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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이해하기

세상의 내적인 변화

by 격암(강국진) 2023. 12. 19.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 대해서 지나치게 단순한 견해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결과 미래의 세상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주로 내적인 변화보다는 외적인 변화에 주목하는 것같다. 그러나 이것은 큰 착각이고 특히 요즘처럼 기술발전이 빠른 세상에서는 더욱 더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흔히 인간은 오감을 통해서 세상을 느낀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일 수 없다. 왜냐면 적어도 현대인들은 수없이 많은 도구와 인위적 개념을 통해서 세상을 느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티비를 보면서 우리는 화면안에 있는 수많은 점들의 깜박임을 본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가 뭔가를 직접 보는 것 같은 환각을 주고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편의상 그냥 세계를 그냥 보는 것과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미묘한 차이같지만 정성적으로 말하면 누군가가 편지를 나에게 썼는데 그걸 읽으면서 나는 그걸 그 사람과 직접 대화하는 것과 같다고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차이를 완전히 무시하는 사람은 스타워즈같은 SF 영화속의 장면들도 현실이라고 여겨야 한다. 

 

돈이나 황금은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우리가 그것이 시장교환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지적 판단이 없는 바이러스나 개미에게 돈이나 황금의 가치는 인간이 느끼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즉 우리는 세상을 오감의 감각으로 느끼는 이상으로 우리의 기억과 개념을 통해서 느끼고 있다. 도색잡지의 사진은 현실이 아니다. 즉 우리는 사진은 사진일 뿐 거기에는 여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남자들의 생각은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 결과를 만들어 낸다. 

 

물론 이같은 지적에 놀라울 것은 없다. 우리는 이미 이같은 사실들 너머에 놀라운 것이 없다고 교육받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 사이비종교나 특이한 이데올로기에 빠진 사람들이 미친 것같은 행동을 할 때 우리는 당황하지만 우리는 정상인이라면 '현실'이라던가 '객관적 세계'가 뭔지를 알고 있으며 그걸 모두가 공유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 믿음에 따르면 이 현실은 우리 개인들과는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우리는 그걸 단지 느낄 뿐이다. 현실이라고 믿었던 뭔가가 실은 우리 머릿속에 있는 무언가나, 우리가 쓰고 있는 도구때문에 만들어 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칸트같은 철학자도 우리가 객관적 현실을 공유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언어를 비롯한 문명적 도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국이나 미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충성과 믿음을 국가같은 것이 생기기 전의 수렵채집인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국가를 위해 기꺼이 죽는 사람들이나 손흥민같은 한국인 프로축구 축구 선수가 외국에서 골을 넣으면 흥분하여 기뻐하는 사람들이  '객관적 현실을 보고 행동하는 사람'으로 보일까. 사실 그들에게는 프로 스포츠란 개념 자체가 이해가 되질 않을 것이다. 서울대니 지잡대니 하는 학벌이나 무슨 회사에서의 직위따위 때문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은 어떤가. 연구소에서 무한히 추상적인 생각속에서 빠져서 살고 있는 학자들은 선사시대의 수렵채집인에게는 어떻게 보일까. 수천년전에 그들의 조상이 한자를 만들어서 자부심을 느낀다는 중국인이나 수천년전에 우리 조상이 여기 살았으니 여기는 우리땅이라는 유태인들이 어떻게 보일까. 

 

현대인들이 말하는 객관적 현실이란 오감의 감각신호를 기반으로 파악되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무한히 추상적인 개념들과 기억들로 만들어진 거대한 정보의 건축물들이다. 그리고 그 건축물들은 단순히 인간이 타고난 육체에만 의존하고 있지 않으며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도구들에 의존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발명은 문자이지만 과학과 종교, 예술은 물론 인터넷과 스마트폰같은 기계도 여기에 속한다. 예를 들어 전세계가 실시간으로 연결되고 사진들이 무한히 많이 만들어지는 요즘 프랑스나 스위스나 남극이 한국인에게  주는 의미는 백년전과는 같을 수가 없다.

 

도구가 있는 사람에게 온도란 온도계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숫자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가치가 가격이란 의미가 될 때 10억짜리 아파트는 10억짜리 가치를 가질 뿐이다. 즉 우리가 실제로 그 아파트를 보고 느끼는 것과는 거의 상관이 없다. 부유한 나라란 GDP가 큰 나라를 말한다. 공평하다는 것은 우리가 측정할 수 있는 어떤 수치가 모든 사람들에게 같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돈이나 성적등 숫자로 측정가능한 것이 강조되는 이유는 우리가 그만큼 우리가 직접 느끼는 오감의 감각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어떤 도구로 측정된 숫자에 의해서 세상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맛집의 음식을 먹어도 그것이 '만명에게 좋아요를 받은 음식이다'라는 사실에 휘둘린다. 미미한 개인적 내 느낌이 '객관적 현실'과 다르다면 그것은 내가 잘못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뉴튼의 고전역학은 혁명적이었다. 왜냐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체계들을 모두 능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의 많은 신화는 '객관적 현실'이 아니며 환각이거나 문학적 표현이었던 것이 되었다.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종교를 믿는다고 해도 더이상 천국이 말 그대로 하늘위에 있고, 지옥이 말그대로 땅밑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대부분은 말이다. 이 역시 도구과 개념의 힘이다. 망원경이나 현미경 그리고 미적분은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도구들이었다. 

 

우리는 이 모든 사실에 익숙하다. 우리는 과거의 언젠가는 그러니까 불과 백년전만 해도 사람들이 현실을 보지 못하고 환각과 미신에 빠져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기술들이 이전 어느 시대보다도 빨리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이 '단단한 현실'은 객관적이며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백년후의 사람들은 그저 날아다니는 차를 타고 다니며, 로봇 노예를 부리면서 살고 있을 뿐 현대인과 내적으로는 거의 차이가 없을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현재와 미래의 핵심적 차이는 물질이라고 생각한다. 불과 30년전의 사람들만 해도 프로 게이머나 유튜버라는 개념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텐데 말이다. 

 

한국에서는 200년전에는 봉건제도가 당연했다. 그리고 지금은 공화국이 당연하다는듯이 존재한다. 그런데 만약 세상의 변화속도가 과거보다 10배쯤 빠르다면 20년뒤에도 정말 공화국제도가 이대로 있을까? 백년전에는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 20년뒤에도 한국은 독립국일까? 50년전에는 한국은 지극히 가난하고 군사구데타로 정권을 잡는 일이 반복되는 나라였다. 20년뒤에도 한국은 이대로 일까? 

 

우리는 세상이 변하지 않을 것을 믿는 일이 많다. 김대중이 당선되기 전만 해도 김대중의 당선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고, 노무현이 당선되기전에도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세상은 50년전이나 지금이나 기본적으로 같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예를 들어 젊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그들은 삼성이 소니를 이기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BTS같은 순수한국 가수들이 미국 차트인 빌보드에서 1등을 계속하는 일은 화성인의 침공만큼이나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자동차가 있는 상태와 없는 상태는 물질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상상하기 쉽다. 그래서일 것이다. 우리의 상상력은 종종 물질적인 것에 집중되고 한정되고 말며 정확히 말하기 어려운 내적이고 문화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보수적으로 작동하고 만다. 그러나 이같은 상상력은 기본적으로 세상이 변하지 않을 것을 믿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조선시대와 지금과의 차이중 가장 의미가 큰 것은 말대신에 차를 타고다니는 것이 아니다. 양반 노비같은 신분제가 없고 이 땅에는 왕족이 없다는 사실이 훨씬 더 크다. 우리는 미래에는 개인용 우주선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달에도 쉽게 가는 미래를 쉽게 상상한다. 그런 공상과학영화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 안을 들여다보면 미래가 아니라 오히려 카우보이 개척시대나 서양의 중세시대를 보게 된다. 미래가 아니라 오히려 과거를 보여주면서 미래상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심각한 오류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인공지능은 엄청난 정보를 가진 데이터를 압축해서 만드는 하나의 거대한 개념같은 것이다. 국가나 프로게임같은 개념말이다. 사람들이 추상적인 관념을 하나의 단단한 실체로 느끼게 되는 일은 과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컴퓨터의 데이터 최적화를 통해 개념을 만드는 시대를 살기 시작하고 있다. 비트코인 같은 것이 국가 화폐가 되기도 한다. 

 

이런 시대에 미래를 생각하면서 조선시대나 고대 그리스 시대의 노예제도를 생각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크나큰 오해다. 우리의 미래는 아마도 인공지능같은 기술로 거의 가득 채워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이 지금과 기본적으로는 같은데 사방에서 노예로봇이 일하고 있는 곳이 아니다. 기술이 발달하면 국민 대다수가 농기계로 농사를 짓는 시대가 오는게 아니다. 아주 작은 수의 사람들만이 기계를 써서 농사에 종사하고 세상은 농사일이 아닌 것이 거의 다 채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에서 노예로봇을 부리며 사는 사람도 미래에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미래의 아주 작은 부분일 것이고 새로운 것이 세상을 가득 채울 것이다. 즉 새로운 관념이 말이다. 이 전환은 물질적인 것이전에 내적이고 정신적이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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