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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by 격암(강국진) 2024. 3. 20.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아마도 모두 인간일 것이며 스스로를 인간으로 여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란 무엇인가? 예를 들어 인간이 아닌 존재는 짐승이 있으며 사람들은 나는 인간이지 짐승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다윈의 진화론은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인간과 짐승 사이에 존재하는 장벽에 구멍을 뚫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인간과 원숭이가 같은 조상을 가졌다는 생각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조금 더 일상적인 예를 들어 보자. 나는 남자들에게 당신도 어쩔 수 없는 남자군요라고 말하기 좋아하는 여자들을 몇번이나 본 적이 있다. 그들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있었다. 그녀들이 말하는 것은 남자들은 그저 여자와 섹스를 원하며 절제를 할 줄 모를 뿐 그녀들이 생각하는 진정한 사랑따위는 모른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니까 애인이 있고 아내가 있어도 다른 여성이 유혹하면 흔들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도 나에게는 어떤 의문감을 남겼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그 말을 자꾸 반복해 보면 남자는 짐승이다와 같은 말로 들리고 그걸 다시 반복해 보다 보면 그럼 남자가 아니 인간이 짐승이 아닌 줄 알았다는 말인가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즉 그녀들은 짐승과는 전혀 다른 어떤 남자상 혹은 인간상을 만들고 그것이 되지 못하는 남자들을 비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의 사고는 남녀 문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어떤 추상적인 인간상을 만든다. 그 인간상은 짐승과는 다르다. 그리고 본인이 그런 인간이 되지 못하는 것을 괴로워하는 것이다. 자제하지 못하고 유혹에 흔들리는 자신을 슬퍼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아주 많지 않은가? 특히 종교와 관련해서 우리는 이런 태도를 흔히 본다.

 

물론 이 반대의 경우도 있다. 낭만주의의 후손인 그들의 논리는 이렇다. 그들은 먼저 스스로가 인간임을 당연시하고 인간을 매우 소중한 존재라고 선언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본성 즉 인간의 타고난 본성대로 사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주장한다. 난 다른 누구도 되고 싶지 않으며 나는 나일 뿐이라고 말하는 그들의 말은 언뜻 들으면 멋지지만 현실에서는 언제나 그렇게 멋지지 않다. 나는 나일 뿐이라고 말하는 그들은 내가 누구인지, 인간이란 무엇인지는 자명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물론 그것은 그렇게 자명하지 않다. 그래서 그런 말은 윤리적 타락과 방종에 대한 변명만 되고 말기 쉽다. 인간 이하가 될까봐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때로 딱하지만 본인이 뭘하건 자신은 인간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확신도 때로 딱한 것이 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풍조를 지적하면서 일찌기 슈뢰딩거는 인간의 본질은 자기 자신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자신을 초극하는데 있다고 말했다. 즉 인간이란 어떤 고정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화하고 발전하고 성장하려는 모습에 그 핵심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을 의식에서 찾는 그는 같은 것이 반복될 때 우리의 의식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 알듯이 학습하고 성장하지 않으며 그냥 같은 일을 반복하려고 할 때 우리는 사라지고 만다고 말한다. 그래서 인간의 핵심은 지금의 자신을 부정하고 한발 더 나아가 새로운 것을 학습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의 답은 결코 최종적으로 답해 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알고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이게 인생이구나를 느끼듯 우리는 결국 어떤 구체적인 체험과 사실들 속에서 조금씩 더 인간이 뭔지 인생이 뭔지를 알아 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의 음표의 뜻이 모여서 음악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음표가 놓여진 위치가 전체 음악에서 그 음표의 뜻을 만든다. 일찌기 인간을 묻는다를 쓴 제이콥 브로노우스키도 인간의 정체성이란 변하는 것이며 우리가 어떻게 지식을 얻고 우리와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그 정체성이 변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은 인간은 뭔지 알겠는데 인간인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것같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실은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가 인간이 뭔지를 우리에게 조금씩 더 가르쳐 준다. 특정한 상황에서 내가 이러저러하게 행동하고 선택하더라하는 것이 내가 누구인지를 가르쳐 준다. 강한자가 살아남는게 아니라 살아남는자가 강한 것이다라는 말도 있다. 우리는 강한자가 뭔지 알기에 살아남는게 아니라 살아남는 사람들을 보면서 강한게 이런 거구나라를 배우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인간은 역사에 의해서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존재라고 할 수 있으며 과거의 경험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수없이 많은 정보들이 누적되고 유실되면서 지금의 인간을 만들었고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미래에도 계속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세상이나 환경 혹은 도구의 내면화를 뜻한다. 즉 온 세상이 나는 아닐지라도 나라는 것은 혹은 인간이라는 것은 주변의 것을 흡수하고 하나가 되는 내면화를 진행하면서 변해왔다는 것이다. 물질주의에 중독된 사람들은 인간이라고 하면 인간은 그저 인간의 DNA를 가진 인간이라는 종족의 후예라고 이해할 것이다. 그러니까 유전적 진화가 일어나는 시간의 규모안에서는 인간은 고정된 물질적 의미를 가진다. 사실 편의상의 일이기는 하지만 법적으로 인간은 이렇게 정의된다. 그리고 원한다면 이런 정의를 받아들이고 이걸 인간이라고 불러도 좋다.

 

하지만 그건 표기법의 문제에 불과하다. 우리가 고민하고 걱정하는 문제가 이름을 다르게 붙인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인간이 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는 순간이 있다고 할 때 우리는 지금 내가 인간의 DNA를 가지지 않았을까봐 걱정한다는 말인가? DNA로만 보면 인간은 침팬지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호모 사피엔스 이전에도 구석기를 쓰는 존재들이 있었고 그때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걸 인간이라고 부른다면 인간의 역사는 적어도 4백만년은 된다. 우리가 인간이라고 말하는 존재는 그 긴 선사시대를 살았던 수렵채집인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을 발명하고 우주를 내다보고 그저 먹고 번식하다가 의미없는 죽는 존재가 아닌 타고난 존재 이상의 존재가 되는 뭔가다.

 

나는 사실 그래서 사이보그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DNA로 정의되는 자연 그대로의 인간을 인간이라고 정의한다면 현대인들이 나는 인간이다라고 말할 때의 그 인간은 사실 인간이 아니라 사이보그라는 것이다. 사이보그는 지식을 도구로 해서 고차원적인 사고를 만들어 낸 문명인이다. 인간이 사이보그인 까닭은 인간은 인위적으로 발명한 기술을 내면화해서 문화적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발명이 쓰고 읽는 능력이다. 상징을 쓰고 읽는 기술을 발명함으로서 인간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

 

수렵채집인과 문명인의 가장 큰 차이는 문명인이 자동차를 탄다는 것이 아니다. 자동차는 탈 수도 있지만 내릴 수도 있다. 더 큰 차이는 정신이고 정체성이다. 우리는 이 정신이나 정체성으로부터는 마음대로 타고 내릴 수 없다. 예를 들어 수렵채집인은 돈을 모르기 때문에 직장인이 되어서 일하는 것을 모른다. 주식투자를 하거나 유명해지기 위해 밤낮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을 그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조선시대와 현대와의 차이도 마찬가지다. 현대적인 기계를 쓰는 것은 두 시대간의 차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사람들은 스스로를 왕의 백성이라고 여기고 현대 한국인들은 평등한 시민이라고 여긴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공부는 귀한 분만 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현대 한국인들은 교육은 시민의 타고난 권리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누구로 생각하고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이 두 시대의 가장 큰 차이이다.

 

이런 차이는 물론 유전적인 차이가 아니라 문화적인 차이다. 그리고 문화적 차이란 결국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졌기에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도 달라졌다는 뜻이다. 우리는 현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란 인간이며 천년전에도 만년전에도 인간은 인간이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건 옳지 않다. 우리가 개나 돌고래같은 짐승에게 모두 어떤 신기한 스마트 모자를 씌워주었다고 하자. 그 결과 그들은 서로와 소통하고 사물을 기억하는 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그래서 더 큰 사회를 구성하고,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하게 되어 문명적이고 지적인 동물로 변하게 되었다. 이렇다고 할 때 개나 돌고래는 그 신기한 스마트 모자를 쓰기 전에도 원래 그런 동물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실은 그 스마트 모자와 하나가 됨으로해서 그들이 진화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인간은 구석기를 발명하면서 혹은 농사기술을 습득하면서 새로운 존재로 진화했다. 증기기관이나 전기를 발명해서도 그랬다. 우리는 물질주의에 중독된 탓인지 도구라고 하면 주로 어떤 물질적인 형태를 띈 것만으로 생각하지만 문자도 도구다. 그리고 그 도구와 하나됨으로 해서 인간은 새로운 존재로 진화한 것이다. 이는 문자 이외의 다른 도구들에 있어서도 사실이지만 문자만큼 대단한 결과를 남긴 도구는 이제까지 없었다. 왜냐면 문자는 정보를 기록하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경험의 총체가 지금의 우리라는 말이 기억나는가? 정보를 기록하는 방식이 달라지니까 문화적 진화의 속력이 말도 안되게 빨라진 것이다. 이제는 한번 말해진 것은 두 번 말해질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수천년전에 이집트인이 쓴 기록도 현대에 읽는다. 인간은 인간이 발명한 도로며 건물속에도 인간이 만든 옷이며 음식들 속에도 존재하지만 다른 어떤 곳보다도 인간이 만들어 온 책들이 모여있는 도서관과 인간들이 일상에서 쓰는 언어안에 더 많이 존재한다. 인간은 정보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보다 엄밀한 측정에 기반한 표준화를 도입했다. 그래서 이제는 한번 발명된 것은 두 번 발명될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지금도 플라톤의 말을 해석하고 공자의 말을 해석하면서 이게 무슨 뜻인가를 가지고 고민하지만 과학은 다르다. 과학은 무섭게 지식을 누적시키고 단 몇세기만에 세상을 완전히 바꿨다. 그래서 인간을 우주를 정복하고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다. 이제 우리가 가진 지식은 훨씬 더 늘어났고 인간은 그만큼 다른 존재가 되었다.

 

이런데도 관행적으로 사회적으로 아직도 우리는 인간을 그저 인간의 DNA를 가진 육체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이란 그냥 신비하게 태어나 짐승과는 전혀 다른 이성을 소유한 존재이며 우리가 흔히 인간의 몸이라고 부르는 그 벌거숭이 육체를 말한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환경과 우리를 확연하게 구분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팔이 없어도 인간이다. 심지어 목 아래가 전부 없어도 살아있으면 인간이라고 여겨질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전두엽이 없어도 인간인가? 후두엽이나 전정엽은 어떤가? 뇌의 절반이 없어도 인간인가? 내 말의 요점은 이런 식으로 인간의 핵심을 어떤 고깃덩어리안에서 찾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망치를 도구로 부른다면 팔다리도 도구다. 그리고 눈도 시각피질도 도구다.

 

결국 모든 것이 연결된 가운데 그 안에서 인간이 출현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법을 정해야 하기에 어떤 관행이 있는 것은 어느 정도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어서는 안된다. 말하는 법을 익히고, 쓰고 읽는 법을 익히면서 우리는 조금씩 더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 싼 환경의 모든 것이 우리가 의지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일부가 되고 있다. 우리는 그 환경을 바꿔가면서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환경적 변화의 핵심에는 정보의 누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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