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7
경쟁이 심한 곳에서 공정논란은 커진다. 조기 축구회의 축구경기에서 일어난 판정에 대해서는 사회적 논란이 별로 없지만 엄청난 돈과 명예가 걸린 월드컵 본선 경기라면 판정논란은 국가적 분쟁까지 가져올 수 있다. 요즘에는 취업비리 이야기가 많은데 그 만큼 취업이 어렵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거기에서 벌어지는 불공정에 대해 사람들이 많이 분노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정말 남부럽지 않게 경쟁이 심하며 그런데 그것이 세대에 따라 빠르게 바뀌어 가고 있는 분야가 있다. 바로 자식 경쟁이다. 사실 한국에서 취업과 입시에 관련해서 공정 시비가 종종 사회적으로 파문을 일으키는 큰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자식이 입시와 취업에서 차별을 받았다고 하면 자식 이상으로 흥분하는 것이 부모들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노인 세대에게 있어서 자식을 잘 키웠다는 것은 제대로 된 인간임을 보여주는 증거중에서도 가장 상위에 있는 것 중의 하나였다. 자신이 재벌이라도 자식이 서울대를 다니는 청소부를 부러워 할 수 있는 것이 적어도 한국 노인 세대의 정서였으며 자식을 가지고 경쟁하는 이러한 분위기는 한국 발전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부모가 가정부를 해서라도 자식의 등록금을 마련하려고 하는 나라, 자식의 공부한다고 하면 모든 집안일에서 면제해 주는 나라가 세상에는 생각보다 별로 없다. 이 교육열이 고학력 한국을 만들었고 양질의 노동자가 오늘의 한국을 만든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럴까? 왜 한국 사람들은 그토록 자식을 가지고 비교하고 경쟁하는 것일까? 중대한 이유중의 하나는 적어도 과거에는 자식이 자신의 노후를 책임질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3-40년전에는 자식이 노후대비인 것이 너무 명백했다. 그러니까 제대로된 자식이 없는 사람은 미래가 없는 것이다. 세상에는 멍청한 장남이 집안을 모두 말아먹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돌아다녔다. 그러니 지금 괜찮게 살더라도 자식이 없거나 자식이 무능력한 경우에는 미래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모이면 자식이야기를 많이 하고 흔히 좀 똑똑하게 사는 아들이 있으면 그 사람은 다른 무엇보다도 부러움을 샀다. 벤츠를 타건 빌딩이 있건 명문대 합격한 아들을 가진 사람이 더 당당한 세대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지금의 중년세대인 베이비붐 세대를 거치고 젊은 세대로 올수록 약해진다. 물론 지금도 한국인은 자식 자랑에 몰두한다. 노인정에서는 절대 자식 자랑 못하게 되어 있는 곳도 있고 중년의 여성들 모임에서도 자식 자랑은 금기시 되어 있는 곳이 있다. 그만큼 자식 자랑이 하고 싶고 부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젊은 세대로 오면 올 수록 개인주의적이라 부모는 부모고 나는 나라고 생각하며 자식이 자신의 노후를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노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식이 뛰어나서 잘 사는 것과 나의 의미, 나의 가치는 별개라고 생각한다.
이런 추세를 보았을 때 나는 머지 않아 한국의 뜨거운 교육렬이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애초에 아이를 낳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요즘 젊은이들이지만 낳아도 그 아이를 가지고 서로 경쟁할 것같지는 않다. 정도 문제겠지만 과거나 요즘처럼 필사적인 경우는 점점 줄어들어가지 않을까? 사실 세상에는 자식이 못나서 망한 집의 이야기도 많지만 대단한 자식들이 있어도 부모는 불쌍하게 살더라는 이야기도 많다. 공부 많이 해서 부모를 떠나 미국에서 사는 자식 이야기나 자식은 이사고 의사고 교수지만 부모를 찾아오는 일은 거의 없고 언제나 가정부 부리듯 부리기만 한다는 이야기도 세상에는 많다. 사실 집 사주고 손자봐주고 김치 반찬 만들어 가져다 주는 것이 지금 노인 세대의 정서라면 그걸 받으며 아이를 키운 베이붐 세대의 사람들은 그런 걸 별로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해줄 분위기가 아니다. 가문의 관행과 정서가 끊어졌다면 노인세대는 그야말로 의미없는 봉사를 하는 셈이다.
이러한 노인 세대를 보면서 요즘의 젊은이들은 어리석다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나는 나이지 자식이 내가 아니고 가문 따위는 21세기에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이다. 사실 가문의 이념은 여성 차별의 큰 원인이기도 하지 않은가. 아직도 아들에게 재산을 대부분 물려주고 딸은 출가외인이라고 말하는 노인들은 많다. 가문이나 자식에게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찾는 노인들을 비판할 이유는 많다.
하지만 젊은 세대는 그렇다면 어떤 대안적 가치를 가지고 사는가? 자식을 키우는 일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이 어리석기만 하다면 요즘 젊은이들은 그보다 훨씬 설득력있고 고상한 인생의 목표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그냥 더 유명해지고 더 자극적인 사치를 누리고 더 부자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가? 부모가 자식을 키우고 자식이 부모를 부양하는 세대가 어리석다면서 자기 자신만 잘먹고 잘사는 것, 나 죽고나면 인류가 멸망하든 나라가 망하든 내 알바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 고작이라면 과연 비판의 자격이 있을까. 나는 가문주의를 옹호하고 요즘의 젊은이들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문제는 노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대책없는 얇팍한 개인주의가 대안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인생의 의미, 삶의 목표, 내가 정말 살고 싶은 삶에 대해 깊은 고민도 없는 개인주의라면 그건 발전이 아니라 사람이 개돼지로 타락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말했듯이 공정논란은 우리가 뜨겁게 경쟁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공정논란이 시끄러운 곳을 보면 우리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는 면이 있다. 예를 들어 부동산에 관련한 논란이 큰 것은 한국인들이 그만큼 부동산이야 말로 재산을 지키고 증식시키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불륜 논란이 뜨거운 것은 한국에서는 가정이라는 테두리를 지키는 것이 개인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그럴 수 있는 것들이다. 문제는 별로 시끄럽지 않고 절박하지도 않은 것이 오히려 문제다. 노인세대들은 자식을 잘 키우고 싶어했다. 그런데 잘 키운다는 것이 뭐였을까? 명문대만 합격하면 어떤 패륜적 행동을 해도 그 자식은 훌룡한 자식이라고 지속적으로 말하는 것이 훌룡한 교육일까? 옆집 아이가 매우 이기적이라도 전교 1등하는 자식이라면 너도 좀 보고 배우라고 말하는 것이 노인 세대의 흔한 교육 아니었던가? 이렇게 키우지 않는 것은 배부른 소리인가? 그게 그렇지 않다는 증거는 세상에 많다. 인성이나 행복은 둘째 치고 명문대면 다 좋은줄 알았는데 세상이 바뀌어 명문대 졸업생도 취업이 힘든 세상이 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세상에 귤이 귀하다고 하니까 귤만 찾다가 망한 것이다.
한국인들은 이제 충분히 부유해서 서로를 도울 마음만 좀 있으면 굶어죽거나 추워죽지는 않을 정도는 된다. 공원이나 도서관같은 사회적 인프라도 발달하여 돈없이도 삶의 질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굶어죽지 않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는 나라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 아무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는 절박하지 않은 것같다. 많은 사람에게 이 질문은 이미 답이 나온 질문이다. 어떻게는 어떻게인가 돈 많이 벌어서 멋진 집을 사고 멋진 차를 사기 위해 살아야지 말이다. 이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배부르고 한가한 생각일까? 당장 코앞의 경쟁과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모르는 사람의 생각일까? 혹시 이것도 지금 당장 귤이 귀하다고 하니까 귤만 찾는 행동이 아닐까? 그러다가 망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새로운 세상을 사는 데 필요한 것들은 무엇일까. 현금? 부동산? 학벌? 사람들은 이에 대해 나름대로의 이론이 있을 것이며 그 이론들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이론을 믿으면 그 분야는 치열해지고 공정논란이 생겨나 타툼이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너무 빨리 어떤 이론을 맹신하고 거기에 몰입하면 주식에 온 재산 투자했다가 망한 사람처럼 될 수도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한가한 사람의 것이 아닌 이유는 이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에게 공정해야 한다. 너무 좁은 시야로 살면 훗날 뒤를 돌아봤을 때 우리 자신이 우리에게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이것도 못하면 죽어야 한다고, 죽을 수 밖에 없다고 마구 과장해서 자기를 몰아댔지만 지나고 나면 그게 그정도는 아니었고 그렇게 과장한 결과 오히려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기도 하기 때문이다. 왜 그랬는지를 이해한다고 해도 그건 결국 공정한 짓은 아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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