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객관적 세계가 필요하다. 그건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의 타인이 없어도 그렇다. 왜냐면 나는 여전히 10분전 혹은 어제의 나와 소통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 눈에 보이고 내 손에 느껴지는 이 세계가 일관성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것을 믿을 필요가 있다. 그것없이는 매 순간 순간의 세계는 서로 연결되지 않을 것이고 나는 아무 것도 인식하거나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조금의 질서와 일관성도 보이지 않는 혼돈스런 물의 흐름을 보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실제로는 물의 물리적 특성때문에 그런 물도 완벽히 혼돈스럽지 않지만 우리는 혼돈스런 물을 보고 뭘 생각할 수가 없고 뭘 이름붙일 수가 없다. 그것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뭔가가 존재한다고 느낀다고 해도 그 뭔가가 뭔지를 느끼거나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래서 타인의 존재는 중요하다. 즉 나는 타인에게 의지하고 타인과 함께 해야 살 수 있다. 부모와 자식간에 소통이 불가능하다면 인간은 순식간에 멸종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필요한 것은 부모뿐만이 아니며 인간은 절대 고독속에서 살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언어가 필요하고 그걸 소통하면서 다시 한번 객관적 세계라는 것이 필요해지게 된다. 즉 지금의 나와 어제의 나가 공통으로 느끼는 세계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나와 타인이 모두 공통으로 느끼는 세계가 필요하며 그 세계의 존재는 우리의 의식과 사고 그리고 언어의 기초속에서 전제 될 수 밖에 없다. 내가 사과를 보고 느끼는 색깔에 대한 느낌은 나만의 것이며 결코 타인과 완전히 공유할 수 없는 것이지만 나는 사과색깔은 나와 타인에게 모두 같은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해야 말을 하고 소통할 수 있다. 만약 내가 보고 느끼는 세계가 타인이 보고 느끼는 세계와 하나도 관련이 없는 것으로 그저 각자의 정신이 만들어낸 별개의 환상같은 것이라면 나는 당연히 타인과 소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대개 미친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해서 시간적 공간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객관적이라는 세계는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의 과제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사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세계는 흔들린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이 세계는 결코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는 객관적 세계처럼 가만히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우리가 양이라는 단어를 써서 모든 양들을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지만 모든 양들이 서로 다르듯이 우리가 객관적 세계상으로 파악하는 이 세계는 우리의 개인적 순간적 느낌과는 차이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이 세계는 왜 흔들리는가? 우리는 이미 세계를 객관적 실체로 인정했기 때문에 그 흔들림의 원인을 세계에서 찾을 수가 없다. 우리가 객관성을 전제하고 만들어낸 세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객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를 이 흔들림의 답으로 만들어 낸다. 아침에 눈을 떠서 고개를 돌리면 우리는 세계가 빙글하고 돌아가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이 세계가 왜 돌아갈까? 우리는 그 답을 모르고 따라서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답을 낸다. 그건 바로 나라는 존재가 고개를 돌렸다는 것이다. 즉 움직인 것은 세계가 아니다. 나다. 내가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내 몸을 움직였기 때문에 세상은 돌아간 것이다.
결국 우리는 객관적 세계를 만들어 내면서 동시에 자아를 창조한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 우리가 말하는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객관적인 것이다. 객관적이지 않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객관성은 존재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그런데도 세상은 분명 그 자체만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이유없이 그 세계는 흔들린다. 우리는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그 답이 바로 나이고 나의 자아인 것이다. 세계가 흔드리는 것이 아니다. 흔들리고 있는 것은 그 세계를 느끼는 나다.
흔들리는 것이 혼란이고 악이라면 그래서 나는 악의 원인이 된다. 그건 마치 한 병에 천원하는 병우유가 있는데 그 가격이 흔들려서 2천원도 하고 만원도 하는 모습을 보는 것같다. 사람들이 이건 양이라는데 그건 알고 보면 개인 것같다. 사물에는 본래 정해진 가치와 따라야 할 질서가 있는데 왜 그런 엉터리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왜 세상은 진리와 동떨어지게 움직이는가. 그것은 내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내가 악에게 유혹되었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질서와 규칙대로 움직여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 원인은 나에게 있다. 우리에게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질서를 지키기 위해 우리 자신을 최대한 억눌러야 한다. 그럴 때 이 세계는 이 세계 전체를 지배하는 절대질서 혹은 객관적 질서에 따라 제대로 돌아갈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믿는다.
이 이야기는 많은 것을 의미한다. 우선 우리는 자아의 탄생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이 세계를 본능적 질서에 따라서 살아가는 짐승들은 자아라는 것이 없거나 거의 없을 것이다. 그 결과중의 하나가 그들은 바로 인간처럼 거대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거대한 사회집단은 그만큼이나 거대한 객관적 세계의 존재를 의미한다. 그렇지 않을 때 사회는 분열되고 싸움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는 서로 소통가능한 작은 규모로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제한된 기억력과 판단력을 가지고 인간의 입장에서 보기에 일관성도 존재하지 않는 삶을 사는 동물들은 세계가 흔들린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거대한 세계를 또렷하게 인식하는 객관적 사고는 그 강력한 힘만큼이나 부작용도 크다. 즉 규칙은 분명한데 그 규칙이 지켜지지 않는 상황들을 만들어 낸다.
착한 일을 하면 칭찬을 받는 것이 사회적 규칙이라고만 알고 있는 아이는 부자집 아이나 유달리 예쁜 아이가 왜 똑같은 행동을 했는데도 자신과는 다른 결과가 있는 것인지를 이해할 수 없다. 결국 그 이유는 나에게 있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이런 생각은 현실세계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때로 나는 예쁘지 못하고, 재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만이 세계의 흔들림에 대한 설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뒤집어 말하면 모든 것이 본래 그래야만할 대로 움직이는 상황에 있는 사람은 자기라는 존재를 느낄 이유가 없다. 매끼니 마다 밥이 주어지는 것은 그냥 밥은 나오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는 것은 그냥 나는 그래야 하는 사람이고 그러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이 밥이 누구의 사랑과 희생때문에 생겨나는 것인지, 내가 학교에 가는 것이 어째서 가능한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그저 본래 그래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본래 그래야하는 대로 굴러가는 인간에게 자아는 있을 필요가 없다.
객관적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또한 이 객관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아주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다. 물론 하나의 사회속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의 객관적 세계상을 공유하기에 공존할 수 있다고 나는 이미 말했지만 진실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사람들은 실제로는 각자의 작은 굴, 작은 계곡에서 산다. 자신의 작은 세계를 객관적이고 상식적이라고 여기면서 각자가 가지는 무지의 벽 너머는 쳐다보지 않고 사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이는 아이의 세계에 살고, 엄마는 엄마의 세계에 살며, 남편은 남편의 세계에 산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입장과 인생을 가진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지만 큰 관심도 없고 그걸 알아차릴만큼의 능력도 없다. 매일아침 우리집에 우유가 배달된다면 난 돈을 내면 우유가 배달온다는 것만을 알지 그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에게도 인생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고민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것들 즉 내가 무지의 벽이라고 여기던 것을 넘어설 때, 즉 우리가 그것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할 때 우리의 객관적 세계상은 확대되게 된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선과 악은 뒤집어 질 수 있다. 원인과 결과는 뒤집어 지게 된다. 다른 무엇보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생각이 달라지게 된다. 소위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사람을 갑자기 확 미친 것처럼 바꿀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객관적 세계에 대한 다른 묘사를 들을 때 그 세계는 특정한 형태로 확대되고 세상이 다르게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럴 수록 이데올로기 보다 메타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는 이 객관적 세계와 자아의 관계, 무지의 벽이 가지는 의미를 되새기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는 모두 유한한 인간이므로 절대적인 의미에서 공평하고 올바른 정신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비록 지금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떤 무지의 벽이 존재해서 세상을 이렇게 보이게 만들고 스스로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가지게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때 우리는 자신과 타인에 대해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과학이라는 객관적 세계에 대한 강력한 이론을 가지고 있다. 일찌기 양자역학을 만드는데 기여한 어윈 슈뢰딩거는 그러나 이 객관적 세계의 한계를 말하며 과학은 가장 기초적인 것에서 새로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말이다. 그런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문제점을 기억하고 느끼는 것이 필요하다고 그는 지적한다.
이 세계는 흔들린다. 그리고 그만큼 자아는 깨어난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잠자는 것처럼 자아가 없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를 한껏 자세히 보고 자아를 민감하게 명료하게 인식하는 것이 필요한 것일까? 우리의 자아는 잠들어야 하는가, 깨어나야 하는가? 나의 답은 이것이다. 둘 다 아니다. 흔들리고 있는 세계는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깨어난 자아도 사실은 그 세계라는 우물속의 유령이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그 세계가 하나의 꿈이라는 것을 알 때 더 큰 자아가 깨어날 것이다. 그렇게 꿈에서 진짜로 깨고 나면 이전에 생생하게 느꼈던 그 자아가 사실은 꿈속의 자아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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