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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철학의 사이

by 격암(강국진) 2023. 9. 14.

23.9.14

철학과 자연의 거울을 쓴 리처드 로티는 이미 1979년에 모든 학문의 기초를 제공하는 분야로서의 철학이란 허구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가장 원천적이고 기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분야를 철학이라고 여긴다. 과학이나 기술이 아닌 그것의 배후에 있는 어떤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보통 철학이라고 여겨지게 되는 것이 이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과학이나 기술은 건물의 1층쯤이 되고 그것보다 더 깊은 곳을 파헤치면 그 밑의 영역으로 가게 되므로 그것은 자연히 철학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과학과 철학이 그런 것이 아니라 마치 서로 다른 곳에 있는 빌딩의 1층이라면 과학이나 기술의 근본을 생각하거나 과학과 관련되지만 과학이론은 아닌 것을 당연히 철학이라고 여기는 것은 옳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생각이 보통 세상에서 철학이라고 여겨지는 어떤 생각과 비슷하거나 연결점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그냥 새로운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과학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므로 과학과 철학의 사이에 있는 생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철학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일은 단지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필요한 일에 대해 착각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우리는 과학혁명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뉴튼의 고전역학을 보면서 이 착각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뉴튼의 고전역학은 현대 과학의 모범이다. 과학은 이래야 한다는 특징을 완성하고 보여준 것이 바로 뉴튼이며 이때문에 일찌기 양자역학을 만든 하이젠베르크도 양자역학은 더 현대적인 이론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 과학이론은 이래야 한다는 구조에 따라 만들어지기는 즉 과학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패러다임에 따라 만들어지기는 두 이론이 모두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데이터가 달랐을 뿐 이론을 만드는 패러다임은 같았달까. 고전역학도 양자역학도, 유클리드 기하학이나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서로 다른 수학이지만 둘 다 옳은 형식적 시스템이듯 어떤 의미에서는 둘 다 옳다. 다만 현실에 더 가까운 시스템이 양자역학이라는 점이 데이터에 의해 밝혀졌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과학혁명의 핵심적 특징은 뭐였을까? 그것은 뉴튼이나 갈릴레오 이전의 사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방향을 돌린 것이다. 과학혁명 이전에는 사람들은 말하자면 물질이 왜 움직일까나 왜 서는가 같은 질문에 대해 끝없이 왜를 물었다. 그런데 과학혁명 이후에는 어떤 기본적 자연법칙은 주어져있다고 말하고 그 자연법칙의 결과를 분석하는 일이 과학자의 핵심적 업무가 되었다. 물론 중력법칙같은 자연법칙을 발견하는 일은 대단한 과학적 업적이다. 하지만 계속 해서 왜를 묻는 것 이상으로 우리는 그런 법칙의 결과를 따지고 분석한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전에 없는 새로운 자연법칙을 찾으려고 하면서 보내지 않는다. 쿤이 정상과학이라고 말한 지금의 과학법칙을 사용하는 과학속에서 새로운 지식이나 이론이나 설명을 만들어 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일을 통해 우리는 점점 더 우리의 과학에 대한 확신을 키운다. 뉴튼의 업적이 놀라운 것은 그가 중력법칙을 발견했다는 점이상으로 그것을 기반으로 케플러의 법칙들을 수학적으로 증명해 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저작인 프린키피아는 행성의 괘도가 타원이라는 점을 수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는 뉴튼의 말을 들은 헬리의 요청에 따라서 만들어 졌다고 한다. 뉴튼 이전의 사상가들이라면 중력법칙을 발견해도 왜 그런 법칙이 있는가에만 골몰했을 것이다. 이렇게 사고가 뻣어나가는 방향이 달랐던 것이다. 

 

현대 철학의 중심은 칸트 이래 인식론이었다. 즉 어떻게 정확한 지식이라는 것이 가능한가하는 질문이 과학혁명의 시대이래 사상가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던 것이다. 철학자들은 다시 지식의 확실성이라는 기초를 향해 생각을 거듭해 갔다. 덕분에 철학자들의 책을 읽으면 인간 문명과 사회의 대부분이 망각되어져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즉 철학자들의 이야기는 산업혁명을 거치고 전자 산업이 발달되면서 철도가 놓여지고 무선 통신이 발달되고 컴퓨터가 나오는 것과는 대부분 무관하게 흘러간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복잡한 롤프레잉 게임같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놓고도 기본적으로 이 프로그램은 0과 1의 이진법에 기초해 있다는 말로 그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이 끝난 것같다. 

 

과학자들이 이론에 확신을 가지는 이유는 그 논리적 구조가 확실한 것 이상으로 써보니 되더라는 것이 더 크다. 우리가 중력의 법칙에 확신을 가지는 이유는 그 법칙에 근거해서 아주 복잡한 계산을 해서 뭔가를 예측했는데 그 예측이 맞더라는 경험의 탓이 크다. 즉 더 기초적인 부분으로 확실하게 사고를 다졌기 때문에 혹은 중력법칙에 도달한 사고과정이 확실하기 때문에 중력법칙을 믿기 보다는 그러한 출발점에서 쌓아올린 결과물이 현실에서 작동하더라는 경험이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일이 많다. 인식론이란 말하자면 지식이 실제로 작동해서 문제를 해결해 주더라는 결과를 보는 쪽이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확실한 지식을 구할 수 있을까하는 기초를 고민하는 쪽에 가깝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우리는 점점 더 경험으로 판정될 수 없는 추상적 사고로 빠지는 동시에 더 단순한 경우만 다루게 된다. 이렇게 해서 실제로는 노트북 컴퓨터에 글을 쓰는 철학자라도 그 글속에서는 기술의 의미같은 것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 사고가 나열되는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사고전개의 두가지 방향을 보게 된다. 하나는 원천적이고 작지만 출발점의 역할을 하는 지식들이 애초에 어떻게 가능했는가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식론이다. 다른 하나는 그걸 어떻게 구했건 우리가 그런 출발점을 통해 어떻게 더 복잡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이건 수학으로 말하자면 애초에 공리가 옳다는 걸 어떻게 아냐고 고민하는 것과 어떤 수학적 정리들의 증명을 구해내는 일에 매진하는 것의 차이다. 이에는 내가 아는 한 적당한 이름이 없는 것같다. 그래서 그냥 패러다임론이라고 여기서는 말하겠다. 

 

패러다임론은 지식의 출발점보다 지식의 누적과 조합에 더 주목한다. 그래서 도구에 더 주목한다. 예를 들어 문자의 사용은 패러다임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정보를 기록하는 문자가 있기에 더 많은 지식과 경험이 기록되고 조합될 수 있어서 더 복잡한 지식들이 만들어 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구구단과 미적분 공식은 서로 다르다. 오늘 비가 온다는 단순한 사실과 농사법은 서로 다르다. 현대인들이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문자의 사용이래 정보의 누적 방식이 전혀 달라졌기 때문에 가능해 진 것이다. 

 

패러다임론과 인식론의 차이는 이러한 예에서 분명해 진다. 인식론에서는 지금 그 확고한 지식을 얻는 주체인 인간이 원시인인지, 21세기에 AI를 쓰는 현대인인지를 상관하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보면 기존의 철학은 원시인이나 침팬지의 심리학일 수 있다. 그 안에 뭐가 원시인과 현대인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지에 대해 주목하는 것이 없다. 그들은 마치 인간이 영혼같은 인간의 본질을 가지고 있으며 그 본질은 평생 바뀌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천년전이나 지금이나 기본적으로 같다고 가정하는 것같다. 

 

하지만 패러다임론은 거꾸로 그 수단에 집중한다. 따라서 문자만 겨우 쓰는 사람과 인터넷을 쓰는 사람은 전혀 다른 것이 당연하다. 이러한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과학이나 기술분야로 분류되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패러다임론은, 예를 들어 그 안에서 거론할 문자 패러다임은 문자를 연구하는 문자학과는 다르다. 패러다임론에서 관심을 가지는 대상은 지식을 만들어 내는 도구들이며 그 방식이다. 패러다임론은 그 도구들을 서로 비교하고 왜 그런 차이가 생기는가를 알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알파벳과 수학기호는 모두 문자인데 패러다임론에서는 이 문자들이 각각 어떤 지식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만드는가를 주목할 것이다. 즉 그 차이가 뭐고 그때문에 어떤 다른 지식을 가지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컴퓨터 같은 도구와 비교되어 문자로 정보를 저장하던 시대와 컴퓨터 방식으로 정보를 저장하는 시대는 어떻게 지식을 다르게 생산하는가를 질문할 것이다. 

 

철학분야에서는 여전히 플라톤같은 수천년전의 사람의 생각이 중심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반면에 현대 문명의 발전에 대해 전혀 모르던 플라톤과 현대인의 대화는 패러다임론에서는 중심적인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왜 확실한 지식을 우리가 가질 수 있는가를 질문하는게 아니라 우리가 왜 원시인에서 현대인으로 진화했는가를 묻고 있다. 그런 지식은 왜 몇천년전에는 없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고민이 없을 때 우리는 서로 다른 패러다임들을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는 21세기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없다. 플라톤이나 공자의 말이 21세기에는 틀렸다거나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뉴튼이 한 것처럼 사고를 다른 방향으로 전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술이 아니면 철학이고 그 철학이란 으례 서양철학이나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것들이 중심적 주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위험한 것은 이때문이다. 이런 생각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잊기 쉽다. 바로 철학과 과학의 사이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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