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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국가란 무엇인가

모두를 위한 진보

by 격암(강국진) 2022.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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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20

우리는 대개 이 세상이 더 좋은 곳이 되었으면 한다. 그렇지만 모두를 위한 진보나 발전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이 세상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다양해 질 수록, 한국이 선진국수준에 도달했다는 확신이 생기면 생길수록 이 질문의 답은 자신없는 것이 되어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한국인이니 여성이니 노동자니 젊은이니 하는 말로, 대개는 수입되어진 여러가지 이론으로 수 많은 사람을 하나로 엮지만 사실 그 안에 포함되어져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양한 입장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거칠고 애매한 말들이 도움이 안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더구나 이젠 더이상 프랑스나 독일이나 미국을 보면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나라가 저기라고 말하는 식의 진보도 별로 설득력이 없다. 나를 포함해서 그런 나라에서 살아본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 우리나라도 천국은 아니지만 그 나라들도 천국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젠 정답은 어디에도 없다. 이럴 때 모두를 위한 진보란 무엇일까?

 

애매한 말들로 만들어 내는 진보는 언뜻 생각하는 것과 반대의 결과를 만들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페미니즘이 그렇다. 페미니즘이 여성을 존중하는 사상이라는 말은 오늘날의 한국에서는 거의 의미가 없다. 페미니스트들은 억압에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단합해야 한다고 말한다. 남성들이 하나의 집단으로 뭉쳐서 여성을 탄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남성이라는 집단도 여성이라는 집단도 환상일 뿐이다. 남성이 기득권이고 억압하는 사람이라고? 대부분의 남성은 그렇지 않다. 그들도 억압당하고 있는 피해자일 뿐이다. 사실 페미니즘이 싸워야할 대상이 있다면 바로 여성은 이렇다, 남성은 이렇다는 식의 전형적 선입견이다. 그것이 억압을 발생시킨다. 우리는 여자가 이러니 남자가 이러니같은 말과 싸워야 한다. 그런데 여성이 뭉치자는 말은 남성도 뭉치게 만든다. 힘없는 여성들이 모여서 힘없는 남성들의 것을 빼앗고 거기에 반발하는 힘없는 남성들은 이제 자기도 여성들에게서 더 많은 것을 빼았겠다며 싸우게 된다. 이런 다툼의 과정은 오히려 남성, 여성의 전형성을 증가시킨다. 

 

물론 장년이나 노년층을 보면 남녀차별적인 행동과 생각을 하는 사람을 찾기 쉬울 것이다. 범죄자들을 자주 보는 사람들은 봐라 한국의 남자들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남녀차별적인지 아냐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한국 남자의 문제라고 파악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안된다. 대부분의 남자는 범죄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젊은 남성들이 보수화되는 일이 많은 이유도 이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여성차별을 크게 실감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중년의 남자나 여자가 젊은이들에게 와서 교육을 시키면 억울한 것이다. 그런 일들은 기성 세대가 한게 아닌가. 여성차별은 나이든 세대가 하고 그에 대한 보상은 젊은 남자들이 해야 하는 것이 진보인가? 진보란 이렇게 불공평한 것인가? 이런 생각이 가능한 것이다. 

 

애초에 개별적인 사건에서 선악을 논하는 것과 사회적인 규모에서 그렇게 하면서 분노를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공평이라던가 경쟁력이란 홀로 고립되어 절대적으로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환경에 있는가에 의해서 대부분 결정된다. 우리는 이 점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곱씹어야 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시스템이 오늘날처럼 발달하지 못했던 야만적인 과거의 시대에는 많은 여성의 경쟁력이 확실히 많은 상황들에서 남성보다 못했다. 남성이 여성을 억압했다는 말은 그 시대를 전부 설명할 수 없다. 지금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서는 여성들이 강간당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런 곳에서 남성의 가치가 여성의 가치보다 더 높게 평가받는게 이상할까? 여성이 예쁘게 차려입고 거리를 활보할 자유가 있을까? 지금도 한반도에 전쟁이 나면 남녀평등같은 이야기의 대부분은 온데간데없을 것이다. 그런데 3백년쯤 전의 환경에서 남성이 여성을 억압했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이건 물부족으로 고생하는 나라에서 물이 비싸게 팔리는 가운데 물장사들이 시민들을 억압한다는 말이나 거의 같은 말이다. 

 

물론 이런 말이 모든 썩어빠진 남성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월동에 강간범이 있다고 해서 신월동 주민을 모두 강간범으로 취급하는 것은 큰 오류이며 이 오류는 바로 인종차별이나 빈민차별같은 것에서 나타나는 사고의 오류다. 임대아파트에 깡패가 산다고 해서 임대아파트 주민을 깡패취급하면 안되는 것이다. 비록 페미니즘이 이런 오류를 언제나 범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남자 여자로 인간을 나눠서 이야기하면서 남성을 인종차별하는 오류에 빠지기는 매우 쉽다. 그래서 나는 페미니즘이라는 말이나 평등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애매한 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들이 분명한 의미를 가질 때 물론 나는 그런 말들에 찬동한다. 그리고 인간사회는 변화했다.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3백년전과 지금은 다르니 과거의 관행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는 뜻도 된다. 관행은 원래 옳은게 아니다. 현실을 봐야한다. 21세기에 양반 쌍놈 운운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이 문제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을 때 그 사람들이 집단으로 일을 추진하면 언제나 생기는 일이다. 다만 현대의 복잡성때문에 문제가 더 심해지고 있을 뿐이다. 여기 농부와 어부가 있다고 해보자. 이들은 각자 흩어져서는 힘이 없으므로 뭉쳐서 집단행동을 하기로 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농어민으로 부른다. 문제는 이 농어민 집단은 농부나 어부 어느 한 쪽에 의해 주도되기 쉽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농부의 숫자가 어부의 숫자보다 더 많다면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언제나 민주적으로 농부의 일을 처리하는 쪽이 더 시급하다고 결정될 것이다. 따라서 어부는 늘상 고기잡이를 포기하고 쌀값시위에 나가서 시간을 쓰게 된다. 그 숫자가 작다고 하더라도 어부가 훨씬 더 부유해서 농어민 집단의 주도권을 가진다면 마찬가지로 농어민 뉴스는 매번 어민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이야기만 하고 농어민집단은 어부의 일만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안그래도 살기 힘든 사람들이 더 살기 힘들어지는 일이 생긴다. 비주류는 계속 힘든 삶속에서도 남의 일 해결해주느라 더 바빠진다. 0.1%의 부자들에게나 해당하는 종부세같은 것이 나라를 망치는 세금폭탄이라면서 피켓들고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빈민에 가까운 사람도 많다. 이들은 보수라는 집단에 자신이 속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 것이다. 보수는 물론 민주 진영에서도 같은 일은 반복된다. 다수파가 혹은 주류층이 소수파나 비주류를 착취하는 일은 어디에나 흔하다. 사람들은 천사가 아니다. 대개 이권문제가 나오면 집단적으로는 정말 무섭게 이기적이 되는 것이 인간이기도 하다. 두 집단만 있어도 이런 일이 생기는데 수십집단이 존재하면 과연 거기에서 정의와 공평이 실현될까? 

 

때문에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정말 모두를 위한 진보는 가능한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우선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뭉쳐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엉터리 질서도 완전한 무질서보다는 낫다. 그리고 우리가 두번째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사람들을 뭉치게 하는 것은 이익이 아니라 희생과 가치라는 것이다. 더 나은 사회가 사람들 각각의 이익이 증가하는 사회라고 생각하고 그 이익을 각각 증대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오히려 가르기 시작하면 그 결과는 대개 엉망이 된다. 진보진영이 정체성 정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때문이다. 

 

비판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개혁은 깊은 고민끝에 작은 범위에 힘을 모아야 조금씩 일어나는 것이다. 한국 남자는 나쁘다는 식의 비판으로 세상이 좋아지지는 않는다. 그건 한국의 절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여자는 다 괜찮다는 말인가? 이런 말은 아무 의미가 없다. 만약 한국이 한 사람의 마약왕때문에 마약에 빠져들고 있다면 그 마약왕을 체포하고 처벌하는 것은 시급한 일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낮은 출산률은 젊은 세대의 정신이 썩어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아무 쓸데가 없다. 한 세대의 사람을 통째로 비판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건 마치 3백년전의 조선시대 남자들이 정신이 썩어서 여성차별을 했다는 식의 인식과 같다. 다수의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환경이 만들어 내는 것이고 젊은 세대의 환경이란 기성세대를 포함하는 것이니 누가 누구를 비판할 수 있겠는가. 한국 남자가 썩었다면 그건 한국 여자 탓이고 한국 여자가 썩었다면 그건 한국 남자탓이다. 

 

진보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그래서 소수의 악을 비판하고, 꼭 필요한 개혁에 집중하는 일이며 그와 함께 도덕적, 문화적 운동을 벌이는 일이다. 진보주의자는 보편적인 이야기하기 좋아하고, 비판하기 좋아하고, 법률이나 규칙만들기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초월해야 한다. 쓸데없이 이것저것 바꿔보고 안되면 말지라는 식으로 하지도 말아야 하고, 특히 시스템을 더 복잡한 것으로 만드는 노력을 중단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특히 한국 진보에서 매우 부족한 것이다. 모두를 위한 진보는 상호존중과 자치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이 상호존중과 자치 정신은 그것들의 기반이 되어주는 형이상학적 인식에 의해서 발생한다. 그런데 한국의 진보는 이 부분에 있어서 거의 완벽한 공백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 사회적 정의를 위해 흥분하는 자칭 진보주의자들의 대부분은 이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다. 그들은 그래서 어떤 의미로 지독한 물질주의자처럼 보인다. 불행의 원인은 그냥 가난이다. 저 불공정하게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것이 정의라는 개념에서 그들은 한발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인간은 동물이므로 최소한의 것이 없이 행복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에서는 진보가 그정도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그 한걸음이 어떤 것인가를 말하기 위해 예를 하나 들어보자. 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를 존중하고 자치정신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 우리가 서로를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구도자로 파악할 때 가능하다고 믿는다. 즉 우리는 이런 새로운 인간상이 필요한 것이다. 구도자라고 하면 좀 종교적인 느낌이 들지만 나는 이 이상 좋은 것을 알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 인간을 그저 쾌락을 추구하는 소비자쯤으로 파악하면서 산다. 그러니까 인간의 삶의 의미는 더 비싼 옷을 입고 더 비싼 차를 타고 더 유명해지고 더 많은 쾌락을 누리는 것쯤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초를 가지고는 21세기의 한국, 이제는 부유한 나라중의 하나가 된 한국에서 진보는 힘이 없다. 이래서는 아직도 소고기국에 쌀밥먹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차이가 없다. 

 

진보는 이제 적어도 인간을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고, 진리를 추구한다는 구도인정도로는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답해야 한다. 왜 우리는 서로에게 희망을 가지고 존중하게 되는가? 그 답은 우리가 모두 노력하는 구도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비이성적으로 탐욕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더 나은 존재가 되기위해, 자신의 한계를 자신의 입장에서 돌파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서로 달라도 우리는 서로를 존중해 줘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비로소 하나의 집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부도 농부도 남자도 여자도 노동자도 자본가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가치는 그런 게 아니다. 우리 삶의 가치는 우리가 구도자라는 것에서 나온다. 돈을 많이 벌거나 유명해 지는 것은 즐겁고 유쾌한 경험일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인생의 최종 목표일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런 상태에 갇혀서 썩어가는 인간을 우리는 불행한 인간, 인생에 실패하고 있는 인간으로 말해야 한다. 왜냐면 그런 사람은 이미 구도를 멈춘 존재로 죽은 거나 다름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기초의 재점검이 없이 21세기에서 사회적 정의와 진보를 논하는 것은 백해 무익한 일이다. 한달에 천만원을 버는 사람도 한달에 1억을 벌고 싶다. 누군가에게는 집에서 가사일 하면서 사는게 사회적 억압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행복한 은퇴일 수 있다. 어떤 객관적인 수치로 인간조건을 파악하고 평등과 행복을 논해봐야 우리는 그것에 도달하지 못한다. 행복하지 못한데 무슨 진보이겠는가. 그냥 챗바퀴처럼 돌고 돌 뿐이다. 

 

우리는 이제 해방이후의 극빈속에서, 최소한의 상식과 인권도 지켜지지 않는 독재속에서 벗어났다. 한국이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인간상이 필요하다. 그것은 새롭지만 또한 수도하며 사는 선비의 전통이 있는 한국인들에게는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그런 깊이 없이 우리는 모두를 위한 진보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며 그저 서로를 비판하고 서로를 자신의 불행의 이유로 삼는 일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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