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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by 격암(강국진) 2023. 2. 18.

23.2.18

낭만은 로망(roman)이라는 프랑스 단어를 일본사람들이 음차해서 쓴 것으로 본래 18세기에는 대중적 소설을 의미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그리스 로마 시대를 이상적인 시대로 여겼던 유럽의 풍토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역사가 있는 탓으로 낭만이라고 하면 흔히 서구적인 이미지가 따라붙는다. 즉 낭만적 카페란 한국 사람들이 유럽적인 풍경이라고 생각하는 장식을 가진 커피숍을 주로 말하는 식이다. 낭만은 또한 흔히 남녀간의 애정에 대한 것으로 말해진다. 로맨스가 연애이다보니 로맨틱하다는 말은 낭만적이라고 번역되지만 결국 이성에게 매력적인 행동을 할 때 흔히 사용되는 말이다.  

 

낭만이 무엇인가는 다른 많은 단어들처럼 대중의 인식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지 누군가가 이것이 낭만이다라고 독단적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그러니 이런게 대중의 인식이라면 이게 낭만이라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낭만주의라는 것에 낭만의 본질이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이를 생각할 때 동양에도 본래 낭만이 있었으며 낭만은 반드시 남녀간의 애정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점도 분명해 질 것이다. 

 

낭만주의는 18세기 유럽에서 그 이전에 성행했던 계몽주의에 반발한 사람들이 만들어 낸 예술적 철학적 흐름이다. 보편성을 강조했던 계몽주의에 비해 낭만주의는 개인의 개성을 강조했다. 그런데 개인의 개성을 강조한다던가 보편적이 아니라는 특징은 다시 말해서 이런게 낭만주의라고 정의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제는 낭만주의로 말했던 것이 오늘은 아닐 수 있고 서로 반대되는 주장이 모두 낭만주의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낭만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도 낭만주의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칸트 같은 사람은 전혀 낭만적이 아닌 것같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를 긍정하는 과정에서 낭만주의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때문에 낭만주의의 뿌리를 쓴 이사야 벌린은 낭만주의의 정의를 쓰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를 사는 사람도 모두 이 낭만주의의 자식이라고 이사야 벌린은 말하고 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의 이상과 꿈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을 멋진 인간이라고 여기는 것을 현대인들은 당연시 한다. 그런데 이게 바로 낭만주의의 유산이다. 낭만주의 이전에는 그런 게 없었다는 것이다. 그전에는 진리란 객관적으로 존재해서 옳은 것을 따르는 사람이 멋진 사람이고 틀린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저 어리석고 나쁜 사람일 뿐이었다고 한다. 물론 서양에서 그랬다는 뜻일 것이다.

 

 이토록 알쏭달쏭한 낭만주의라는 말을 이해하는 한가지 방식은 바로 이 정의를 쓰는 일이 불가능하다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서양사람과는 달리 동양사람들은 특히 한국 사람들은 정의를 쓰는 일이 불가능한 한가지 단어에 익숙하다. 그건 바로 도다. 도가 무엇인지는 정의가 되지 않는다. 도가의 시조로 여겨지는 노자의 도덕경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 바로 도라고 표현된 도는 영구불변의 도가 아니라는 도가도 비상도라는 말이다. 장자의 천도편에 나오는 수레바퀴를 깍는 노인도 책을 옛사람의 찌거기라고 말하면서 언어를 초월한 진리를 말하고 있다. 자기가 자기 기술을 가르쳐 보려고 했는데 그게 말로는 잘 안되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성현이 쓴 책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진리는 언제나 우리가 말하고 볼 수 있는 것을 초월한 곳에 존재한다는 것은 이렇게 동양문화권에서는 강조되어져 왔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의 반발로 나타난 것이며 계몽주의의 핵심은 뉴튼의 물리학이었다. 뉴튼의 물리학만큼 보편적이고 확실하게 객관적인 지식의 힘을 보여준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뉴튼의 물리학은 신비적인 미신들을 물리쳤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설명들이 있었지만 그 설명들은 하나씩 뉴튼 물리학이래 과학의 앞에서 검증당하거나 부정되었다. 그리고 명확히 말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졌다. 즉 보편적인 것이 거의 완전히 승리해 버린 것이다. 물론 지금이나 그때나 세상에는 여러가지 다른 주장들이 있었고 혼란이 있었지만 이 진리들은 존재하고 찾아질 수 있고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물론 이 진리들은 모두 객관적이고 보편적이었다. 즉 시간과 공간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모두 똑같이 진리인 것들이었다. 

 

보편이란 위대한 것이다. 지구위의 작은 동물에 불과한 인간이 우주의 역사를 말하고 수억광년바깥의 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인간이 보편적 지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인간이 우리가 아는 인간인 것은 보편의 힘을 가진 언어를 개발하고 그걸 문자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편의 힘에 눈이 멀면 우리는 자기를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는 고작 백년을 살고 아주 작은 공간속을 움직이는 하나의 유한한 개인일 뿐인데 무한한 보편으로 빠져들 때 우리 자신의 의미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만약 매일 같이 지구 위에서 교통 사고로 몇명이 죽는가만을 조사하고 있다면 홍콩에서 한명의 사람이 또 죽었다는 사실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길 것이다.  매일 국가예산에 가까운 돈만 생각한다면 자신의 수입 정도의 돈 따위는 무의미하게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문명화된 인간은 보편적 시각을 가진 덕분에 삶의 부조리도 느끼게 되었다. 한마디로 우리가 왜 사는지 모르게 된 것이다. 

 

결국 살자면 우리는 계몽주의를 부정하고 비판할 필요가 있었다. 그게 18세기의 낭만주의다. 그건 말하자면 어떤 보편적 단어들로 한명의 개인을 하나의 산이나 강을 묘사하고 그것이 전부라고 낙인찍는 행위가 그 사람과 그 산과 그 강을 죽인다고 항의하는 행위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그게 다가 아니라면 그럼 뭐라는 말인가? 뭐가 남았다는 말인가? 이런 질문들은 자연스럽지만 만약 이 질문에 대해 이것이 빠졌다고 구체적이고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언어로 말한다면 그 순간 우리는 제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아 그럼 그것만 포함하면 전부란 말이지 하고 말이다. 

 

뭐라고? 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여기서 우리는 앞의 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도라고 표현된 도는 영구불변의 도가 아니다. 도는 전부 말해 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낭만주의 예술가들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음악이나 미술로 뭔가를 표현하려고 했던 것은 노장사상의 큰 영향을 받은 선불교 같은 데에서 알쏭달쏭한 공안을 가지고 고민하고 참선하는 것과 이어지는 데가 있는 일이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진짜 중요한 것은 말로 전할 수 없다. 낭만은 흔히 사랑과 연결되어진다. 왜 그런가? 계산하고 이유를 알면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서 그렇다. 그런건 거래다. 그런데 사랑은 거래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니 낭만인 것이다. 논리와 지식과 언어를 초월해서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낭만이다. 운명도 낭만이다. 왜냐면 우리가 그 이유를 다 알지 못하면서도 일어나는 것이 운명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벌린은 온 세상이 반대해도 자신만의 길을 걷는 사람을 영웅으로 여기는 풍조는 바로 이 낭만주의가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온 세상이 반대하는 사랑에 자신의 생을 던지는 사람을 낭만적인 인간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문맥에서 말하자면 소위 안빈낙도의 길을 걷는 선비의 모습이야 말로 가장 낭만적인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난하고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지만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의 가치를 긍정하면서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이야 말로 낭만주의적 영웅이기 때문이다. 낭만을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낭만은 결코 서양의 문화가 아니며 어찌보면 동양에서 더 역사가 깊다고도 할 수 있다. 바이런만 낭만주의 시인이 아니다. 3세기와 4세기에 걸쳐서 살았던 중국의 은둔시인 도연명의 시를 읽어보면 이것이야 말로 낭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마을 안에 엮어 놓은 오두막집, 그래도 시끄러운 수레소리 들리지 않네/어떻게 하면 이렇게 되는가요? 마음이 멀면 사는 곳도 외진다오/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꺾어 드니 그윽이 보이는 남산(南山)/산기운이 석양에 아름답고 나는 새들도 무리지어 돌아가누나/ 가운데 있는 참뜻, 설명하려고 하나 이미 말을 잊었도다." (음주이십수중 5수, 도연명)

 

진짜 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일전에 구지 선사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구지 선사라는 옛 스님은 누가 무슨 질문을 하면 말없이 한 손가락을 들어 올려 보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도가 무엇입니까라던가 불성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면 한 손가락을 들어올려 말없이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걸 보고 어느 소년도 그걸 따라했다. 누가 질문을 하면 한 손가락을 들어 올려 답을 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본 구지 선사는 그 소년의 그 손가락을 잘라 버렸다. 아파 하는 소년에게 구지선사는 질문을 던졌는데 이제 손가락을 들어올리는 것이 버릇이 된 소년은 그 말에도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들어 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손가락이 없는 것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좀 끔직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이것도 생각해 보면 낭만적인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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