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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이해하기

기억, 문자, 과학, AI 그리고 자아

by 격암(강국진) 2024. 2. 9.

우리는 세상을 보고 듣는다. 이런 감각 신호는 우리의 지식의 기반이 된다. 이것은 널리 받아들여진 지식론의 기본이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 보면 이것이 설혹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뭔가를 안다는 것에는 그것이상의 매개체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감각이 있다고 하더라도 기억력이 전혀 없다면 안다는 상태에 도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문자를 사용하기 이전의 수렵채집인의 상태에서도 나라는 자각이 있고, 곰이나 나무같은 것을 말하고 인식했다면 그것은 우리가 기억력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그 기억이란 바로 감각신호의 기억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문자 문화 이전의 구술문화에서 뭔가를 안다고 하는 것 즉 지식의 본질은 주로 시각이나 청각, 촉각등의 감각신호를 기억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 중에서도 사회적으로 중요한 것은 청각인데 왜냐면 언어가 음성 즉 소리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것은 우리가 구술문화 단계를 넘어 문자 문화의 세계로 들어섰을 때도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뭔가가 기록되어 인간의 기억 능력이 증폭되었을 때 우리가 인식하고 말하고 아는 것은 실질적으로 문자가 된다. 그리고 존재는 그 매체의 특징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구술문화속에서 나라는 것은 음성처럼 기억되지만 차차 변하고 사라지는 것이었다면 문자 문화속에서의 나라는 것은 시간을 견뎌내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 될거라는 것이다. 뭔가의 위에 A가 B에게 양 한마디를 빌려주고 갚기로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해보자. 이런 기록은 A나 B나 양이라는 것은 시간에 무관하게 그리고 심지어 공간에 무관하게도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다면 나에게 양을 빌린 B는 이미 같은 사람이 아니라서 나는 누구에게 양을 요구해야 하는지 모를 것이고 양이라는 것도 어제나 의미가 있고 오늘은 그게 뭔지 모르는 것이라면 내가 요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문자 사용의 발달에 따라 증폭된 이성은 존재를 문자를 통해서 기록하고 인식하게 되고 따라서 존재는 문자의 특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나 유교의 정명론같은 것이다. 문자 문화속에서는 글자로 써진 것이 그 존재 자체로 여겨진다. 왜냐면 사실은 문자를 통해서 사고가 발달하고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지식이 문자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확한 측정을 통해서 시공을 초월하는 자연법칙을 찾고 그런 지식의 시스템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는 과학혁명의 이후에는 세상을 다르게 볼 수 밖에 없다. 과학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문자로 소통하고 말로 소통하며 문자로 지식을 저장하지만 이제 하나의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매우 정확히 정의되고 측정될 수 있는 것으로 변했다. 그러므로 존재는 다시 한번 더 바뀌게 된다. 이제 존재는 물질이 된 것이다. 정확히 측정가능한 대상이란 과학의 대상이며 물질이기 때문이다. 

문자문화가 시작됨에 따라 나라는 것은 다른 모든 존재와 같이 보다 변하지 않는 것이 되었다면 이제 과학의 시대에서 나는 훨씬 더 물질적인 것이되었다. 거기에는 부정확하고 신비로운 요소는 없다. 나는 곧 물질이고 기계다. 나는 세포로 나아가 탄소화합물들로 이뤄진 기계가 작동하는 상태인 것이다. 나의 팔다리는 기계이며 내장도 공장의 작업라인과 같고 두뇌는 컴퓨터와 같다. 세계를 과학의 눈으로 볼 때 나를 포함한 존재는 기본적으로 이렇게 파악된다. 

 

낭만주의는 이런 물질적 견해에 대해 저항했지만 거기에는 또렷한 한계가 있었다. 낭만주의는 지식을 만드는 방법론이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과학이나 계몽주의가 가진 문제를 완화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러므로 과학적 지식이 누적되어감에 따라 과학의 힘, 시스템의 힘이 더 커지는 것을 정말로 막을 수는 없었다. 언어를 초월한 뭔가가 있다고 말해봐야 그런 것을 지식화할 수 없다면 그것은 대안적 시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AI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그리고 AI는 정보를 특정한 과정 즉 컴퓨터 최적화를 통해 누적 시켜서 만들어 진다. 훗날 진정한 AI의 시대가 온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기본적으로 AI로보 게될 것이다. 이때문에 사람들이 느끼는 존재의 특성은 다시한번 변화하고 모든 것은 어떤 정보들이 오랜 시간동안 누적되어진 결과로 여겨질 것이며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는 이해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이에 따르면 뇌는 AI다. 이 말은 좀 역설적이고 이상하게 들리지만 사실 진화의 과정보다 AI 패러다임이 더 폭이 넓다. 진화는 생명체가 환경에 적응하며 변해온 과정을 말하는 것이지만 AI는 어떤 모델이 최적화과정을 걸쳐서 변화해 왔다는 것이기 때문에 진화과정을 포함할 수 있고 뇌같은 결과물 나아가 생명을 AI의 자연판이라고 해석할 여지를 준다. 즉 컴퓨터 최적화로 만들어 지는 것이 AI라면 자연이라는 환경속에서 최적화되어 만들어 진 것이 생명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지식의 본질이 단순히 감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정보를 기억하게 만드는 매체의 특성들에 의존하는 것이며 그것이 시간에 따라 바뀌어 왔다면 우리는 자연히 그 매체의 특성에 따라 중요한 것을 결정하게 된다. 축구 프로 리그에서는 축구를 잘하는 사람이 훌룡한 사람인 것처럼 음성으로만 소통을 한다면 말을 잘하고 말을 잘 기억하는 사람이 지식이 많은 사람이고 따라서 말로 잘 표현되는 것이 주로 기억되고 존재하게 될 것이다. 만약 어떤 것이 누구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특성을 가진다면 그런 것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결국 그것은 기억되지 못하고 사라져서 존재자체가 의심될 것이기 때문이다. 낭만주의자들의 말이 그렇듯이 말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기억을 통해서 본다. 예를 들어 인간의 역사란 결국 기록을 통해서 우리에게 온다. 뒤집어 말하면 기록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기 쉽다. 이때문에 우리는 몇만년에서 몇십만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선사시대에 대해서는 아는게 거의 없다. 그리고 문자문화가 보편화되기 이전의 사람들과 우리를 동질화하지 않는다. 플라톤이나 공자는 2천년전의 사람인데 친구처럼, 스승처럼 느낀다면 글자로 기록을 남기지 않은 만년이나 이만년전의 사람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이렇다고 할 때 기록이란 기억이고 결국 기록되지 못한 것은 잊혀지며 가치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연히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기록을 남겨야 가치있는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피라미드를 만들거나 광개토대왕비처럼 거대한 석비를 세우고 그 위에 내 이름을 적고 후세가 모두 알게 해야 나의 인생은 가치가 있을 것이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나에 대한 기록도 내가 쓴 책도 한권없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열망은 과학자들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시공을 초월하는 과학적 지식을 발견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마치 지구의 표면위에서 떠올라 신적인 존재가 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누구도 이러저러한 과학적 지식을 몰랐는데 그걸 내가 발견한 것이다. 게다가 과학적 지식은 엄밀한 것이므로 인문학적 지식처럼 혼동되지도 않는다. 내가 산소 원자를 발견했다면 그것은 영원한 결론이다. 물론 아침에 호숫가에 나가서 본 모습을 말로 적은 것도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체험의 기록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러한 특수한 경험의 기록 안에는 보편성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철학으로 문학으로 과학으로 이 세상을 관통하는 보편적 지식을 찾았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가치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여전히 유명해 지고 싶어하고, 책을 남기고, 그 영향력을 영원히 남기고 싶어한다. 이걸 단순한 허세라고 할 수는 없다. 이것은 삶의 의미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발로 걷어찬 개울물은 곧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우리는 그런 이름없는 물의 출렁임 같은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는 인정하기 싫어한다. 그건 아무 의미가 없어보이고 그 이유의 근원에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지식과 그 지식을 만들어 내는 매체의 특성이 연관되어 있다. 

 

AI 시대는 이런 불안으로부터 해방되는 시대다. 글이나 그림으로 혹은 말로만 모든 것을 표현해야 하던 시기에 글도 쓰지 못하고 말주변도 없으며 그림도 그리지 못하는 사람은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아무 것도 물어보지 못할 것이다. 왜냐면 그는 소통을 위한 기본적인 도구가 없기 때문이다. 글도 못쓰고 말도 못하고 그림도 못그리니 그 사람이 설혹 서울에 다녀왔다고 한들 그 사람에게 서울이 어떤 곳이냐고 물어봐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지난 몇십년간 사람들이 스마트폰에 열광했던 이유중의 아주 큰 하나는 사진을 찍고 전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도 사진을 찍을 수 있고 보낼 수 있다. 그리고 좋은 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어떤 기행문이나 말보다 더 확실하게 정보를 전달해 준다. 하루 종일 인스타 그램에 사진을 찍어 올리지만 글이라면 한줄도 쓰지 못하는 사람들은 뒤집어 말하면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는 장애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소통의 도구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게 생겼으니 마치 벙어리가 말문이 트인 것처럼 그것에 열광할 수 밖에 없다. 

 

AI는 인간의 정보를 기억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의 지능을 증폭해 준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들이 뭘 하며 살았는지를 모두 기억할 수 있고, 그걸 표현해 줄 수도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지구상에 있었던 어떤 나라보다도 더 많은 기록을 남겼지만 그게 대부분 한자다. 그러다보니 글을 쓰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은 거의 다가 사라졌다. 우리가 만약 그 모든 정보를 지금 드라마를 보듯 멀티미디어 정보로 다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조선시대를 보는 관점은 크게 다를 것이다. 예를 들어 그것은 왕이나 선비 중심이 아닐 수 있다. 그들은 기록을 남긴 주체로 자신들의 역할을 과정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일찌기 조선시대의 실학자 정약용은 사람이 태어나서 책도 남기지 않으면 그게 짐승과 다를 것이 무어냐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누구 보다 많은 책을 남겼고 그 무수한 조선 사람들 중에서 가장 기억되는 사람중의 하나가 되었다. 한국의 대통령들은 어떻게 평가되건 한국의 사회적 인프라를 만든 사람들로 기억된다. 군대는 누가 개혁하고 다리는 누가 놓았으며 대학은 누가 만들고 고속도로는 누가 깔았냐고 사람들은 말한다. 

 

AI의 시대에 존재의 본질은 AI가 된다. 그것이 지식을 만드는 주류적 방법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AI의 핵심은 데이터다. 그때에는 인간이 태어나서 아무 데이터도 남기지 못한다면 그게 짐승과 다를 것이 무어냐고 하지 않을까? 우리는 지금 다시 보지도 않을 디지털 사진들을 열심히 찍고 있지만 그 때는 개인용 AI가 우리의 데이터를 계속 기록하고 관리하지 않을 까? 그리고 점점 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데이터가 우리 자신이 될 것이다. 특히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 그렇다. 아무 데이터도 남기지 못한 사람은 부끄런 삶을 산 사람이거나 의미가 없는 삶을 살았다고 기억되기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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