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이해하기

객관과 현실

by 격암(강국진) 2024. 3. 5.

일찌기 물리학자 슈뢰딩거는 그의 책 마음과 물질에서 현재의 과학은 자아를 포함하지 않으므로 개정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양자역학을 포함해서 오늘날의 과학이란 관찰자를 그 세계상에서 제거하고 만들어 지는 것인데 그 결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의 세계속에서 찾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객관성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객관적인 것을 현실이나 실체로 여긴다. 그리고 과학은 객관적인 것을 대상으로 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자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어떻게 파악하던 적어도 일정부분이 주관적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의식에 대해 말해 보자. 의식은 주관적인 체험이다. 잠을 자지 않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확실히 안다. 나도 알고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자신이 의식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의식이 무언가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여기서 주관성을 보며 객관성을 찾기 어렵다. 다른 사람들은 정말 의식이 있는건지 내가 알 방법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들이 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하지만 동물은 의식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개는 의식이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벌레나 물고기는 의식이 없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주관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이런 혼란과 어려움은 마음과 물질이라는 이원론이 만들어 진 원인이며 따라서 우리는 물질이 아닌 마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어떻게 전혀 다른 마음과 물질이 인과론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는 문제를 가지게 된 것이다. 마음이라는 말로 우리 자신을 구원했다고 여겼지만 우리가 마음에 따라 손을 올리고 내리는 것도 설명을 하지 못해서 여전히 우리 자신을 그냥 구경꾼, 부수적 현상정도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슈뢰딩거는 객관적인 것을 다루는 지금의 과학은 주관적인 우리 자신을 다루지 못해서 한계를 가진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과학적 세계상 속에서 유령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객관이 뭐고 현실이 뭘까? 이것들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주관과 객관의 관계가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일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객관적인 것이 현실이고 주관적인 것은 환상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꼭 그렇지 않다. 객관이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같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아주 객관적이라는 것의 의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확인을 거쳤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어떤 공이 다른 공보다 크다고 느끼냐는 질문을 전국민에게 물었다고 하자.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공이 다른 공보다 더 크다는 것은 객관적인 관찰사실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종종 측정을 등장시킨다. 사람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자로 공의 크기를 측정했더니 이 공이 저 공보다 크다고 나왔다면 우리는 그것을 객관적이라고 말한다. 왜냐면 어떤 자의 측정결과는 이미 아주 많이 확인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대신에 자같은 도구를 써서 측정한 결과를 우리는 객관적이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15cm 자가 30cm 자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면 우리는 측정된 길이를 객관적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여담이긴 하지만 상대성이론은 길이에 대한 객관성을 재정의하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관찰자와 관찰대상 간의 상대속도를 말하지 않는 거리측정은 불확실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객관성에 대한 논의를 차분히 생각해 보면 객관성이란 매우 관념적인 것 혹은 추상적인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많은 이론과 데이터의 결과이다. 선사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객관성이라는 개념이 필요없었을 것이고 이해가 잘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객관과 주관따위의 구분은 필요없다. 그냥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즉 이 공이 저 공보다 더 커보인다면 우리는 우리의 감각기관을 의심할 필요가 없으며 그것은 사실 그 자체다. 말하자면 주관적 체험이 현실 그 자체다. 그런데 문명화가 진행되면서 특히 과학이 발달한 시대가 되면서 우리는 우리의 감각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객관과 주관이 분리되고 매우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며 많은 이론과 데이터를 전제해야 설명할 수 있는 객관이라는 개념이 퍼지게 된 것이다. 

 

이 점을 생각해 보면 여기에는 놀랍고 재미있는 면이 있다. 우리는 보통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달다라는 느낌보다 추상적이라고 느낀다. 달다는 것은 직접적인 체험이다. 그런데도 객관이란 우리가 이런 추상적인 개념이 더 현실적이고 실체적이라고 굳게 믿는 것이다. 왜냐면 모든 사람들의 확인을 거쳤기 때문이고 많은 데이터와 믿을 만한 이론이 그것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민주주의같은 개념이 달다라는 느낌보다 더 현실적이라고 느끼게 된 것이 바로 객관이다. 우리는 보통 물질을 가장 객관적인 존재로 여기는데 아래에서 더 말하겠지만 물질만큼 추상적인 존재가 없다. 객관이라는 개념은 애초에 추상적이다.

 

이것은 보통 물질같이 객관적인 것이 가장 덜 추상적인 것이며 확실한 실체라고 느끼는 보통의 생각과는 반대이다. 이 점을 생각해 보기 위해 예를 들어 보자. 우리는 보통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땅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같다. 그런데 우리는 객관적으로 말해서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직접적 감각보다 지구가 돌고 있다는 지식이 더 확실하다고 믿는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어떤 빵을 먹었는데 그 맛이 짜다고 느끼는 경우에도 '이건 사실은 달지, 내가 잘못느끼고 있을 뿐이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유령을 보게 되었을 때도 우리는 유령을 믿지 않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우리의 눈에 보이는 저 유령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은 생생한 실체인가? 여러분이 의자에 앉아 있거나 책상에 몸을 기대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 의자나 책상이 단단한 물질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이 현실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사실 물질에 대한 객관적 진실은 그런게 아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물질에 대한 생각은 우리의 일상 언어속에 포함된 것이며 우리가 진짜 현실이라고 여겨야 할 물리학에 따르면 모든 물질은 원자로 이뤄져 있고 원자는 그 대부분의 공간이 비어있다. 우리가 의자를 투과해서 밑으로 빠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며 그것은 일상경험과는 다른 양자효과의 결과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상언어를 통해서 생각하는 현실이란 물리학이 밝혀낸 진짜 현실과 다르다. 이것은 객관성이라는 것이 이론과 데이터에서 나온 추상적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여기서 이론과 오차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자. 아래의 그림은 많은 점들과 그 점들을 설명하는 하나의 직선을 보여준다. 

 

객관이란 말하자면 여기서 보여주는 점들이 아니라 그 점들을 설명하는 선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데이터는 X축과 Y축으로 표현된 두가지 양들 사이에 직선이 보여주는 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 직선을 벗어나는 오차들은 뭘까? 그건 관찰과정이나 해석과정에서 등장하는 오류로 중요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들은 무시되고,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직선을 더 '현실'로 여긴다. 그것이 객관적인 실체다. 슈뢰딩거가 말하는 현대과학의 한계란 말하자면 객관성을 추구한 나머지 우리 자신을 오차처리해 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과거의 역사는 우리가 오차처리해 버렸던 것 중에는 아주 중요한 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고전물리학의 시대가 끝나고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과학 혹은 우리의 세계상속에서 우리자신도 발견하지 못하는데 우리가 오차처리해 버리고 객관적이지 않다고 여기는 것중에는 중요한 것이 정말 없을까? 정말 객관적인 것이 가장 실체적인 것이 맞는가? 객관이라는게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객관을 이론으로 여길 때 데이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게 아니라 객관을 믿어야 한다는 믿음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객관이란 거대한 사회와 발달한 문명이 만들어 낸 추상적인 관념이고 사상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교육과 정보의 누적과 사회적 소통이 있을 때만 존재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우주가 인간이 이 지구에 등장하기 전에도 존재했다고 믿는다. 그것은 한편으로 옳은 이야기이지만 어떤 객관성을 이미 받아들인 뒤의 이야기다. 지금도 소나 돼지는 인간의 우주론을 이해할 수 없고 그들에게 이 우주가 수십억년전부터 존재했었다는 말은 의미가 없다. 그들은 객관이라는 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에게 우주가 생명이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다는 이야기는 마치 세익스피어의 희곡은 세익스피어가 그것을 쓰기 전에 존재했었다는 이야기처럼 알 수 없는 이야기다. 현실 그 자체는 언어 이전에 있다. 그러므로 그것이 어떤 언어이건 -물리학이건 일상어이건- 언어로 파악된 현실은 이미 이론적 해석의 결과이고 추상화의 결과다. 그리고 객관성이란 언제나 비교와 데이터 축적의 결과이므로 현실 그 자체일 수 없다. 

 

내가 요즘 쓰는 글에서는 항상 마지막에 AI가 등장한다. 그 이유는 AI에 대한 생각이 요즘의 내 생각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AI에 대해 말하지 않고서는 이 글을 그래서 마칠 수가 없다. AI는 주관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않다. AI는 이제까지 다룰 수 없었던 양의 데이터를 다룰 수 있게 해주는 기술이다. 말하자면 AI 이전의 인간이란 세상을 어떻게든 이해해야 하기때문에 아주 단순한 이론을 등장시켜서 가지고 있는 데이터를 압축했고 그 결과를 객관적 세계라고 여기면서 살았던 인간이다. 그런데 AI는 인간의 정보 처리 능력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킨다. 문자 시대 이전의 수렵채집인은 객관과 주관의 차이따위는 몰랐다. 문명이 등장하고 객관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제 훨씬 더 이론에 대한 제약없이 많은 데이터를 다루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현실을 가지게 될까? 그 시대에 객관과 주관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무엇이든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고, 던져야 하는 시대를 살기 시작했다. 슈뢰딩거가 말하던 현대과학의 한계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시대를 말이다. 

 

'주제별 글모음 > 이해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제와 해법  (2) 2024.04.10
인간이란 무엇인가?  (0) 2024.03.20
시인과 과학자는 왜 이해하기 어려운가?  (0) 2024.02.20
기억, 문자, 과학, AI 그리고 자아  (1) 2024.02.09
세상은 흔들린다.  (1) 2023.12.2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