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2
세상에는 구분해야 하는 것을 서로 구분하지 않는 일이 있다. 그것은 하나의 철학과 철학 자체에 대한 생각이다. 철학 자체에 대한 생각은 말하자면 철학 자체에 대한 철학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메타 철학 혹은 철학 패러다임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철학 자체에 대한 생각이란 무엇인가? 그걸 말하기 전에 일단 철학에 대해서 먼저 말해 보자. 여기서 내가 말하는 하나의 철학은 수학같은 형식적 시스템의 형태를 가진다. 비록 그렇게 엄밀할 필요는 없지만 그 철학은 그걸 전개하는 철학자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실들 혹은 진리들이나 수학에서 공리의 자리를 차지하는 그 사실들의 논리적 조합에 의해서 전개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논리적 조합도 엄격히 말하자면 어떤 규칙이 필요한데 그 논리적 전개 방법도 결국은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사회적 관습이거나 철학자의 영감에 근거해서 옳다고 여겨지는 규칙이라고 할 수 있다. 이걸 소박한 철학이라고 말할 때 중요한 것은 여기서는 우리가 출발점인 진리에 대해서 아주 소박한 자세를 취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의심이나 반성없이 그저 나는 이것을 봤다거나 우리는 이러저러한 것이 명확하다는 것을 안다는 자세이다.
그렇다면 모든 철학이 이렇지 않다는 말인가? 그렇다. 철학자는 여기서 다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어떻게 뭔가를 알까? 우리는 어떻게 어떤 생각을 가질 수 있는가? 우리가 당연히 옳다고 여기는 것 즉 진리를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뭔가를 인식하는가? 칸트의 인식론은 우리가 뭔가를 어떻게 알 수 있냐는 질문을 던진 생각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 뿐만이 아니다. 이런 생각들을 메타 철학이라고 할 때 메타 철학의 좋은 예는 마르크스 주의일 것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의 경제적 구조가 사람들의 사고를 결정한다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즉 사람들의 사고를 결정하는 외부 구조가 있다는 것이니 이것도 단순히 철학이라기 보다는 철학에 대한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의식의 세계를 강조한 프로이트도 우리의 의식적 사고를 지배하는 무의식적 세계가 있다는 점을 말했다는 점에서 메타 철학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철학에 대한 철학은 자기 회귀적이다. 즉 하나의 생각이 이런 저런 이유때문에 생겨났다고 한다면 우리는 다시 그럼 그 생각은 어떻게 생겨났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메타 메타 철학같은것도 생각할 수 있고 원칙적으로 이런 과정은 무한히 반복될 수도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람들은 그런 일을 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런 문제들 때문인지 철학과 메타철학을 잘 구분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서 이때문에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내가 처음 설명한 철학은 그 외부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신비한 영감때문에 뭔가를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사실 언제나 우리는 어디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끝없이 왜를 물으면 우리는 한발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그러나 그 때문에 하나의 철학은 일종의 정신적 감옥을 형성한다. 그것이 당연해 보이면 보일 수록 우리는 그것이 어떤 환경의 영향이라는 생각을 믿기가 힘들어 진다. 이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당연히 여기는 사람들이 현실과 유클리드 기하학이라는 시스템은 서로 다른 것이며 따라서 현실이 반드시 유클리드 기하학대로일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과 같다.
메타 철학은 철학의 이유를 묻는다. 이걸 가르켜 우리는 종종 그저 더 근원적인 부분을 파고드는 것이라고 여기곤 하지만 나는 이런 설명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영원한 진리를 찾는 것으로 여길 때 그저 더 깊은 감옥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오랜간 사실 철학은 스스로를 과학보다 더 근원적인 부분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리처드 로티가 존 듀이등을 언급하면서 말하고 있듯이 이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하나의 철학을 가변적인 하나의 환경의 결과로 여겨야 한다. 이런 면에서는 마르크스가 더 뛰어나다. 마르크스는 경제적 환경이 사상을 결정한다고 했는데 그 경제적 환경이란 변화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도 결국에는 피할 수 없는 미래라는 생각에 빠져서 가짜 과학을 선전했다고 칼 포퍼는 비판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마르크스도 환경의 결과가 철학이라는 생각을 했음에도 그 환경이 유일한 것이라고 여긴 것이나 마찬가지다. 미래는 결국 정해져 있기 때문에 결국 하나의 철학은 절대적으로 옳은 진리가 되고 유일한 철학이 된다.
실용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인 존 듀이는 이보다 과학적인 태도를 취하려고 하며 이를 철학의 재구성에서 주장한 바 있다. 하나의 과학이론은 어디서 나오게 되는 가? 그것은 관찰 결과에서 나온다. 즉 관찰 데이터가 과학 이론을 만든다. 설사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해도 관찰 데이터는 과학이론이라는 사상, 철학의 배경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다른 데이터가 존재할 때 다른 과학이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가 양자역학과 고전역학을 모두 과학이라고 여긴다면 그 둘의 차이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측정 가능한 데이터가 달랐다는 것에 있다. 즉 환경이 달라서 다른 철학이 나온 것이다. 언젠가 미래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하고 많은 데이터를 가지게 된다면 우리는 새로운 과학을 가지게 될 것이다.
메타 철학이란 걸 생각할 때 기성 철학자들은 상당히 많이 무시 했던 부분이 있다. 그들은 철학내지 사상이 사람이 세상과 접촉한 결과 그냥 나온다고 하는 자세를 취하며 세상과 사람사이에 존재하는 도구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사소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티코 브라헤나 갈릴레오가 천체를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망원경 덕분이다. 그런데 그걸 그냥 사람이 자연을 관찰했다라고만 하는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 특히 엄청난 실수라고 여겨지는 것은 문자다. 사람은 자기 철학이 있어서 그걸 문자로 적은게 아니다. 이미 월터 옹이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사람이 문자 문화를 가지게 되니까 철학이 가능했던 것이다. 플라톤이 철학을 창시한게 아니라 그 시대에 구술 문화와 문자 문화가 공존했고 전자를 대표하는 소피스트를 문자 문화에 정통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문화적으로 극복했다고 말해야 한다. 그렇게 볼 때 정말 중요했던 것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문자 문화의 기여자들이다. 그들이 결국 철학을 만들어 낸 것이며 철학은 문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이 어떤 미디어 환경속에 있을 때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가 하는 것은 메타 철학의 좋은 예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문자와 인공지능을 무시할 수 없다. 문자는 인간의 사고를 엄청나게 바꾸었다. 이걸 생각해 볼 때 이전과는 비할 수 없는 데이터를 다룰 수 있게 해주는 인공지능 기술을 포함한 IT 기술의 발전은 인류사를 완전히 뒤집어서 그 이전의 인간을 문자 이전의 인간 즉 선사시대의 인간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다.
철학은 대개 개인주의적이다. 즉 우리는 그것을 어떤 개인이 깨닫는 어떤 진리로 여긴다. 하지만 메타철학의 개념을 생각해 보면 철학이란 환경의 결과이고 우리는 환경에 좀 더 주목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절대 진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에 절망할 것이 아니라 지금 나는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는 것을 메타철학의 개념은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혼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도구와의 연결속에서 만들어 진다. 철학은 그 연결의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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