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스스로를 중립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런 말이 무지하고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불교, 기독교, 힌두교같은 여러 종교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 가서 나는 종교에 대해 편파적이지 않고 중립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이 세상에 하나뿐인 중립적 종교를 믿고 다른 사람들은 편파적이라는 것이다. 사상과 종교같은 것을 말할 때 중립적이라는 말은 그저 내가 믿는 것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라고 단언해 버리는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태도가 세상에 흔한 것은 과학의 영향이 크다. 과학은 이런 의미에서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엄밀하게 측정된 데이터에 기반해서 만들어 지는 지식체계다. 그래서 세상에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만 존재한다. 절대적 객관성을 주장하는 셈이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예측을 하는 과학이 모두 옳을 수는 없다. 그런 과학 문화가 세상에 널리 퍼진 것이 근대화의 핵심이었고 깊은 고민도 없이 팩트가 중요하다같은 말을 앵무새 처럼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 어느새 우리는 객관성이라는 것이 어디나 있을 수 있고 오직 객관적인 것만 중요하다는 생각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객관성은 엄밀히 말해 허구다. 첫째로 테두리 없는 객관성은 없다. 예를 들어 한국인의 상식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동의하는 사실이라고 말해보자. 이 말은 한국인의 상식은 한국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객관성은 한국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사실이다. 한국 사회 바깥에서는 객관적이지 않다. 그런데 이런 객관성이 아니라 정말 테두리 없는 객관성이라는게 있을 수 있을까? 없다. 심지어 과학조차도 이런 의미에서는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면 과학도 인간의 측정 데이터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가진 데이터는 무한이 아니다. 이때문에 몇백년간이나 진리 그자체로 여겼던 고전역학도 결국은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으로 대체된 것이다. 무한히 작은 세계, 무한히 빠른 속력으로 가면 고전적 세계관이 옳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고전역학이란 그 시대가 가질 수 있었던 시간, 에너지, 속력등의 요소에 영향받는 제한된 데이터의 결과물이었다. 그런데 그렇다면 지금의 인간은 무한한 데이터를 가졌나?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절대적 객관성이란 없다. 언젠가 통일장이론같은 것이 등장해서 지금의 과학도 수정될 가능성은 여전히 있다.
둘째로 사실 객관성이라는 말 자체가 환원주의적이기 때문이다. 객관성이란 말에는 이미 우리의 가치판단이 들어가 있다. 한국인의 평균키가 네덜란드인의 평균키보다 작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일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객관성은 이미 국가별 평균키라는 이 세상에 대한 어떤 분리된 사실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그 숫자에 주목한다는 사실 자체가 객관적이지 않다. 여기 두 남자가 있다고 해보자. 한 남자가 다른 남자보다 키가 크다. 그것은 객관적 사실일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하다. 두 남자중의 어느 남자가 신랑으로 훌룡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누군가가 앞에서 말한 사실을 내밀었다면 그것은 두 남자가 가진 성질중 키가 중요한 성질이라는 가치판단이 깔려 있는 것이다. 왜 몸무게나 눈의 색깔이나 좋아하는 음식이나 가지고 있는 재산이나 엄지발가락의 모양이 아니라 오직 키를 말할까? 만약 누군가가 정말 아무런 가치판단이 없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무한한 사실중에서 특정한 사실을 말할 수 있을까? 세상에는 무한한 사실들이 있는데 뭔가를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은 이미 뭔가를 선택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어떤 질문에 대한 답으로 뭔가를 말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애초에 왜 어떤 분리된 사실을 객관이니 주관이니 하면서 신경을 쓸까?
과학은 객관적이라고 흔히 말해지지만 과학도 이런 문맥에서는 객관적이지 않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유한한 특징들을 가지지 않는다. 과학은 필연적으로 아주 많은 측면들을 무시하고 세상을 단순화한다. 그래서 물리학을 아무리 공부해도 데이트를 잘하는 법을 거기서 배울 수는 없다. 그러면서도 물리학이 세상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말을 쉽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바보다. 과학도 이런데 하물며 우리가 사회, 문화로 눈을 돌리면 말할 것도 없다. 어떤 사상도 어떤 경제이론이나 사회과학이론도 객관성을 주장할 수는 없다. 객관성이 허구인데 중립이 허구가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가 객관성이나 중립을 이야기할 때는 우리는 우리가 어떤 경계를 전제로, 어떤 질문을 전제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질문과 문제는 모두 어떤 경계와 환경을 제시한다. 그런 것이 없으면 질문도 문제도 정의되지 않는다. 우리가 축구를 하는지 농구를 하는지를 말하지 않고 공을 손으로 잡으면 반칙인지 아닌지 이야기할 수 없다. 이것은 반대로 말할 수도 있다. 즉 우리가 경계와 환경을 정하면 객관을 이야기할 수 있다. 축구에서는 공을 잡으면 안된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왜냐면 그게 축구게임이라는 공간안에서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그게 축구라는 게임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한국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전제 조건이 있다. 그것은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이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임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을 미워하고 한국이 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한국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이 있다. 다만 그런 이야기가 나와야 할 때는 따로 있다. 그것은 다른 종류의 토론이 된다. 축구를 하자고 모였는데 누가 왜 꼭 축구를 해야 하냐고 질문을 던지고 싶다면 그 사람은 지금 논의의 범위를 바꾸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축구를 하는 것을 합의한 상태에서 축구를 잘하자고 논의를 하는 것과 축구를 할지 농구를 할지 야구를 할 지를 논의하자고 하는 것은 다른 주제다.
불행히도 객관성에 대한 혼동 그리고 토의의 전제가 되는 범위와 경계에 대한 혼동은 많은 혼란과 불합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가 그냥 객관적 세계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나의 상식은 절대다. 그렇게 믿으면서 자신은 중립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적어도 지금은 잠정적으로 특정한 조건들을 받아들이고 하는 토론이라는 것을 잊고 아주 기본적인 사실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자신의 주장을 한다.
삼성가의 후계자인 이재용과 이부진을 생각해 보자. 이부진은 이재용보다 재산상속에 있어서 차별을 받았을 수 있다. 이게 여성차별이니 이부진은 불쌍한 사람인 걸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면 한국 사회 전체로 보았을 대 이부진은 차별받은 불행한 여성이니 국가 예산을 써서라도 도와줘야 하는 걸까? 남녀를 가릴 것도 없이 한국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이부진이 더 특혜를 받은 사람이 아닌가? 사실 정체성에 기반한 사상이라는 것은 모두 이같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성소수자건 여성이건 노동자건 교사건 의사건 법조인이건 다수의 사람들은 하나의 단어로 묶어서 그걸 일반화할 때는 실제로 그 단어들에 대응하는 사람들이 비슷한 처지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작은 도시나 마을 단위처럼 작은 경계안에서는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더욱 큰 국가단위에서 세계단위에서는 그리고 복잡한 오늘날에는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100억을 훔친 부자는 불쌍한 장발장처럼 되고 1천원을 훔친 자는 극악무도한 인간이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비교대상을 멋대로 혼동시키면서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혼란을 조금이라도 정돈하고 싶다면 우리는 가장 먼저 절대적 의미의 객관성이란 없고 우리는 언제나 어떤 테두리와 경계를 통해 특정한 공간을 설정한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그 공간안에서의 객관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두 가지를 하게 되는데 첫째로 우리가 지금 가정하고 있는 테두리와 경계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 너머는 무지의 세계다. 적어도 지금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무시하는 세상이다. 한국인의 평등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자연히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불쌍한 인간들을 무시하고 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인지는 몰라도 당연한 것은 아니다. 그걸 당연시 여기면 노예들을 학대하는 노예의 주인들이 자기들 사이의 인간평등을 가지고 지나치게 몰두하는 일이 벌어진다. 우리는 우리의 경계를 너무 확신하지 말아야 하며 필요에 따라 지금의 논의는 어떤 경계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둘째로 테두리와 경계가 있음을 알면 우리는 객관성과 질서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공을 어떻게 차는가에 대한 객관적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축구를 하기로 했으면 발로 차야 한다. 객관성의 모호함에 빠져서 지금 자기가 무슨 게임을 하는지도 신경쓰지 않고 자꾸 원천적 질문만 던지고 있어서는 혼란만 계속될 뿐이다. 공을 손으로 잡고 싶다면 축구를 하지 말자고 해야지 축구에서는 왜 공을 발로 차냐고 물어서는 안된다.
이 세상은 너무 복잡하고 지금도 굉장한 속력으로 더 복잡해 지고 있다. 따라서 이 세상을 단 하나의 게임처럼 이해하는 것은 무리다. 이 세상에는 객관이란 없다. 이 세상은 수 없이 많은 잠정적인 게임들로 나눠져야 한다. 그 게임의 참가자들은 그 게임을 하기로 동의하는 대신 게임의 규칙이 지켜질거라 믿을 수 있고 그 결과 질서와 편의를 얻는다. 다만 어떤 게임도 이 세상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에 그 게임에서 벗어나면 그 게임안에서 통하던 것은 더이상 통하지 않게 된다. 다른 게임을 원하면 다른 게임을 하거나 그런 게임을 만들어야 한다. 누구도 모두에게 이 하나의 게임에 강제적으로 참여하라고 해서는 안된다.
이런 것들을 무시할 때 우리는 무의미함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지구에서 벗어나 우주공간으로 가면 북쪽이라는 말이 의미가 없다. 가정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면 부모가 가장 사랑하는 딸이라는 지위도 의미가 없다. 철학자의 세상에서는 얼굴이 예쁘다던가 못생겼다던가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연예인의 세계에서는 인기가 중요하지 학벌이 의미가 없다. 한국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 한국 정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한국 정치는 어떤 객관적 옳고 그름의 문제 이전에 한국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사랑에 대한 것이다. 그게 뭔지 모르면서 자신이 한국 정치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남을 편파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혀가 없으면서 음식의 좋고 나쁨에 대해 말하려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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