로 일이 없이 외롭게 지내는 것도 같은 효과를 만든다. 그리고 나는 뭔가에 빠져서 열심히 하는 것을 꼭 나쁜 것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입시공부를 열심히 하거나 유격훈련같은 것을 미친 듯이 하는 것도 다 나름대로 뭔가를 남길 수도 있다. 세상일을 잊고 한권의 수리물리학 책 문제를 처음부터 끝까지 푸는 것은 우리를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하지만 힘들고 강한 훈련들은 마치 강한 약과 같아서 제대로 쓰고 제 때에 쓰지 않으면 독이 될 뿐이다. 꼭 필요할 때 결심해서 쓰는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아무 때나 그렇게 한다면 그것들이 우리의 정신을 성장시키기는 커녕 파괴하고 불균형하게 만드는 일이 더 많을 것이다. 창조는 파괴를 동반한다지만 무차별적인 파괴가 걸작인 예술을 만들어 내는 확률은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다고 할 때 우리가 우리의 삶을 하루 하루의 훈련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자신의 둔감함이나 무심함을 대범함으로 착각하고, 자신의 상식을 과신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파묻혀 지내고 있지는 않은가? 자신이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남들이 음식에 대해 쓸데 없이 까다롭게 군다거나 허세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어떤 의미로 우리는 모두 자신의 세계에 파묻혀 지내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어떤 사람들은 자기를 지키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탐색하며 지내지만 어떤 사람들은 끝없이 자신을 단순한 짐승처럼 만들어가고 있다. 

 

자신만 그러한가? 그런 사람들은 흔히 주변사람들도 옭아맨다. 회사에서 친인척간에 여러가지 일들에 간섭하고 강요하면서 모두의 삶을 똑같이 만드는데 최선을 다한다. 원래나 본래같은 말을 유달리 많이 쓰는 그들은 온갖 일에 관습을 들이댄다. 회사원은 본래 이렇고 여자는 본래 이렇고 가족은 본래 이렇고 학생은 본래 이렇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상에 따르면 세상 사람들에는 모두 자기의 가치와 위치가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빠르게 직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이 사람은 성공한 것이고 저 사람은 행복한 것이며 이 분은 대단한 것이다. 물론 그 말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옳은 것이지만 다른 의미로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장기를 잘두는 것이 대단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장기고수는 대단해 보일 것이며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겠지만 인생의 목표는 장기와는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장기에 인생을 바치는 일은 시간낭비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일찌기 위당 정인보는 1933년에 발표한 양명학 연론에서 조선은 유학을 해서가 문제가 아니라 주자학을 해서 망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주자학은 세상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강조해서 온갖 옳은 예의범절에만 몰두하기 때문이다. 즉 삶의 객관적 형식에만 몰두한다. 반면에 양명학은 양지는 내 안에 있다고 해서 나의 느낌, 나의 질서를 강조하니 그것이 비록 성인의 것이라고 해도 남의 말에 몰두하기 보다는 내 삶에 집중하도록 한다고 한다. 그런데 애국자를 만드는 이 양명학을 하는게 아니라 매국노만 만드는 주자학에 조선은 몰두했다는 것이다.

 

한국에는 지금도 이 주자학자가 넘쳐난다. 결혼식이건 장례식이건 그것을 하는 사람들의 경건한 마음가짐이나 분위기를 따지지 않고 관련된 문구며, 무덤의 형식이며, 제사상의 내용물을 지나치게 따져서 그것이 오히려 상황을 웃기게 만들고 단합을 깨는 일이 있어도 개의치 않고 전혀 양보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 일은 경조사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정과 직장에서도 알게 모르게 일어나고 있다. 자기가 없고 형식만 넘치는데 사실 그들의 언행은 한걸음 물러서 보면 맛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식사예절이나 요리사의 태도같은 것에 몰두하며 식사시간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사람들을 상처주고 상처받게 만들어 울고 분노하게 만드니 무엇을 위한 형식인가? 

 

세상이 변하면 어떤 형식은 더이상 의미가 없다. 은행같은 것이 없던 조선시대에 계를 하는 것은 좋은 일이겠지만 21세기에 사적인 계를 하는 것은 대형사고의 위험이 있다. 귀족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 사실 귀족들의 생활의 대부분은 사교에 관련되었다. 즉 토지와 권력을 장악한 귀족들이 서로 화합만 하면 세상은 노예같은 평민들에 의해 저절로 돌아가는 것이기에 귀족들은 혼인이나 사교에 몰두하며 신뢰를 유지하는 일에 몰두했고 그결과 귀족들 상당수가 아는 것이라고는 잡담하고 낭비하는 일 밖에 없었던 것이다. 21세기에도 삶의 이런 면이 반드시 없어지지는 않는다. 재벌가문 자식들은 지금도 인맥쌓는 일에 시간을 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과거의 귀족 흉내를 내는 일이 어느 정도나 현대에도 통할까? 아니 통해야 하는가? 이건 전근대적 질서를 유지해 세상을 뒤로 돌리는 일이 아닌가? 더구나 스스로를 귀족으로 착각하며 손바닥만한 가문내의 사교에 몰두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모든 일을 본래 그런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런 걸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그럴까? 어떤 시스템이건 조직이건 그것에 빠져서 그 생활만 하고 그 생활이 자기를 다 지워버리고 단순하게만 되었을 때 그들에게 남은 것은 이제 그 형식과 이름과 지위뿐이라서가 아닐까?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이 말하는 그들은 실상 21세기에 제사 내용을 외우고 가르치는 사람과 비슷하다. 여전히 그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남아있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 가치를 별로 인정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 안의 내용을 생각하고 그 형식을 새롭게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낡은 형식에 몰두하고 주변사람에게 그것을 강요하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그저 민폐만 끼치는 인간이 될 뿐이다. 

 

이 모든 일은 우리의 일상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유한하고 하루 하루는 우리를 어떤 식으로건 다시 변형시킨다. 우리의 생활이 우리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 생활은 우리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그것이 반드시 나쁜 일만은 아니겠지만 사실 좋은 경우보다 나쁜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세상에는 지혜의 말보다 광고의 말이 더 많고, 자기를 지키는 일의 소중함을 알며 수도하는 자세로 사는 사람보다 자신을 잃고 자신의 질서에 세상을 빨아들이려는 사람이 더 많다. 좋고 흉한 일은 때로 과하게 오기 때문에 우리는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생각하는 인간으로 살기를 중단하고 영영 트라우마와 원망과 욕심속에 빠져서 사람의 삶을 포기하게 되는 일도 많다. 조심하고 또 조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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