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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이해하기

상대주의라는 말의 함정

by 격암(강국진) 2023. 9. 5.

23.9.5

객관적 절대적 진리나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대주의라는 말은 지나치게 단순하게, 따라서 지나치게 나쁘게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절대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에는 순순히 동의하면서도 그것에서 벗어나는 일을 완전한 혼돈이나 윤리적 파국과 동일시 하고 그래서 상대주의를 사악한 일로 여기고는 한다. 이런 태도를 가지면 말을 어떻게 하든 우리는 다시 어떤 절대주의로 돌아가게 된다. 다만 그것을 공공연하게 말할 경우 반박당할 것이 두려워 위선적으로 행동할 뿐이며 따라서 이것은 쉽게 우리를 독단적으로 만든다. 생각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남의 생각은 어차피 무의미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절대가 없다는 말이 이 세상에는 어떠한 보편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모든 보편성에는 한계를 주는 경계가 있을 뿐이다. 때로 그 경계는 유한한 인간의 스케일로 보았을 때 무한에 가까울 수 있고, 이런 의미에서는 절대란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인간수명이 백년뿐이라는게 인간의 삶이 하루살이같은 것이라는 말은 반드시 사실이 아니다. 문맥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어 방향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주공간에서는 일반적으로 동서남북이란 방향개념은 의미가 없다. 그런 방향 개념은 지구 위에서나 의미를 가질 뿐이다. 하지만 우주 전체로 보아 방향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말 동서남북이란 거리 개념이 무의미하며, 그런 거리 개념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조롱당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적어도 지구 위의 생명체들에게는 그 거리개념은 공유될 가치가 있다. 다만 그 거리 개념을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하여 우주 공간에 나갔는데도 그것에 집착하는 일을 피해야 할 뿐이다.  

 

우리는 이 예를 곰곰히 생각하면서 좀 더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방향의 예가 보여주는 것은 어떤 환경을 공유하는 존재들 사이에서는 공통의 기준이란게 존재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한적이지만 보편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다만 이 보편성은 어떤 경계를 넘어가면 사라진다. 지구 위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동서남북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고, 이야기하는 것이 편리하다. 이것을 우주적이고 무한한 경계의 관점에서 방향에 절대적 기준이 없다는 말로 무시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모두 유한한 존재라던가, 생명은 모두 그 나름의 가치를 가진다는 말이 모든 정신병자들과 성인으로 받들어 마땅한 위대한 인간들이 같은 가치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다. 아메바와 인간이 같은 가치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이런 말들을 부정하건 긍정하건 그것을 어떤 경계와 함께 이해해야 한다. 이런 말이 인간은 애초에 차별이 있으니 인간평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고, 인간은 특별한 가치를 가진 생명이니 다른 생명체들은 인간에 비하면 무의미하다는 말도 아니다. 우리는 어떤 말이 어떤 문맥에서 사용되는지 주목해야 한다. 지구 표면에서의 방향인가 우주 공간에서의 방향인가를 따져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상식을 가지고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내가 앞에서 한 말들에 놀라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지구 표면위에서 살면서 동서남북 방향을 당연한 개념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정신병자와 성인의 구분을 따질 것도 없는 당연한 일로 여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지구 표면위에서 떠올라 우주공간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그리고 그럴 때 방향의 절대적 기준이란 없다는 것도 배우게 된다. 문제는 이런 과정에서 우주로 우리의 영역을 넓히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치적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구 표면위의 사람들과 일상적인 일을 하면서도 그 사람은 동서남북을 구분하지 못하는 바보같은 행동을 할 수도 있다. 바로 방향의 절대적 기준이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 충격때문이다. 

 

한국 안에서 한국적인 문화를 당연한 것으로 아는 사람이 한국을 벗어나서 일본이며 유럽이며 러시아로 가서는 한국의 상식은 보편적 상식이 아니라 한국 안에서나 통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하자. 이 사람이 문화적 상대주의를 주장하게 되었다는 뜻이 반드시 이 사람이 모든 문화적 관습을 무의미한 것으로 말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상식에 가해진 충격을 이기지 못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상대주의를 주장하면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마치 한국에 있는데도 일본의 도로교통법을 주장하는 사람처럼 편할 때마다 다른 나라의 관습을 골라서 주장한다. 부모와 나의 관계는 전통적 한국식으로 하지만 나와 내 자식간의 관계는 미국식이라는 식이며 그 나마도 일관성도 없이 사안에 따라 편한 쪽으로 골라서 정당성을 주장하고는 하는데 이런 행동은 결국 모든 질서와 윤리적 가치는 무의미하다는 허무한 이기주의가 될 뿐이다. 

 

한국인들은 한국의 시간적, 공간적, 문화적 환경속에서 자신들의 생존과 번영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공동으로 어떤 문화적 구조를 발전시켜왔다. 그리고 외국은 자기 나름대로 또 그렇게 했을 뿐이다. 남자는 왜 바지를 입고 여성은 왜 치마를 입는가? 이것은 어떤 성억압적 구조때문인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수없이 많은 사회적 해결책들과 관계를 가지고 존재하는 관습이다. 관습에 얽매일 필요는 없지만 동시에 관습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바보짓이다. 

 

한국과 외국의 예를 들었지만 세상에는 무수한 경계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우리 집과 옆 집의 문화나 관습도 꼭같지 않다. 옆집에서는 남편이 설거지를 하는데 왜 우리 집에서는 안하냐는 질문은 타당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집의 생활이 반드시 같아야 한다는 생각은 지나치게 단순한 것이며 주체적이지 못한 것이다. 왜 비교하는가? 왜 같아야 하는가? 같다면 뭐가 어디까지 같다는것인가? 따지고 보면 모든 사람들은 서로 다 다른데 특정한 어느 부분만 비교해서 이건 같아야 한다고 고집한다는 것이 정말 옳을까? 정말 모든게 같을 수 있을까? 공평하다는 게 뭔가? 

 

이러한 말들이 문화적 폐쇄주의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은 이미 처음에 했다. 상대주의를 그냥 가치적 혼란으로만 여기면서 나만 옳다고 믿는 사람은 외국인들은 다 잘못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한국인과 같다. 절대적 기준이란 없으니 진정으로 막살아도 좋다고 여기는 사람도 상대주의를 가치적 혼란으로만 여긴다는 점에서 폐쇄적인 사람과 같다. 

 

바람직한 상대주의 그러니까 진정한 상대주의는 나와 타인의 차이를 알면서도 나와 타인을 모두 존중하면서 살아가는 태도다. 그것은 자기 변화도 부정하지 않지만 이제까지 우리가 살아온 과거를 섯불리 부정하지도 않고 모두가 비슷한 환경에 속한다는 점에서 보편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만 동시에 엄밀하게 말하면 같은 환경이 없어서 그 보편성에 한계가 있다는 것도 기억하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의 균형위에 진정한 상대주의는 존재하며 따지면 이게 그렇게 어려운 말도 아니고 당연한 것이다. 동서남북의 예를 기억해 보라. 

 

우리는 모두 한계를 가진 인간들이다. 우리는 매일 새출발하는 기분으로 살아야 할지는 몰라도 우리는 언제나 어제 걸음이 끝난 곳에서 다시 한발을 내딛는 것이지 유령처럼 과거를 다 지우고 매번 새로운 장소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 진리가 있다는 생각이 위험한 이유는 그 진리를 알면 인생을 완벽하게 살 수 있다고 믿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 하나를 바꿨다는 이유로 너무 쉽게 자기 자신과 타인을 부정하게 될 수 있다. 정답은 하나 뿐인 진리고 그 진리를 아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스스로를 오랜 진화와 적응의 결과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과거를 싹 지우고 자신이 안다는 그 진리에 모든 걸 던지게 될 수 있다. 

 

상대주의는 지식이나 진리를 안다는 개념을 넘어설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왜 태어났는지, 왜 사는지 모른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도 모르고, 우리가 꼭 해야 할 과업이 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냥 우리가 태어난 곳에 던져졌고 그곳에서 주변환경에 적응하면서 한발 한발 걸어가며 전진해왔을 뿐이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는 작은 세계가 생기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인식하고, 우리가 우리의 삶의 의미를 찾는 공간이다. 그 공간은 결코 절대적이고 무한히 넓지 않다. 그리고 당연히 우리가 모를 뿐 그 바깥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우리는 내적 성장을 통해서 그걸 몇번이나 살면서 경험해 왔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걸 모른다. 심지어 우리가 인식하고 살아가는 그 공간에 대해서도 모든 걸 모르고 그것이 우리가 모르는 것들에 의해 어떻게 영향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만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때로는 그 공간을 확장하거나 변형시켜왔을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안다'는 사실에만 주목하면서 행동하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런 행동은 성장을 막고, 때로 치명적인 위험을 불러들인다. 어떤 법칙의 보편성을 과신한 나머지 정당한 경계를 넘어서도 그걸 따르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만드는 가정이란 공간에서만 살았던 어린 아이를 생각해 보자. 그 아이에게 내가 말한 작은 세계란 바로 이 가정이다. 그런데 그 아이는 자기가 먹는 밥이 어디서 오는지 다 알까? 그 아이 나름대로 믿는 그 가정이라는 내부의 공평과 정의가 정말 그 가정의 바깥까지 알고 있는 사람에게도 같은 의미를 가질까? 그 아이 생각에는 집에만 오면 쓰러져 자는 직장다니는 아빠는 게을러 보이기만 할 지 모른다. 그 아이는 아버지와 어머니도 남자고 여자라는 것을 모를 것이다. 그 아이가 다른 가정을 방문하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 자기 부모를 부정하게 되는 일을 한다면 그것이 대부분의 경우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그 아이가 어떤 진리라는 것을 믿는 것은 앞에서 말한대로 그래서 위험한 것이다. 아이는 뭔가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부모들에게 삶이 공평한가하는 질문을 아이는 대개 던지지 않는다. 그런데 아이만 이럴까? 어른들은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공간에서 살고 있다는 말인가? 

 

이런 것을 기억하는 상대주의는 윤리적 혼란을 마구 불러들이지 않는다. 이런 상대주의는 현대 사회같이 복잡성이 큰 세상에서 꼭 필요한 것이다. 상대주의를 무의미와 허무로 파악하는 태도는 이런 의미에서 위험한 것이며 전체주의와 독선을 옹호하기 위해서 억지로 만들어진 공격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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