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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다시 무지와 악

by 격암(강국진) 2022. 4. 25.

22.4.25

나는 이따금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도저히 더 볼 수 없을만큼 고통을 느낀다. 그 이야기속에 나오는 매우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때문이다. 물론 누구나 때로 실수를 하고 무지한 행동을 하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한 경우가 있다. 조금만 상식적으로 행동하면 될 텐데 실수를 계속 반복해서 엄청난 문제들를 만들어 내는 이런 캐릭터를 보면 나는 그것만으로 심한 고통을 느낀다. 마치 주유소에서 불장난 하는 아이나 핵무기 스위치를 가지고 놀고 있는 바보를 보는 것같다. 

 

최근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 드라마를 그만 보고 말았다. 나는 아무래도 무지한 사람들에게 관대해 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 보다. 그러다보니 나는 다시 한번 무지와 악의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를 괴롭게 하는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 나쁜 사람인가 아니면 그저 무지한 사람인가 하는 문제다. 악은 무지와 같은 것일까? 모른다면 뭘 모른다는 말인가? 일찌기 소크라테스나 계몽주의자들도 논한 바 있는 이 피할 수 없는 질문에 대해서 나는 예전에도 생각을 해 본 적이 있거니와 찾아보니 나는 적어도 두 가지 말을 했었다. 

 

그 중 하나는 악이란 그 상황내지 환경에 맞는 행동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상식의 문제라고 하는 견해다. 이에 따르면 악이란 농구경기에서 축구를 하는 것과 같은 행동이다. 즉 참가자는 농구 규칙에 따라서 행동해야 하는데 공을 발로 차버리면 그것은 반칙이며 악한 행동이다. 이런 악한 행동은 규칙을 모르거나 상황을 오해한 무지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고 고의로 규칙을 어기고자 하는 사악한 의도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상식과 규칙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나쁜 것과 무지한 것은 애초에 구분할 수도 구분할 필요도 없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무지와 악을 구분하지 말고 상식과 규칙을 분명히 해서 악한 행동이 애초에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상식의 정리와 교육이 필요할 것이다. 소통이 필요할 것이다. 교통신호를 어겨서 벌금을 낼 때 몰라서 그랬는가 아니면 고의로 그랬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신호위반은 그저 신호위반일 뿐이다. 

 

하지만 애초에 악인가 무지인가를 따질 것없이 모두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옳은 말이지만 일반적으로 그리고 제한없이 택할 수는 없는 원칙이다. 세상은 단 하나의 상식과 법칙으로 굴러가는 곳이 아니며 나와는 다른 타인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편적 상식을 가지고 더 많은 사람을 포용하려고 하지만 여전히 세상에는 각자의 세상에서 각자의 가치관에 의해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하나의 상식을 너무 강조하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유럽인이 이단종교를 믿는 아메리칸 인디언에게 너희는 단지 악일 뿐이라고 말하고 멸종시켜 버리려고 할 때와 같은 태도를 취하게 될 수 있다. 이래서는 누군가를 포용하면서 살 수가 없고 결국은 스스로도 잘 살 수가 없다. 

 

사실 무지한 것과 악한 것은 보는 사람의 선택에 큰 영향을 받는다. 이는 자유의지와 사랑의 문제다. 무지한 것은 자유의지가 없다. 무지에 의해 휘둘리는 사람은 자기도 어쩔 수 없이 잘못을 저지른다. 이에 반해 악한 것은 그 자체가 나쁜 의지다. 즉 악한 자는 잘못된 행동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문제가 생겼을 때 몰라서 그랬으니 용서하자고 한다던가 나의 어머니처럼 그 사람은 사람은 좋은데 좀 멍청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용서할 사람,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을 흔히 무지한 사람이라고 부르고 그렇게 하지 않을 사람을 나쁜 사람내지 악당이라고 부른다. 이에 따르면 세상 사람 모두를 그저 무지한 자로 여기는 것은 가장 자비로운 관점이 된다. 무지한 자를 보며 화를 내는 나는 그러니까 자비롭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 나로서는 입장이 위에서 말하는 것과는 정반대다. 나는 순수한 악을 오히려 자유의지가 없는 것으로 느낀다. 개선의 여지가 없는 본성에 휘둘리는 악을 향해 불평해 봐야 마치 중력의 법칙을 향해 불평하는 것처럼 느낀다. 개가 개같은 짓을 하는데 화를 내봐야 뭘 하겠는가. 화를 내는 것도 오직 말이 통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나는 무지에는 분노가 치민다. 그 무지가 개선가능한 것이며 나와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될 수록 오히려 화가 더 나는 면도 있다. 왜 그 무지를 내버려두는가. 그 무지가 얼마나 많이 얼마나 자주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이렇게 큰 악, 순수한 악을 아예 제쳐버리고 나면 우리가 말하는 대부분의 악은 사실은 무지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 나는 종종 악이 탄생하는 가장 흔한 방식은 바로 출세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는 한다. 능력이 그에 맞지 않는데 출세를 해서 큰 권력을 가지게 되면 그것은 무지한 힘이 된다. 능력부족인 정치인, 능력부족인 상사, 능력부족인 가장이 그런 사람들이다. 그 능력부족인 인간에게는 그런 권력을 가진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지식과 감수성이 없다. 그러니까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아서 뭔가를 휘두르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상처입거나 심지어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보이질 않는 것이다. 이것은 술을 마시거나 애초에 운전면허가 없는 사람이 차를 모는 것과 같다. 그 사람이 설사 누군가를 상처줄 생각이 없어도 일이 그렇게 될 확률은 아주 크다. 아니 그런 일을 계속하면 필연적으로 비극이 생기게 된다. 능력부족인 자에게는 봐야 할 것을 볼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악은 무지에 의해 생기는 악이다. 우리는 출세하고 유명해지기를 보통 바라지만 분수에 맞지 않는 출세를 추구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악당으로 만들고 있다. 

 

악은 대개 무지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고 할 때 나는 서둘러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계몽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말할 필요가 있다. 무지하지 않은 사람들이 무지한 사람들을 일깨우면 악이 없어진다는 계몽주의는 무지한 것과 무지하지 않은 것에 객관적인 구분을 둔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것을 아는 사람은 깨인 사람이고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무지한 사람이 된다. 시공을 초월한 진리나 선을 우리가 알 수 있다는 이런 사고는 쉽사리 우리와 뜻을 같이 하지 않는 사람들을 단지 교육의 대상이나 개혁의 적인 존재로 간주하기 쉽다. 즉 대화를 할 상대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뭔가를 해야 할 상대다. 이러한 관점을 따르다 보면 누적된 지식과 유명세로 만들어진 권위가 금방 안다는 것에 대한 권리를 독차지하게 되는데 이러면 사람들은 어떤 중앙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잃어버리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짓을 할 수도 있다. 소통은 애초에 거의 필요가 없다. 나는 이러한 것이 깨어있는 사람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안다는 것은 패러다임적이며 상대적이다. 인간의 삶을 모르는 개를 볼 때 그 개는 나의 입장에서는 무지한 존재이지만 그 개의 삶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무지한 자이고 그 개가 깨어있는 존재이다. 사실 내가 개의 입장이나 기분에 대해 뭘 알겠는가. 나와 그 개의 삶이 공존이 불가능해질 때 나는 그 개를 악으로 판단할 테지만 그 개의 입장에서는 무지한 악은 나일 것이다. 지구에 자원위기와 기후위기를 가져온 인간이 대부분의 생명체에게 암적인 존재이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의 생각이 다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서로에게 의지할 뿐만 아니라 생명은 모두 주변의 환경에 의지하여 살아남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져 있다. 그리고 서로 다른 관점들은 이런 측면에서 보면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낸다. 아메바나 짚신벌레같은 단순한 생명체가 생각을 한다면 그 생각은 겨우 작은 배양유리접시위의 세상에 대한 것일 것이다. 하루살이가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겨우 하루의 삶에 대한 것일 것이다. 어떤 사람의 생각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할 만큼 넓고 긴 시공에 펼쳐지겠지만 어떤 사람의 생각은 닭장에서 살찌워지는 튀김용 닭의 생각과 그리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의 생각은 수많은 사람들과 공유되는 것이겠지만 어떤 사람의 생각은 오직 그만이 알고 있는 특이하고 외로운 것일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개인이면서 어떤 생태계, 어떤 문화공동체의 일부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펼쳐지는 어떤 패러다임에 소속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의미와 목표를 준다. 우리가 뭔가를 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대부분 이 패러다임을 말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운전자일 때 우리는 운전규칙을 알고 있는 것이고, 우리가 축구선수일 때 우리는 축구규칙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입에서 누군가가 무지하다고 말할 때는 그는 그것에 대해 모른다는 뜻이다. 그는 우리의 삶의 방식을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축구장에서 농구를 하는 사람을 만나도 반드시 무지한 것이 꼭 그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세상이 바뀌면 농구를 하는 것이 정상이고 축구를 하는 것이 미친 짓이 될 수도 있다. 내 생각이 바뀌지 않았어도 나와 연결된 사람들의 생각내지 삶의 방식이 되돌릴 수 없이 바뀔 때도 있다. 그러면 미친 사람은 내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뭔가를 안다는 것이 상대적이고 시공적으로 유한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를 교육시키고 개화시키려고 해서는 안된다. 다만 우리는 서로의 삶의 방식을 소통하는 것을 시도할 수 있을 뿐이다. 비록 누군가가 지극히 어리석어 보이고 내 말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그렇다. 일방적으로 누가 누군가를 개화시킨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삶의 방식인데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가르친다면 그 누군가는 결국 제대로 된 방식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우상을 버리라고 말하면서 나를 우상으로 만들라고 하고 있는 셈이다. 

 

무지는 악과 실질적으로 같은 것이지만 마치 사람들 사이의 거리처럼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도저히 소통할 수 없으면서 우리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을 절대적인 악으로 볼 수 밖에 없다. 그들은 마치 맹수나 자연재해처럼 두려운 존재들이다. 그러나 절대적인 악이 아니라고 해도 모든 사람들은 각자를 기준으로 유한한 정도의 무지를 가진다. 누구도 타인과 똑같은 체험을 하며 살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도 서로가 알고 있는 것을 모두 알 수는 없다.  결국 어떤 의미에서 모든 타인은 나를 기준으로 어느 정도 악하다고 할 수 있다. 자식을 가장 사랑하는 부모도 자식을 망칠 수 있으며 그 반대도 가능하다. 그들은 결코 각자의 삶의 방식을 모두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관용의 선을 그어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무지한 존재로 말하고 그 선을 넘어서는 사람들을 악한 존재로 말할 뿐이다. 

 

나는 참을 성이 부족한 사람이다. 그래서 이 관용의 선이 그다지 크지가 않다.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현실도 아니고 허구의 이야기건만 어떤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의 무지스러운 행동이 어떤 한도를 넘게 되면 쉽사리 화가 나고 만다. 떨어지는 칼날 밑으로 머리를 집어넣는 모습을 보게 되면 그저 상처입은 것을 불쌍히 여기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바보같음에 참을 수가 없게 된다. 소통과 기다림은 참으로 쉽지가 않다. 그것이 유일한 방식임을 알아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그저 그게 유일한 방식이다라는 생각을 다시 확인하며 나의 조급함을 반성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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