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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어떻게 살 것인가 2

by 격암(강국진) 2022. 7. 4.

22.7.4

우리는 종종 이러느니 차라리 죽고 싶다는 말을 한다. 아니면 적어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을 할까 그리고 이런 말은 정말 진심일까? 물론 적어도 일부는 그럴 것이다. 세상에 흔한 자살이 그것이 진심임을 실제로 보여주지 않는가. 

 

그런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종종 어떤 공통점이 느껴진다. 그것은 뭔가의 이유로 해서 그들은 내일의 자신에 대해 아무런 희망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학폭에 지친 학생, 부상으로 꿈이 좌절된 운동선수, 노화로 고통뿐인 하루 하루를 보내는 노인들이 그런 예일 것이다. 나는 일반론적으로 말해서 안락사에 무조건 반대하는 사람도 아니다. 다시 말해 남의 판단에 대해 설사 그것이 죽음의 선택이라고할지라도 어느 정도는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죽고 싶다, 사는게 의미가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틀에 박힌 힘내라는 말을 던지거나 싸구려 희망을 불어넣는 것은 사실 종종 모욕적이다. 자기는 손가락 상처도 참지 못할 사람이 팔다리가 잘려나간 사람에게 아파도 참으라고 그걸 못참냐고 말하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문제의 근원에는 자신이라는 부분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즉 그 사람은 자신이라는 존재는 이러저러하다라고 굳게 믿은 나머지 거기에 전혀 희망이 없다라고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학폭에 시달리다가 죽음을 택하려는 학생에게 주는 흔한 조언이 있다. 그건 바로 죽을 것같으면 그냥 학교를 그만두라는 것이다. 죽을 수도 있는데 학교를 왜 그만 두지 못하며, 죽을 수도 있는데 어떤 일이 두렵냐는 것이다. 이런 조언조차 싸구려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그러나 진실의 일부를 가지고 있다. 그 학생은 이러저러한 삶을 누리는 누군가만 자신이라고 여기기에 탈출구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부모를 실망시킬 수는 없기에, 학교를 그만 둘 수는 없기에, 답이 없고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제3자가 보면 죽는거 보다는 그런 한계를 넘는게 차라리 낫다고 말하게 된다. 

 

이런 예는 학생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둘러보면 우리는 평생 함정을 피해왔지만 벗어날 수 없는 자아의 함정에 빠지게 된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퇴직후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좌절하다가 죽음도 생각하는 사람의 이야기도 세상에는 흔하다. 가정주부로서의 삶에 절망하여 우울증에 걸린 여자들의 이야기도 세상에는 흔하다. 자기 삶의 의미를 온통 자식에게서만 찾다가 그것이 어떤 결과였건 자식이 다 성장하고 나서 오히려 추해지고 허무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사람의 이야기도 세상에는 흔하다. 

 

얼마전에 소록도에서 평생 나환자들을 위해 희생하신 외국인 수녀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대통령에게 표창도 받았던 그녀들의 삶은 비록 나름 유명세를 조금 얻었지만 청빈하고 고난에 찬 것이었다. 이런 삶을 보면서 대통령상 따위를 타기 위해 그렇게 살았을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다. 그게 그녀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런 종이쪼가리따위를 위해 희생하는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실제로 그녀들은 나이들어 봉사가 불가능해지자 모든 걸 뒤로 하고 몰래 소록도를 떠났다. 

 

그런데 말이다. 가정주부중에는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꽤 많다. 그녀들의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나환자를 간호하는 수녀의 삶과 비교하기는 어려울텐데 봉사하는 수녀는 빛나는 것같고 더 좋은 집에서 더 좋은 환경에서 살았던 주부들은 삶의 의미를 모르겠다며 우울증에 빠져든다. 이것은 주부의 삶을 폄하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단지 우리가 의미를 찾는 일, 자아를 키워가는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가를 보여주기 위한 예다. 시어머니 병간호로 늙어버린 여자는 한이 서린 목소리로 자기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완전한 타인인 나환자를 돌보며 평생을 보낸 여자는 빛나는 얼굴을 하게 되는 건 무슨 일인가? 타인인 나환자는 가치있는 환자고 시어머니는 의미없는 환자인가? 나환자 간호를 찬양하는 목소리는 당연하고 시어머니 병간호를 찬양하는 목소리는 사악한 과거의 가족이데올로기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뭘 위해 살아야 할 것인가? 불교에는 더러운 물위에 뜬 연꽃같은 삶이라는 표현이 있다. 왜 우리중의 누군가는 그저 쓰레기 속을 헤메는 쓰레기같고 누군가는 연꽃같은 가. 나로서는 감히 그에 대해 어떤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답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수도하고 답을 찾는 삶, 겸허하고 노력하는 삶이 그 답중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 

 

사람으로 태어나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을 멈추는 순간이 바로 우리가 함정에 제대로 걸려들게 되는 순간이다. 삶의 가치는 우리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그 고민을 계속하고 그 발버둥을 계속하는 것에 있다. 그것은 때로 괜히 고상한 척한다는 오해를 사기쉬운 태도지만 사람이 그래봐야 짐승이지 뭐라고 말하며 뭔가를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탈출할 수 없는 함정에 빠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노력이 포기되지 않았다면 세상에는 당연히 우리가 보지 못한 부분이 있고 우리는 거기서 혹은 우리가 그저 지나쳐온 과거의 어딘가에서 여전히 우리의 삶의 의미는 남아있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수도하는 삶이란 가치는 이미 과거의 것으로 여겨져 잊혀진지 오래다. 많은 사람들은 10억모으기 따위가 삶의 목표라고 굳게 믿으며 살아간다. 그 목표는 완전히 좌절되거나 아니면 달성된다. 우리가 여전히 희망을 가지고 살때는 그것도 의미를 주지만 앞에서 말한 경우에 이르르면 우리는 알게 된다. 그건 조잡한 쥐덫이었다. 결국 최종단계에 도달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라 수도하는 삶같은 목표만이 우리를 계속 전진하게 한다. 설사 우리의 사지가 모두 없어진다고 해도 우리가 진리를 깨치기를 원할 때 다소의 희망은 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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