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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단편소설들

제목 없는 이야기.

by 격암(강국진) 2023. 12. 12.

어느 지구를 닮은 행성에는 남자들과 여자들이 살고 있었다. 이 행성의 남자들은 모두 한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그건 여자들이 다리를 보여주면 머리가 멍해지고 무조건 여자들의 명령에 복종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행성의 여자들은 모두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니면서 남자들을 노예로 부리고 살았다. 

 

이런 현실을 보고 노예처럼 사는 남자들을 불쌍하게 여긴 현숙은 이 남자들을 각성시켜서 진정한 인간적 동지로 공존하면서 살 수는 없는걸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큰 결심을 하게 된다. 바로 남자 앞에서 다리를 가리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가장 먼저 그녀가 호감을 가지고 있는 명헌을 법원건물의 한 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자리에 앉게 한 후 가지고 간 천으로 다리를 가렸다. 

 

명헌은 잠시 당황하는 거 같았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명헌의 눈에는 힘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실 이런 현상을 보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미니스커트로 다리를 드러내고 다니는 것이 보통이기는 하지만 이따금 다리가 가려지는 일이 물론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훨씬 더 독립적이고 현명하게 행동하는 것같은 남자들의 가능성을 보면서 현숙은 저런 사람들이 이렇게 조종당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여기고는 했다. 그들도 여자들과 똑같은 인간인 것이다. 

 

명헌은 말했다. 

"내가 여기 왜 있는거지? 별 일이 없다면 가봐도 좋을까?"

 

현숙은 서둘러 말했다.

"아냐. 잠깐만. 할 말이 있어. 너는 남자들이 여자들의 다리때문에 조종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니?"

"물론 알고 있지. 남자들의 본능이 그런 걸. 타고난 본능이라고는 하지만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해. 삶에는 다리에 조종당하는 거 말고도 더 중요한 일이 있을텐데 다들 그러고 있으니까 말이지."

 

명헌의 대답은 현숙을 기쁘게 했다. 오랜 노예상태로 그다지 깊은 생각따위는 할 틈이 없었을 것같은데도 일단 다리의 주술에서 풀려나오자 마자 한 대답으로 생각해 보면 명헌의 대답은 매우 논리적이었고 그의 태도는 매우 기품있었다. 역시 남자의 진정한 가치는 아직 발현되고 있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난 여자지만 나도 그게 안타까워. 여자들이 남자들을 다리로 조종하는 걸 보고 있는 것은 때로 역겨운 생각이 들지. 남자들도 여자들처럼 인간인데도 그들은 마치 남자들이 타고난 노예이거나 하등한 종족쯤 되는 것처럼 그들을 다루거든. 나는 남자와 여자가 이성적으로 대화하고 동료로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진짜 멋진 세상이 아닐까하고 생각해."

 

"물론 그렇지. 문제가 모두 여자들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야. 남자들도 사실 의지를 발휘해면 다리의 힘에 조종당하는 것에 얼마간 저항할 수도 있거든. 아마 훈련의 문제일꺼야. 훈련을 많이 하면 여자들이 수백개의 다리를 보여준다고 해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가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지도 모르지.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정말 멋질거야. 물론 그런 세상은 너무나 멀지. 상상만 할뿐이지."

 

"하지만 그러려면 먼저 깨어있는 여자들이 먼저 남자들을 어느 정도 봐줘야겠지. 그들이 충분히 강해질 때까지는 유혹하지 않고 조종하지 않으려고 해야 할거야. 모든 여자들이 그렇게 하려고 하지는 않을테니까 말하자면 남자들의 해방을 위해서 남자들을 보호해주는 깨어있는 여성 동지가 필요할 거야. 그러면 그런 세상이 올지도 몰라."

명헌은 물끄러미 현숙을 바라보았다. 이 여자는 왜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 걸까. 이야기의 요점은 알겠지만 어느 여자가 남자들을 노예상태에서 해방시키겠다고 나서서 싸운다는 말인가? 사람이란 결국 가진 걸 포기하지 않기 마련이었다. 여자들이 이런 세상을 바꾸려고 할 리가 없었다. 

현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나는 거의 잊혀져 버린 과거의 법규를 부활시키려고 해. 그건 바로 결혼제도라는 거지."

"결혼?"

"그래.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고 서로 부부로 등록을 하면 다른 여자가 다리를 보여주면서 결혼한 남자를 조종하는 것을 불법으로 여기는 법이 있데."

"그런 법이 있어?" 명헌은 놀랐다. 

"그래. 역사적으로는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컴퓨터를 찾아보니 4백년전까지만 해도 결혼하는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구. 하지만 결혼하는 사람들이 사라지자 이 법이 작동할 일도 없어지고 그냥 잊혀져 버린 거지. 하지만 인공지능이 운영하는 사법 시스템 자체는 지금도 여전히 초기의 판례들을 존중하기 때문에 두 남녀가 결혼을 신청하고 부부관계를 선언하면 부부로 인정될거야. 그리고 나서 부부라는게 뭔지를 세상에 알리면 사람들은 깜짝 놀라겠지. 그런게 있는줄 몰랐으니까 말이야. 그들은 결혼한 유부남을 조종하려고 드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을 알고 놀라겠지. 하지만 또 새로운 커플들이 탄생할거야.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다리에 조종당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남자들이 나타나는 거지."

"일단 결혼이라는 걸 하게 되면 이 여자 저 여자가 다리로 나를 조종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한 여자에게만 귀속되는거야?"

"그렇게 말하면 그렇지. 부인이 남편에게 다리를 보여주는 것은 불법이 아니거든. 하지만 물론 깨어있는 여성이라면 할 수 있어도 다리로 남편을 조종하려고 들지는 않을거야. 어디까지나 이성적이고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걸 꿈꿀테지. 조종당하는 노예는 사실 멋지지 않아."

명헌은 대답을 하지 않고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문득 이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눈을 보면서 현숙도 명헌이 이 이야기의 요점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현숙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결정적인 말을 했다.

"나는 너와 결혼하고 싶어. 우리 결혼하자. 그리고 너는 이 여자 저 여자에게 휘둘리는 삶을 버리고 사는 거야. 내가 구원해 줄께. 너는 그렇게 살 수 있어. 여기서 나가서 복도의 다른 끝쪽에 있는 데이터 입력실에 가서 결혼 등록을 하는 거야. 그리고 나면 너는 여자들로부터 자유로워 지는 거지."

명헌은 과연 현숙의 이야기가 일 리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여자들은 변덕이 심했고, 좋은 여자들도 있지만 나쁜 여자들이 훨씬 더 많아서 남자로 사는 일은 힘이 겨운 일이었다. 지난 주만 해도 길가던 여자에게 붙들려서는 그 집에 끌려가서 온종일 노동하고 봉사하느라고 온 몸이 아플 지경이었는데도 그는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듣지 못했다. 관심이 떨어지자 그녀는 마치 길바닥에 개를 버리듯 그에게 거리로 나가라고 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옷을 입을 시간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그런 취급을 받으면서 사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을 수는 없었다. 그는 사실 아직도 그 일로 마음에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래서 일 것이다. 명헌은 현숙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좋아. 우리 결혼하자. 네가 그런 제안을 해줘서 기뻐."

명헌은 현숙의 눈에서 기쁨이 터져나오는 것을 보았다. 현숙으로서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둘은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이제 복도의 반대편 끝에 있는 데이터 입력실에 가기만 하면 명헌은 법으로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거리는 겨우 25미터였다. 

둘은 손을 잡고 데이터 실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데이터 실앞에 도착했을 때 명헌은 그녀의 손을 놓고 그녀에게 말했다. 

"넌 다리로 나를 조종하지 않을 거지?"

"그래."

"그럼. 이 결혼이라는 것도 다리를 써서 하게 하는 건 아니지?"

"물론 그렇지. 너는 다리때문에 결혼하는게 아니라 다리에서 벗어나려고 결혼하는거야."

명헌은 현숙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책없는 이상주의자의 얼굴이었다. 

"잠시 잠깐 꿈을 꾸게 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난 너랑 결혼하지 않겠어."

현숙은 충격을 받았다. 명헌은 현숙이 얼마나 대단한 희생을 하려고 하는지 전혀 이해를 하고 있지 못했다. 

"뭐야. 너는 미쳤어! 그럼 이렇게 여자들에게 이용당하며 사는게 좋단 말이야?"

"아. 물론 나도 남자들을 괴롭히는 여자들이 지긋지긋하기는 해. 그래서 결혼이란걸 할까 하고 잠깐 생각했던거고."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그 결혼이란 걸 한다손 쳐도 이런 식으로는 의미가 없겠더라고. 결국 이건 내가 너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거지. 네가 너의 다리로 나를 조종하지 않을거라는 믿음. 그게 전부지. 사실 너도 언젠가 마음이 바뀌면 다리를 써서 나를 노예취급하는게 언제든지 가능하니까. 

말했듯이 남자도 다리의 유혹에 저항할 수 있어. 그러니까 다리를 보는 것을 즐기면서도 다리에 조종당하지 않은 것도 가능해. 먼저 그렇게 되야해. 그리고 나서 결정할 문제지. 결혼을 할까 말까. 하면 누구랑 할까 하는 거 말이야."

현숙은 자신이 대단한 희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이 거부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게 이유의 전부야?"

명헌은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유는 또 있어. "

"그게 뭔데?"

"난 사실 여자들 다리가 좋거든."

명헌은 등을 돌리고 법원 복도의 반대편을 향해 걸었다. 아마도 그를 독점하고 싶었던 현숙은 지금쯤이면 그녀의 다리를 노출시키고 다시 명헌을 조종하려고 들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기 전에 어느 쪽으든 빠져 나가서 숨거나 다른 여자의 다리를 먼저 보고 싶었다. 명헌은 뒤에서 들리는 알 수 없는 소리를 뒤로 하고 앞으로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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