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18
알쓸별잡이라는 프로그램에 출현한 김상욱교수는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현재 젊은이들을 보고 있으면 문자문화가 다시 구술문화로 돌아가고 있는 것같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는 더 생각해 볼만한 좋은 말이었습니다.
일단 프로그램에서 정리했듯이 논리란 문자문화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문자라는 것을 써서 우리가 전체적 논리 구조를 보지 않으면 논리적으로 사고를 전개하기 힘듭니다. 긴 수학 증명을 모두 머릿속에서 할 수 없다는 것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문자로 기록된 자신이나 남의 사고를 읽고 그것을 기억하고 수정하면서 논리적 사고라는 것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수학에서 여러가지 증명들을 따라간 다음에는 수학 공식을 외워서 더욱 복잡한 계산도 해내는 것과 굉장히 유사합니다.
우리는 아무런 데이터나 기억없이 그저 우리 마음대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생각의 한단계 한단계에서 사실상 무한히 많은 세부사항에 대한 검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크고 작은 논리적 비약들해야 논리적 사고를 할 수 있는데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사고의 부분 부분들이 우리자신의 직접적 경험이나 타인들의 노력에 의해 자세히 그리고 믿을만하게 미리 검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대개 남들이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검증한 것을 어느 정도 조합함으로써 논리적 사고를 전개합니다. 이것은 증명이 있다는 것을 아는 수학공식을 쓰는 것과 같아지는 것이지요.
긴 책이나 긴 글은 필요에 의해서 길어진 것입니다. 3줄로 말할 수 있는 것을 고의로 책 한권으로 내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결론을 듣고 싶지만 그런 글이나 책은 결론으로 가기 전에 어떤 기초적인 것들을 나열합니다. 그런 것들을 듣기 전에는 결론은 알 수 없는 것이 되고, 그 의미도 전혀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결론이라는 것은 대개 전체 글이나 책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자연히 그것은 어떤 복잡한 개념이나 단어들을 포함하게 됩니다. 이때문에 기초적인 것들없이는 결론에 해당하는 요약이 이해되기 어렵습니다. 어떤 책의 결론이 미래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그 문장만으로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측이라는 단어를 더 잘 이해해야 하지요. 그냥 일상에서 들었던 피상적인 말들만으로는 이 문장이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겁니다.
짧은 글만 읽는 사람들은 말하자면 수학을 구구단까지만 배우고 인수분해나 미적분은 배우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사고력은 점차로 떨어지게 되어 세상을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 어떤 보편적 법칙속에서 파악하려는 노력은 중단되게 될 것입니다. 일찌기 사람들이 대부분 문맹이었던 시기에는 온갖 신화와 마술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났습니다. 그 시대는 무당의 시대, 모든 것이 살아있고 신이라고 여겨지던 신화의 시대였습니다. 농사가 되지 않거나 부엌의 음식이 상하면 과학적 이유를 생각하기 보다는 농사의 신이나 부엌신의 분노를 생각했던 시대였죠. 이것은 읽고 쓰는 것이 인간의 지능과 아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말입니다. 읽고 쓰지 않으면 인간 이하가 되는 겁니다.
오늘날 멀티미디어가 발달하면서 문자 문화가 퇴조하고 있습니다. 드라마가 있는데 소설은 자극이 작습니다. 실제로 방문한 사람이 찍은 사진이나 영상이 넘쳐나는데 기행문을 읽는 사람은 줄어듭니다. 전화 아니 문자보내기가 되는데 편지를 써서 친구에게 자기 마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이제 거의 없습니다. 한 페이지의 글을 써본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나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학교에서 조차 선생님이 말하는 것을 자신이 요약해서 필기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의 말을 그저 듣고, 선생님이 준 ppt파일을 보거나 강의를 녹화한 것을 다시 보는 일에 익숙한 학생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말은 짧아지고, 시험에서 나오는 지문보다 긴 글을 읽거나 쓰는 일이 없는 아이들이 늘어납니다. 이제 미래에는 문자문화가 망하고 구술문화로 돌아가게 되는 걸까요?
저는 우리가 과도기를 살고 있을 뿐이며 그래서 이런 예측이 옳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걸 20세기 초의 사람들이 상상한 미래인들의 모습에서 알 수 있습니다. 타고다니는 것이 극한으로 발달한 미래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게 될까요? 사람들은 자동차만 타고 다니고 머리만 쓰기 때문에 팔다리는 가늘어 지고 뚱뚱해집니다. 머리만 커집니다. 이게 과거 사람들의 미래 사람들에 대한 상상이었습니다.
그런데 21세기를 보면 소위 짐승남이나 섹시녀가 부자이고 능력있는 엘리트들입니다. 특히 비만환자가 많은 미국에서는 비만은 가난의 상징과도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20세기초의 사람들이 상상한 미래 사람은 주로 미래의 가난한 사람들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작 잘사는 사람들은 근육질에, 나이보다 훨씬 젊어보여서 마치 동굴에 살던 야만인 비슷한 몸을 가지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 그들은 동물을 사냥할 일도, 먹이를 구하기 위해 하루 종일 뛰어다닐 일도 없는데 외모만 보면 그렇습니다. 이는 단순히 성적인 매력때문만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몸을 튼튼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그걸 잘 할 수 있는 방법도 개발됨에 따라 오히려 더 야성적인 외모를 가진 사람이 늘어난 겁니다. 사람들은 돈과 시간을 써서 몸을 단련합니다.
미래에는 분명 기계에 의존한 나머지 거의 문맹 수준으로 구술문화로 돌아가 버린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움직이지도 않을 겁니다. 문자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으로 미래에도 지능을 유지하고자 하는 인간들은 지금보다 오히려 더 많이 읽고 쓸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멀티미디어는 물론 그걸 써서 잘 설명을 해줄 AI도 있을테니까요. 하지만 먹이를 위해 달리는 것이 아니라 단련을 위해 달리는 사람들이 요즘 많이 있듯이 미래에도 단련을 위해 쓰기와 독서에 매진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아마 지금보다도 훨씬 더 많은 쓰기와 독서를 하는 사람들이 흔해질 것입니다. 그들은 편한 것만 추구하다보면 몸이 약해진다는 것을 알듯이 불편해도 낡은 문자문화에 충실한 것이 정신적 건강에 중요하다는 것을 오히려 지금보다 더 명확히 이해할 것입니다. 차를 타고 갈 수도 있는데도 굳이 걷는 것은 걷기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유튜브 동영상을 보는 일은 쉽지만 그걸 만드는 일은 대개 자료를 읽고 원고를 쓰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이건 단순 소비자가 될 것인가, 컨텐츠 크리에이터가 될 것인가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오히려 학교를 벗어나고 나서야 읽고 쓰는 것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일이 많은 것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최근의 언어 파괴나 문해력 저하를 그저 자연스런 문화적 변화라고 말하면서 문자 문화의 중요성을 말하는 사람을 그저 보수적인 사람들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물론 정도 나름에 따라서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일반적으로 이것은 오해입니다. 자동차가 나온다고 걷기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자동차 타기에 중독된 사람들은 말하자면 멸종의 길을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모두가 이 길을 가지 않습니다. 문해력 저하를 자연스런 문화적 변화로 파악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자연스런 변화가 아닙니다. 퇴화입니다. 그리고 그런 퇴화과정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사람만이 발전된 미래와 어울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콜라나 초컬릿이 있다고 짐승처럼 죽을 때까지 먹는 사람은 짐승처럼 변해서 죽을 따름입니다. 문자 문화는 사라질 수 있는게 아닙니다. 양자역학의 시대에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는 고전역학적으로 사고하면서 삽니다. 문자가 필요없어지는 AI의 시대가 와도 인간의 사고는 문자 문화에 의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편한 환경에 중독되어 그걸 포기한 사람들은 점차로 사고력이 떨어져서 뒤쳐지는 사람이 될 뿐입니다. 종국에는 짐승으로 변해서 AI의 노예가 될 뿐이겠죠. 미래 인간들은 문자문화와 무관할 거라는 상상은 미래 인간들은 차가 있으니 걷지 않을 거라는 상상과 같은 허구입니다.
'주제별 글모음 > 이해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해력, 문화전쟁 그리고 지능 (0) | 2023.11.29 |
---|---|
메타 철학 혹은 철학 패러다임 (0) | 2023.11.02 |
과학과 철학의 사이 (2) | 2023.09.14 |
상대주의라는 말의 함정 (0) | 2023.09.05 |
마음과 영혼 (0) | 2023.09.0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