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사랑과 삶의 방식

by 격암(강국진) 2022. 4. 18.

22.4.18

우리가 어떻게 연애를 하는가 혹은 우리가 어떤 사랑이야기를 좋아하는가는 우리의 일반적 삶의 방식을 당연히 반영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곧 섹스라고 생각하거나 사랑이란건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관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랑을 믿지 않는 그들은 로맨틱 코미디따위를 보지 않거나 별로 재미있어 하지 않는다. 이것 역시 그들이 사랑에 대해 가지는 의견을 넘어서 그들의 삶의 방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일단 그들은 스스로의 눈에 생생한 실체라고 생각되는 것만을 믿는다. 아마도 그들은 스스로는 근거없는 추상적 관념을 믿지 않는다고 할테지만 그건 좀 다르다. 그러니까 사랑을 믿지 않는 자들은 예를 들어 물질이나 돈은 굳게 믿을 것이다. 그러나 돈은 추상적 관념이 아니고 사랑은 추상적 관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근거없는 것이다. 우리가 신을 생생한 실체로 여기면서도 돈을 이해하지 못하는 원시 부족사회의 사람들을 상상할 수 있듯이 아마도 세상에는 사랑은 생생한 실체로 굳게 믿으면서 돈따위는 추상적 관념으로 믿지 않는 사람도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순도 100%로 그런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것은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속에서 태어나 살아왔기 때문에 돈의 가치를 생생하게 느끼고 있다. 설혹 그게 지폐가 아니라 플라스틱카드라던가 심지어 디지털 신호라고 해도 우리는 그걸 생생한 실체로 느낀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돈없이 돌아가지 않지만 사랑은 꼭 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랑은 진짜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 관념이며 돈과는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사랑이란 개인적인 감정이다. 우리가 어떤 객관적인 이유를 알면 우리는 그걸 보통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 여자는 부자이므로 나는 이 여자가 좋다라는 걸 사랑이라고 부르지는 않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돈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어떤 이유이건 우리가 그것을 정말로 확고하게 적어내려갈 수 있다면 그런 논리적인 계산에 의한 행동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사랑은 가치판단에 대한 것이며 가치판단은 근거가 없다. 나는 그 남자가 잘생겨서 좋다는 판단은 결국 잘생겨서 왜 좋은데라던가, 잘 생긴게 어떤 건데라는 질문을 회피할 때만 확고한 이유처럼 보일 뿐이다. 그리고 그 밑으로 내려갈 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얼마지나지 않아 건너 뛸 수 없는 애매함을 발견하게 된다. 가치판단이란 그런 것이다. 과학처럼 어떤 아주 원초적 원리까지 가기도 전에 우리는 더이상 이유랄 것을 알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어떤 착각을 하고 있었거나 그게 아니면 그냥 내가 나라서 좋아하거나 싫은 것이다. 

 

이런 이유로 사랑 이야기에서는 자연히 세상의 기준이나 어떤 논리적인 이유보다는 내 마음, 내 느낌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끝이 행복해지는 이야기라도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사랑이야기는 어떤 고난과 장애가 등장한다. 즉 그 사랑은 반대되어야 할 이유가 존재하는 것이다. 여자 백명의 정보를 늘어놓고 그 중에서 어떤 객관적인 이유에 따라 골라서 이 사람이 좋다고 선택하는 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사랑 이야기는 오히려 객관적인 기준으로 보면 그런 선택이 불합리한 면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이런 면은 특히 비극적 사랑이야기에서 더욱 그렇다. 슬픈 사랑 이야기는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서 시작해서 그걸 위해 엄청난 댓가를 치루는 사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그 사랑은 긍정된다. 즉 아무리 슬퍼도 애초에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결론나는게 아니라 고작 짧은 행복을 줬던 사랑이라도 심지어 목숨을 요구했던 짝사랑이라도 그것은 그 대단한 댓가를 치룰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암시되는 것이다. 결국 사랑이야기 특히 슬픈 사랑이야기가 강하게 전달하는 메세지는 우리가 논리나 증거로 설명할 수 없는 우리의 감정, 우리의 선택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온 세상의 공격을 받는 것도 감수할 수 있다는 낭만주의적 영웅의 태도가 바로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찬양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단순히 사랑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사랑을 위해 모든 걸 바치고 비참하게 죽는 사람의 이야기를 보면서 눈물 흘리는 사람은 사실상 현재의 삶을 초월해서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고 싶으며 그걸 위해서라면 큰 희생을 감수하는 것도 멋진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정도의 문제가 있지만 그들이야말로 돈은 실체로 느끼지 않으면서 사랑은 실체로 느끼는 사람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랑은 혁명의 감정이다. 성공한 과학자나 정치가나 기업가들은 사랑따위에는 무관심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그들이 너무 바쁘거나 기회를 만나지 못한 경우에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지금의 패러다임을 깨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은 정열적이며 자기의 마음을 믿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랑의 기회가 있을 때 바로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랑에 대한 모든 객관적 이유를 무시하고 자신의 마음을 믿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사랑이 넘치는 사회란 혁신적이고 혁명적인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단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 섹스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하지만 말이다. 

 

이같은 것은 한국 드라마와 외국 드라마를 비교해도 나타난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국가로 평가된다. 그리고 세계는 한류 드라마를 보면서 그들의 드라마에 대해 불평하고는 한다. 그들의 드라마에서는 남녀가 만나면 5분안에 침대로 뛰어드는 일이 많은 것이다. 게다가 동거를 하거나 섹스를 하고 나서도 사랑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너무 부담스럽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나온다. 섹스가 없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온갖 문제에도 불구하고 손 한번 잡았던 남녀에게서는 사랑을 보게 되지만 섹스광처럼 온갖 짓을 다해도 거기서는 한점의 사랑도 느껴지지 않는 경우도 존재한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국가이며 여전히 사랑을 믿는 국가이다. 

 

하지만 이것도 사실 변하고 있다. 한국 사람이라고 해도 물론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단 한줄의 시를 남기는 것이 자신의 삶을 진짜로 의미있게 하는 일이며 그걸 위해서라면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던져도 좋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건 그저 철없는 사람들의 객기일 뿐이며 이 세상은 확고하게 그들의 눈에 분명히 보이는 것으로 이뤄져 있다고 믿는다. 돈 말이다. 

 

30년전만 해도 한국 티비나 영화관은 슬픈 사랑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사랑 따위는 전혀 나오지 않는 장르물도 많아졌고 시대와 사회적 압력과 싸우는 비극적 사랑이야기를 하기보다는 그저 달콤한 일상의 사랑이야기를 보여주는 소위 트렌디 드라마가 많아졌다. 이것이 모두 후퇴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경향을 보여주기는 한다.

 

요즘은 아예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도 많아졌다. 최근에는 남녀갈등 이야기가 자주 사회적으로 화제가 되는데 이것도 이런 현실에 크게 관여되어져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랑이란 마치 사이비 종교의 신처럼 남자가 여자를 혹은 여자가 남자를 세뇌하고 착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허구라는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사랑을 믿지 않는다라는 말이 남녀가 서로를 사기꾼처럼 보게 되었다는 말과 깊은 관련이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의 패러다임 안에서 살면서 그 패러다임 바깥을 꿈꾸지 않는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또한 진취적인 것은 반드시 좋은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건 때로 도박중독증과 비슷해 보일 수 있는데 언제나 지금에 만족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다음 단계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우리가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어떤 곳인가를 알려주는 좋은 자료다. 사랑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나무도 강도 사랑할 수 있다. 심지어 수식에 대한 믿음을 사랑할 수도 있다. 그런 걸 지키려고 하는 모습에서도 우리는 낭만주의적 영웅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 이외의 것에서는 대개 어떤 이유나 자료가 많이 달라 붙는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에는 이유가 필요없다는 말은 쉽게 동의하게 되지만 그 대상이 우리 마을의 버드나무라면 사람들은 좀 더 객관적 설명을 요구한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사랑만큼 우리를 무장해제시키고 삶의 방식을 잘 보여주는 것이 없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새로운 세상이 좋다. 그걸 보고 싶다. 그래서 내가 사랑에 넘치는 사람으로 살았으면 좋겠고 한국도 사랑으로 가득 찬 나라로 남았으면 좋겠으며 한류가 세상을 그런 곳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세계가 사랑으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 인간이 달에 가려면 많은 노동과 계산이 필요하다. 그러나 결국 그 끝의 끝에 가면 인간이 달에 갈 수 있는 이유는 꿈과 정열이 있기 때문이다. 

'주제별 글모음 > 생활에 대하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평함에 대하여 2  (0) 2022.05.17
다시 무지와 악  (0) 2022.04.25
내가 규칙적인 생활에 반대하는 이유  (0) 2022.04.14
돈이 문제인가?  (0) 2022.03.30
나를 지키기, 내 생활을 지키기  (0) 2022.02.2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