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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이해하기

마음과 영혼

by 격암(강국진) 2023. 9. 4.

23.9.4

많은 사람들은 사람이 마음과 영혼을 가진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안다. 그런데 마음과 영혼이라는 개념들은 생각해 보면 어떤 목적이 있어서 만들어진 말일 뿐 근거가 있는 말들이 아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마음과 영혼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분명한 효과가 있으며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진짜 이유일지, 진짜 답일지는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효과란 무엇일까? 먼저 마음에 대해 말해보자면 그것은 마치 우리 몸속의 작은 인간같은 효과를 가지고 있다. 마음같은 단어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몸을 마치 로보트나 자동차같은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우리 몸안의 어떤 작은 인간이 조종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왜 이런 생각이 필요하냐면 우리는 우리 몸이 우리 자신이 아닌 것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리학의 법칙따위까지 알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손발이 잘라진다고 해서 우리가 다른 사람이 된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우리안의 뭔가에 의해 조작되고 있을 뿐이다. 사실 물질이나 기계에 불과한 몸을 조종하는 부분 혹은 우리의 생각을 담고 감정을 느끼는 부분이 우리 몸안에는 있어야 할거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것이 바로 우리 몸안의 작은 인간에 가까운 마음이며 이런 마음이 존재한다는 답이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다. 

 

그런데 이 마음이 다시 몸처럼 어떤 물질이라면 우리는 그 작은 인간을 조정하는 다른 작은 인간이 그 안에 있다는 식의 생각을 하게 된다. 따라서 마음은 뇌와 거의 같은 것처럼 이야기 되지만 물질적 기관인 뇌가 곧 마음이라는 생각은 설득력이 없다. 그런 식이라면 애초에 마음이라는 것을 따로 생각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과 물질이라는 이원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는 순간 물질이 아닌 마음이 어떻게 물질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가 같은 문제를 가지게 되지만 그 부분은 대개 그저 뭉게고 지나간다. 잘 몰라도 우리 안에 마음이 있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영혼은 마음과 비슷한 것같지만 다른 효과를 가진다. 그것은 정체성의 연속성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갓난 아이로 태어나서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되고 늙어죽을 때까지 끝없이 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 모든 사람들을 우리는 모두 하나의 존재로 파악한다. 이것은 마치 밀이 밀가루가 되고 다른 재료와 섞이고 오븐에서 구워져서 빵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는 하나의 정체성이 있다는 믿음과 같다. 그 안에는 말하자면 밀의 영혼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언제나 나는 나라고 생각하고 너는 너라고 생각한다. 내 아내가 10년이 지나더니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말을 할 때도 우리는 그것을 어떤 문학적 표현으로 말하는 것이지 그녀가 진짜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바로 이렇게 물리적 변화에 상관없이 존재하는 그 정체성을 가진 것이 바로 영혼이다. 

 

영혼 역시 이때문에 물질이 되기는 힘들다. 특히 현대 과학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우리 몸안에 우리의 정체성을 가진 신비한 원자따위는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영혼을 그런 것이라고 상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개 영혼같은 것에 대한 암묵적인 믿음을 가지는데 이것은 종교적인 이유라고만 할 수는 없다. 왜냐면 누군가의 정체성이 시간과 무관하게, 물질적 변화와 무관하게 유지된다는 믿음, 그런 본질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하나의 사람을 시공간적으로 같은 사람으로 여기는 사회적 관습이 불가피하게 가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돈을 빌린 사람이 다음 날에 와서는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가 아니니 돈을 갚을 의무가 없다고 말하는 것에 당신은 아마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배우자가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니 나는 당신과 혼인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에 당신은 아마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마음과 영혼은 여전히 널리 믿어지고 가정되는 존재들로 남아 있다. 그러나 21세기의 과학적 지식을 가진 우리가 마음과 영혼같은 단어들이 필요했던 이유들을 직시할 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들에 대한 올바른 답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그냥 과거의 미신이 오늘날에도 관습적으로 남아 있는 것뿐이다. 우리는 마음이나 영혼이 존재한다는 답대신에 같은 효과를 내는 다른 답을 생각할 수 있고 그럴 때 우리 자신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런게 가능할까? 우리는 진화적인 답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우리 주변의 산을 하나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지리산을 생각해 보자. 지리산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인간의 수명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흙과 암석의 덩어리인 지리산은 그러나 다른 시간의 스케일, 예를 들어 지구적 스케일인 수십억년의 스케일로 보면 마치 흐르는 시냇물에 생겨난 물거품 처럼 순간적으로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시간적으로는 물론 공간적으로도 언제 어디에 지리산이 존재한다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말할 수 없는 존재다. 

 

유전적 진화의 시간 스케일을 생각해 보자. 인간이 유전자적으로 인간인 것은 적어도 몇십만년의 시간 스케일에서 그렇다. 즉 유전자적으로 말했을 때 현대인은 20만년전의 원시인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이런 시간 스케일보다 작은 시간에서는 인간이라는 종은 어떤 의미에서는 분명히 변화하지 않으며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시간 스케일과 다른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지구적 시간 스케일인 몇십억년의 스케일에서는 지구상에 이 모든 생명체들이 나타나고 번성하는 일이 시냇물위의 물거품과 다를게 없을 수 있으며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분하는 일이 무의미할 수 있다. 그런 시간 스케일에서는 진화조차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다. 즉 모든 생명체들은 순간적으로 다른 것으로 변하고 사라진다. 

 

게다가 생명체라는 하나의 개체에 집중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지구가 생겨난 이래 현재의 인간이 만든 정도의 문명은 만들어 진 적이 없는 것같다. 그랬다면 우리는 화성이나 달에서 과거의 다른 지적 생명체가 만든 문명의 흔적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문명이라는 것은 수십억년이라는 지구적 시간 스케일에서는 순간에 불과한 몇천년만에 발달한 것이다. 즉 집단으로서의 인간은 불과 1만년전만 해도 침팬지나 고릴라보다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1만년도 안되는 시간 사이에 인간 사회는 수십억년간 존재한 적이 없었던 문명을 만든 것이다. 

 

인간이란 이런 진화적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진화는 단지 유전적 진화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문화적 진화는 유전적 진화와 다르다. 현대 문명을 가진 현대 사회속의 인간은 현대인과 유전자만 같은 다른 인간과 같은 인간이 아니다. 게다가 좀 더 작은 시간 스케일과 규모일지는 몰라도 개인적인 의미에서는 인간이 몇십년이라는 시간동안 삶의 체험을 축적하고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 온 존재라는 것, 즉 그런 개인적 진화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무시할 수 없다. 30년동안 같이 살았던 배우자가 진화적 시간 스케일에서는 30년이 무의미하다고 해서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같은 의미를 나에게 가지는 것은 아니다. 

 

이렇다고 할 때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리산을 포함한 다른 모든 것처럼 결국 변하고 사라지는 현상에 불과하다. 즉 그것은 마치 바둑돌이 기묘한 패턴으로 우연히 만들어 진 현상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의미인 개인적 스케일에서는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지리산이 존재하듯이 말이다. 특정한 모양을 가진 계곡에서는 바람이 특정하게 불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개인이 가지는 유기체로서의 특징은 그들이 개성을 가지며 존재하게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마음이나 영혼따위는 없다. 있다고 해도 그것은 지리산이 존재한다는 말처럼 유한한 의미를 가진 말에 불과하다. 

 

이 말이 인간이 하찮은 존재라는 뜻은 아니다. 이런 말들을 그런 뜻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오히려 과대망상에 빠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누구와 무엇과 비교해서 하찮다는 것인가? 인간이 스스로를 유한한 존재로 여기지 않고 어떤 범우주적 존재와 스스로를 비교하기 시작하면서 스스로가 그런 스케일에서도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에 실망한다는 것은 과대망상이 아닐까? 개미가 자신이 알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에 실망한다면 그런 모습을 보는 인간은 하찮은 개미주제에 그럼 자기가 한계가 없는 줄 알았냐고 하지 않을 것인가? 게다가 이런 말들은 전통적인 개인이라는 경계를 중심으로 했을 때 통하는 것이다. 우리가 문명이나 지구적인 규모에서 자아의 경계를 가지지 않고 세상을 본다면 무엇과 무엇을 비교해서 하찮니 한계가 있니를 이야기할 것인가.

 

이제까지의 말들은 우리의 일상적 생활을 훨씬 초극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의미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1만년 전이라면 지구를 파괴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하는 인간은 정말 무의미한 걱정을 하고 있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문명의 힘은 오늘날에는 그런 걱정을 꼭 필요한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만약 인류가 힘을 합친다면 인간은 이제 핵무기를 바탕으로 지구를 파괴할 수 있고, 적어도 지구상의 생명은 거의 완전히 파괴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한계를 느끼고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그 한계를 극복하는데 꼭 필요한 단계라고도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심신이원론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데카르트는 과학혁명의 시대를 살았다. 즉 인간에게 더 큰 힘과 시야를 준 과학적 지식이 등장하는 것과 마음의 강조는 같은 시대에 일어난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이라는 관념이 사라진다는 것은 더 큰 힘과 시야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마음이나 영혼을 대체하는 어떤 새로운 관념에 기초한 미래 문명에 우리가 도달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정신세계가 가진 한계를 돌파해야만 하는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뜻일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아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지금의 시각에서는 신처럼 보일 것이다. 현대인이 행하는 것이 만년전의 인간들에게는 그렇게 보일 것처럼 말이다. 만년전의 인간에게 민주주의니 인간의 자유니 하는 개념들은 이해도 안가지만 이해가 간다고 해도 일상과 관련없는 무의미한 말로 여겨졌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기술의 발전이 빠르다. 그러니 마음과 영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일은 반드시 무의미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진짜 미래가 도래하는 것을 막고 있는 걸림돌을 제거하는 작업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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