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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당신은 개인주의자입니까?

by 격암(강국진) 2022. 7. 20.

22.7.20.

개인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국가와 사회보다는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의 의의와 존재에 더 큰 가치를 두는 사고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 사회를 포함하여 서구 민주주의를 받아들인 국가에서는 그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개념으로 존재한다. 즉 국가가 있기 전에 개인이 있다는 생각의 바탕에는 이미 개인주의가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국민의 계약과 합의로 만들어진 것이 국가라는 관점은 이미 개인주의적 관점이라는 것이다. 자유를 이야기하고, 개개인이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이야기하는 나라라면 이미 개인주의를 기정 사실화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주의자가 되지 못한 현대인이란 마치 공화국 안에 사는 봉건 주의자처럼 어느 정도 체재와 어긋난 사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에는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같은 것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고, 아주 많은 한국 사람들은 이 개인주의라는 것에 대해 깊은 생각이 없다는 느낌을 준다. 

 

개인주의의 반대를 집단주의라고 한다면 이 두 개의 사고 방식이 가지는 근본적 차이는 나의 존재 의미, 내 삶의 목적을 나 자신의 사고와 만족에서 찾는가 아니면 집단 내부에서의 관계나 위치에서 찾는가에 있다. 개인주의자에게 있어서는 다른 사람의 의견이란 필요악에 불과하다. 개인주의자라고 해도 인간이 사회적으로 협력하며 살아야 한다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따라서 사회적이고 객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행동이나 물건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개인주의자에게 그러한 사회적 협력은 그저 내가 살고 싶은 삶을 계속해서 살기 위한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사회적 평가나 사회적 위치가 나 자신이 되지는 않는다. 

 

반면에 집단주의자는 나는 한국인이라던가 나는 무슨 무슨 가문의 아들이나 딸이라던가 혹은 나는 검사라던가 나는 삼성의 직원이다 같은 집단적 정체성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는다. 물론 그들도 개인적 즐거움이나 여유를 추구하지만 그것은 말하자면 일단 내가 내 할 일을 다하는데에서 나오는 대가다. 중요한 것은 집단이다. 집단이 있기에 내가 있다. 개인주의자들처럼 개개인들이 존재하는데 그들이 필요한 만큼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 바깥의 개인이란 아무 가치가 없다고, 윤리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부모나 형이나 남편은 자식이나 동생이나 아내에게 무한한 권리를 가진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쉽다. 정치가는 국민을 마치 석탄이나 철광석 같은 자원으로 여기기 쉽다. 

 

개인주의자에게 인간이란 어떤 이름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다. 즉 어떤 존재가 내 동생인 것이지 그 존재의 핵심이 내 동생인 것은 아니다. 이런 면때문에 현대사회는 가진 것이나 배운 것에 상관없이 1인 1표라는 투표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사실 대통령을 뽑는 데 있어서 정말 모든 사람들이 같은 한 표를 행사한다는 것이 합리적일까? 경험의 양도 책임질 수 있는 능력도 전혀 다른데, 그 사고가 겨우 초등학생만 한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것이 현실인데 거기에 박사가 될 때까지 공부한 사람의 1표를 더해서 어떤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일까? 그렇다는 것이다. 왜냐면 인간의 가치는 교육이나 가진 것이나 사회적 위치나 유명세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극단적이라고 할 정도의 개인주의다. 앞에서 말한 대로 현대 사회는 이렇게 개인주의를 기정 사실화하고 있다. 

 

하지만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이분법은 흑백논리로 파악하기 보다는 역사적 맥락에서 파악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즉 누군가가 개인주의자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왜 이렇게 살게 되었나를 생각해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이걸 위해서 사회적 협력이란 출발점에서 출발해 보자. 말한 것처럼 인간은 어차피 사회적 협력이 없으면 동물만도 못하게 살 수밖에 없다. 인간이 우리가 말하는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다 사회적 협력의 결과다. 인간은 사회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런데 과거에는 사회적 계약과 관습은 설혹 바뀔 수 있고 바뀐다고 해도 매우 천천히 바뀌는 것이었다. 즉 귀족으로 태어나면 귀족으로 죽고 노비로 태어나면 노비로 죽는 것이 당연했으며 농사꾼의 자식은 농사를 짓고 무사의 자식은 무사가 되는 것이 과거였다. 이런 시대에는 사회적 관계의 단절과 파괴는 그 자체가 죽음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농사꾼이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면 죽는 수밖에 없고, 무사가 싸우지 못하게 되면 죽는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향을 떠나는 것만 해도 생사가 달린 모험이었을 것이다. 

 

요즘처럼 아버지와 자식이 다른 직장을 가지고, 살다가 보면 직장을 바꿀 수도 있다는 식의 발상은 현대적인 것이다. 일찌기 미디어의 이해를 쓴 마셜 매클루언은 노동이란 돈이라는 개념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즉 일을 하고 대가인 돈을 받는 것이 노동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도 이런 문제 때문에 같은 일을 해도 집에서 일한 것은 무가치하게 여겨지고 나가서 월급을 받으면 가치 있는 일을 한 것처럼 여겨지는 일이 많다. 집에서 간병을 한 것은 무의미하고, 간호사로 간병을 한 것은 직업인으로서의 성취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 대가로 받은 월급이 그 가치를 확고하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요즘처럼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전에는 훨씬 더 많은 것이 댓가를 얻기 위해 하는 일이라기보다는 그냥 내가 해야 하는 운명 내지 윤리적 행위 같은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다. 현대인도 자식을 키우면서 그 자식에게 돈을 받지는 않는다. 때문에 분명 노동으로 여겨질 만한 수없이 많은 일을 하지만 자식을 키우는 일의 가치를 자본주의적으로 돈으로 측정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매일 아침 이를 닦으며 그것은 필요한 일이고 가치 있는 일이지만 그것이 돈으로 대가를 받는 노동이 아니기에 그냥 매너라던가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마땅히 우리가 해야 할 일로 여기지 않는가. 몇 백 년 전만 해도 오늘날 노동으로 여겨지는 수없이 많은 일들이 모두 이런 것이었다. 농부가 농사를 짓는 것은 대가를 바라서가 아니다. 그냥 상식인 것이다. 훨씬 많은 일들이 직업적으로 하는 일 즉 선택해서 하는 일이라기보다는 그냥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오늘날의 사람들이 볼 때 우리는 그들을 집단주의자라고 부를 것이다. 그들 자신은 그냥 그게 당연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지 자기가 국가에 충성한다거나 가문에 충성한다거나 직업적 소명의식이 있다거나 하는 개념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훨씬 더 바뀔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현대인들이 보면 그들은 어떤 조직이나 집단을 그들 자신의 생명과 동일시할 정도로 충성하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집단 주의자로 보일 것이다. 

 

결국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는 흑백론적으로 나뉘어 진다기 보다는 이러한 사회적 변화의 속력과 범위가 달라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등장한 상대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관습은 현재의 현실을 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집단주의적으로 보이고 따라서 그들은 스스로를 개인주의자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백 년 전의 개인주의자는 사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집단 주의자처럼 보일 수 있으며 시공을 초월한 개인주의자와 집단 주의자의 구분은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게다가 과거의 시대적 환경에서는 그 집단주의라는 것이 합리적인 사고일 수 있다. 그때는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까 그렇다. 

 

이제 질문해 보자. 여러분은 개인주의자인가? 이 질문은 우리가 어떻게 행복에 도달할 것인가, 우리의 삶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가하는 질문과 깊게 연관이 되어 있다. 나를 포함해 누구나 어떤 면에서는 집단 주의자이고 어떤 면에서는 개인주의자다. 우리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관계는 미래에는 변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당연한 윤리가 아닌 것으로 여겨질 것이며 그때 그 시대의 사람들은 우리를 집단 주의자라고 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고, 종류의 차이가 있겠지만 이미 정신없이 변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개인주의자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상처입고 인생을 낭비하게 되기 쉽다. 부부로 이뤄진 가족공동체의 가치를 당연한 것으로 알고 배우자에게 평생 헌신했지만 그 배우자가 사실은 당신을 그저 이용할 대상으로 여기고 비밀리에 불륜을 저질렀다거나 하는 상황이 좋은 예일 것이다. 물론 앞에서 거듭 말한 것처럼 인간은 사회적 관계에서 살아가는 것이기에 모든 것을 의심하고 애초에 시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 나름대로 문제를 크게 가지게 된다. 우리는 이것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관계는 현대와 맞지 않는다. 그래서 현대인의 가족개념은 적어도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변해온 것이다. 가문이라는 개념이 현대와 어울리지 않는 것은 그것을 그냥 당연한 것, 윤리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 서로 돕는 행위라고 파악할 때 현대 사회에서는 위험도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국가처럼 법이나 행정부가 있는 것도 아닌데 가문이라는 사적인 공동체에서 당신이 한 일을 누가 기억할 것이며 누가 당신에게 그걸 돌려준다는 것인가. 거기에서 공평함이라는 것이 달성될 수 있을까? 가문의 관행에서는 가문을 지키기 위해 부모의 재산의 대부분을 아들인 장자가 상속하고 나머지 자식들은 상속이 거의 없게 된다. 이는 가문을 지켜야 모두에게 좋다는 발상 때문인데 오늘날 그렇게 해서 유산을 상속받은 장자가 정말 가문의 사람들을 계속 돌봐 줄 수 있는가? 그건 그저 그의 개인 재산이 될 뿐이 아닌가. 차라리 상속분이라도 나눠 받는 게 더 도움이 되지 않는가? 

 

이제 결론을 내리며 이 글을 마치자. 우리는 스스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개인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정신없이 변하는 현대사회에서 당신은 결코 행복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의 인생은 낭비될 것이고 종종 배신감에 상처받을 것이다. 이걸 위해서 우리는 자기성찰과 가꾸기가 필요하다. 당신은 뭘 좋아하는가? 브랜드에 속지 말고, 사회적 평판에 속지 말고, 가격에 속지 말고 직접적으로 뭘 원하는가를 생각해 보라.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무엇에 흥미가 있고 기쁨을 느끼는지 그중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뭔지를 생각해 보라. 알고 보면 당신은 따듯한 온돌방에서 추리소설을 밤새 읽는 것이면 충분히 행복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걸 가질 수 있도록 하라. 그게 누가 되건 수다를 떨 친구가 필요하다면 그런 친구를 구하도록 하라. 자기 성찰이 없으면 소박한 행복도 달성할 수 없다. 왜냐면 우리는 그런 기회를 버리고 다른 일을 하는데 바쁠 것이기 때문이다. 숲을 보는 일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인 사람이 콘크리트 건물만 보면서 매일 살 수도 있다. 아무 친구나 좋다고 하면서 친구를 사귈 때 이상한 잣대를 들이댈지도 모른다. 요리가 좋은 사람이 체면상 요리를 못할 수도 있다. 자신은 남자라던가 자신은 학벌이 높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은데도 하룻밤에 천만 원을 내는 비싼 리조트에서 자보는 것이 정말 행복하다는 말에 속아서 훨씬 더 행복하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많은 일들을 던져버리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적 협력이 필요하다. 댓가가 없어도 남을 돕는 일은 좋은 일이며 우리는 종종 대가도 필요하다. 그래서 그다지 진심이 아닌 얼굴도 필요하고, 관심이 없는 사람도 만나야 한다. 나와 생각이 매우 다른 사람이라도 존중이 필요하다. 개인주의란 내 삶만 중요하다는 이기주의가 아니다. 사실 모든 사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봉사로 평생을 마치는 그런 고집스러운 사람들이야 말로 가장 개인주의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렇게 살다가 유명해지기도 하지만 유명해지려고 그렇게 산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과 내부의 요구에 충실한 것이다. 남들이 이렇게 하면 좋다는 말에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 무슨 희생을 하며 살겠는가. 그런 말은 대개 이기적으로 살아야 살아남는다는 말이기 쉽다. 

 

개인주의란 내가 고민하고 노력하며 사는 의식있는 존재이며 남들도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이런 생각이 현실에서 언제나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계속 시험당하는 신앙심처럼 개인주의라는 이 생각은 현실에서는 계속 시험당한다. 그냥 남 따라 살면 좋은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정말 생각이란 걸 하는 사람일까 싶은 때도 많다. 노예처럼 사는 사람에게 당신의 불행은 바로 그 노예의 체인에서 나온다고 말해주면 그 노예가 나는 이렇게 사는 게 좋다, 내 의견을 존중한다면 나를 내버려두라는 말을 듣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 사람이 금방 불행 때문에 우는 소리를 하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개인주의자다. 그리고 이 신앙을 버릴 때 나는 더 불행해 질 것을 믿는다. 그래서 매일 나를 붙잡고 세상과 싸우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어쩌면 삶이란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이랬던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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