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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어떻게 살 것인가? 3

by 격암(강국진) 2023. 11. 17.

23.11.17

유튜브 추천 목록들을 보다 보니 문득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났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그 답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같다. 왜냐면 유튜브 추천 목록에 아주 자주 등장하는 질문들은 이렇게 하면 부자된다, 이렇게 하면 취직이 잘된다 같은 말들인데 그같은 것을 보다 보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말의 답은 뻔하다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긴 그냥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데 취직해서 돈을 잘 벌거나 재태크로 돈을 잘 벌기 위해서 살 것이다. 돈을 버는 일 이외의 것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은 비현실적인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현실적으로 뻔하다. 

 

뭐든지 돈이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더이상 돈 이외의 일은 생각하질 않는다. 그래서 철학따위를 고민하는 일은 드물고, 더구나 그것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개인적으로 던지는 일과 깊게 연관지어서 생각하는 일은 더욱 더 드물다. 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도 그것을 마치 과학이나 심리학같은 어떤 학문적 지식에 대한 호기심 정도로 접근하는 느낌이다.  대학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추구하고, 대학교수가 그걸 가르칠 수 있다는 생각도 이제는 옛말이 되고 말았다. 

 

이같은 것을 요즘의 청년들은 이해하기 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중년이나 노년의 사람들처럼 상황이 지금같지 않았던 시절을 살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런 차이가 느껴진다. 외식 산업이 발전하기 전에는 음식을 만든다는 것은 개인적인 행동에 더 가까웠다. 다시 말해 누군가를 위해 누군가가 개인적으로 하는 일이었다. 대표적으로 각 가정에서 식사를 준비하던 엄마가 만드는 것이 식사이며 그래서 엄마의 맛이라는 것이 보다 분명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외식이 흔해지면서 음식은 그냥 돈이 있으면 먹을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음식뿐만이 아니라 교육에서 놀이 그리고 주거와 의복에 이르기 까지 보다 가족내에서 자급자족의 형태로 이뤄지던 시절에는 산다는 것이 보다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행위처럼 느껴졌다. 이것은 친구나 애인이 손으로 써준 편지가 돌아다니던 시절의 일이다. 지금은 마치 흙을 손으로 만져보는 일이 없고, 땅을 발로 느끼며 걷는 일 없이 자동차같은 탈 것에 의지해서만 사람이 사는 느낌이다. 직접 만든 오두막은 자신의 자아발견의 도구가 된다. 거기에 내 개성이 들어나기 때문이다. 이건 뒤집어 말하면 기성품만 있는 세상에서는 사람들의 자아가 실종되기 쉽다는 뜻이다. 

 

상황이 지금과는 좀 달랐던 과거에는 청년들이 훨씬 더 많이 철학자의 책을 찾았다. 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삶이란 개인적인 선택에 달린 것이라는 점이 지금보다 훨씬 더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뭘 하든 문제는 돈이 부족하다는 것이 핵심이랄 것이 처음부터 분명하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고, 그 답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돈이 있어야 뭐든 할 테니 돈부터 벌자라고 생각하는 식이 되었달까. 물론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은 더더욱 그랬듯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일상에 익숙해 지면서 점점 잊혀지게 된다. 우리는 그냥 하던 일을 반복하면서 살게 되고 그러니까 요즘은 그냥 돈벌고 쓰는 일 이외의 것은 생각하지 않게 된다. 허둥지둥 전력을 다해 벌었으면 그걸로 해외 여행이라도 가고, 골프라도 치고, 비싼 한우 스테이크라도 먹을 일이다. 인생에 그 이외에 뭐가 있다는 말인가? 이같은 태도가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아내와 함께 간 커피숍에서 아내가 말한다. 오늘날 한국에서 출산률이 역사적으로 낮은 이유는 청년들이 자기 삶을 되돌아 보았을 때 행복한게 없어서 라는 사실이 핵심일 거라는 것이다. 즉 그들은 삶이나 행복이 뭔지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은 돈이다. 자신 만만하게 그런 답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들은 그런데 별로 행복하질 않다. 그러니 아이를 태어나게 해보아야 그 아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뻔한데 그게 별로 행복하지도 않을 테니 굳이 뭐하러 태어나게 만드냐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결국 유치원시절부터 입시공부로 바쁘게 경쟁에 시달리다가 그 경쟁을 20년 이상 해도 어디 취업 한번 하는게 어렵고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행복한 삶을 누릴 가능성이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인데 그걸 살아가는 아이나, 그걸 도와주어야 하는 부모나 모두 무가치한 일을 하고 있는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같은 결론은 인생을 자본주의 사회속의 경쟁으로만 보면 당연하다. 만약 인생이 각자 하나씩의 조각상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해보자. 경쟁은 없다. 우리는 깍고 다듬어서 인생이라고 부를 이 하나의 작품을 각자 만들게 되고, 그 안에는 각자의 개성이 깃들게 된다. 이럴 때 모두는 다 행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두가 다 자신의 조각품을 마음에 들어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경쟁에 이겨서 더 많은 돈을 버는 사람이 인생을 제대로 사는 거라면 어차피 아주 소수의 사람들 이외에는 경쟁에 이길 수 없다. 게다가 그 어렵다던 취업 경쟁이나 재태크 경쟁에서 승리하게 된 사람도 그곳에 도달하면 결국 경쟁에 진 사람들에게 잘난 체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서울대에 입학하면 거기있는 사람은 다 서울대 학생이고, 대기업에 입사하면 거기있는 사람들은 다 그런 사람이다. 10억이나 100억을  버는 일은 어렵지만 벌었다고 해도 그걸로 뭘하겠다는 생각이 애초에 없었는데 할거라고는 자랑질 밖에 더 있겠는가. 우리는 긴 경쟁에 이겨도 한가지 현실에 부딪히게 된다. 그것은 그간에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회피해 왔다는 사실이다. 아주 긴 길을 걸어서 최종 단계에 도달한 사람도 그게 겨우 출발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더글라스 애덤스의 고전 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에는 삶과 우주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의 답을 계산하는 컴퓨터가 나온다. 그리고 그 답은 42이다. 물론 사람들은 그 뜻을 알 수가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내가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한두줄에 걸쳐 쓰는 것은 42라는 답을 주는 컴퓨터의 행동을 반복하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하다. 우리는 그 질문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의 나무를 키워나가듯 각자는 각자의 답을 키워나가야 한다. 그것이 어쩌면 삶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의 답일 것이다. 

 

우리는 고금의 철학자나 성인에 따르면 그 답은 이미 이러저러하다고 나온 것이니 그런 걸 개인적으로 고민할 필요는 없다는 식이 되어서는 안된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기를 멈추는 순간은 어떤 의미로 살기를 멈추는 순간이다. 그럴 때 우리가 살아있다는 생각은 착각일 수 있다. 그걸 오랜동안 멈췄다가 어떤 계기로 그걸 다시 생각하게 된 사람이라면 아마도 자신이 자신의 시간을 모두 낭비해 버렸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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