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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젊고 지친 사람들에게

세상과 나 누가 적응해야 하는 것일까?

by 격암(강국진) 2023. 12. 30.

세상이 나에게 적응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세상에 적응해야 하는 것일까? 세상일이란 대개 우리 맘대로 안되는 일이니 세상이 나에게 적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오만한 소리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이란 온 세상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내 주변의 사람들이나 관행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사실 나같은 소시민들들은 세상 전체와 만난다기 보다는 언제나 이렇게 세상의 일부와 접촉하면서 산다.

 

예를 들어 보자. 밥을 먹을 때 나는 항상 줄을 서는데 어떤 사람은 항상 새치기를 한다고 하자.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학교 선생님이라면 딱 정답을 말하겠지만 현실적으로 이런 상황에 대한 정답은 없다. 적어도 그런 경우가 많다. 줄을 안 서는 사람에게 줄을 서라라고 말해서 그 사람의 행동을 교정하라는 것이 정답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런게 그렇게 쉽다면 관행이라면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사회악들이 왜 근절되고 있지 않겠는가? 그냥 말한마디하고 옳은 길을 가르쳐 주면 되는 것인데. 학폭이 왜 있겠는가? 그냥 그런 일은 옳지 않아라고 한마디 하면 그게 바뀔터인데. 사람이라고 해서 그냥 사람이라고 불리지만 사실 사람은 굉장히 다양하고, 학습능력도 굉장히 달라서 우리가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경우에는 그 사람을 바꾸겠다는 것은 마치 개나 고양이에게 말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도 종종 만나게 된다. 정치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은 이 것을 알 것이다. 

 

앞의 예로 돌아가 보자. 간단한 지적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경우 우리가 택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자신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다. 즉 나는 계속 줄을 설 테니 너는 계속 새치기를 하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반드시 엉터리 방법은 아니다. 만약 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주목하고 내 편을 들어줄 것같으면 말이다. 하지만 세상은 꼭 이렇지 않다. 줄서는 당신이 오히려 바보취급을 받고 새치기 하는 사람들이 너는 왜 이렇게 어리석냐면서 한 수가르쳐 주겠다는 식의 조언이나 듣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경우 실제로 당신은 계속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다른 방법은 나도 줄을 서지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당한 대로 하는 것이고 그 세상에 적응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단기간에는 내 이익은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도 찜찜한 문제는 남는다. 만약 이런 식으로 주변 환경의 변화에 대해 굴복하고 적응하기 시작한다면 범죄자 사이로 가면 범죄자가 되고 무식한 사람들 사이로 가면 똑같이 무식해 질 것이다. 이런게 옳은가?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그냥 관행이라거나 여기서는 저게 옳은가 보지 하고 모른 채하면서 살 수 있는가? 동료가 성추행을 당하고 있는 일이 흔하면 그걸 말리는 게 아니라 여기서는 그렇게 사는 거라고 하면서 나도 그러면서 사는게 정상일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 문제는 굉장히 흔한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누구도 위의 두 가지 방법중 하나만 택하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언제나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겠다라는 원칙은 말은 그럴 듯하지만 사실 오만한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정을 가지고 있다. 장발장이 빵을 훔치는 것은 나쁜 일이지만 그 사연을 들으면 그럴 수 밖에 없겠구나하고 생각이 드는 것처럼 어떤 사람의 행동은 그 사람이 가진 과거이력의 결과로 나타나는 일이 많다. 그런 걸 모두 무시하는 사람은 노인이 키오스크 같은 곳에서 버튼 조작을 잘 못한다고 저렇게 민폐를 끼치다니 빨리 뒤로 빠져야 한다고 말하는 매몰찬 사람이 된다. 나는 소신을 지키면서도 그런 매몰찬 일은 안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마치 자신이 남의 인생을 순식간에 다 알아볼 수 있는 신적인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오만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유명한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은 나처럼 운이 좋지 않다는 말이다. 상황이 이렇지 않다고 당신은 단언할 수 있는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남의 행동을 전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고 받아들이는 식으로 하면 나 자신이 없는 삶이 되고 만다. 나 자신이 없어지면 뭐가 옳은지 그른지도 전혀 모르게 된다. 내가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잔혹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쉽게 하고 있는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세상이 나에게 적응해야 하는 것일까 내가 세상에게 적응해야 하는 것일까? 고독하게 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문제는 매일의 일상에서 우리에게 제기된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에 대한 답도 있을 것인가? 

 

간디가 좋아했다는 인도의 경전 바가바드기타는 비슷하게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에 빠진 아르주나에게 크리슈나가 조언을 해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거기서 나오는 내용들을 좀 인용해 보면 이렇다. 

 

사람이 무위에 이르는 것은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요, 또 단순히 그것을 내버림으로써 완전의 지경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모든 행동은 자연의 성에 의하여 이루어 지는 것인데 나라는 생각에 자아를 어지럽힌 사람은 그것을 하는 것은 나다 하고 생각한다.

깨달은 자는 이 세상에서 제가 한 어떤 일에 대해서도 이라 생각하는 것이 없고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그러한 것이 없다. 일체의 산 것 중에 어느 것에도 그의 이가 달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집착을 떠나 언제나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라. 집착없이 행하는 자가 가장 높은데 이르기 때문이다.

잘하지 못하면서라도 제 의무를 하는 것이 남의 의무를 잘하는 것보다 낫다. 제 의무를 다하다 죽는 것이 좋으니라. 남의 의무는 무섭기만 할뿐이다.

 

이러한 경전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주관적이겠으나 나에게는 이 조언이 이런 의미를 가진 것으로 들린다. 우리는 뭔가를 내가 한다는 생각에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하고 선택을 하지만 그 결과는 꼭 우리의 행동때문에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뭔가를 기대하고 의도하면서 어떤 행동을 하면 결국 실패하고 실망하게 될 뿐이다. 우리는 유한한 인간이지만 그래도 어떤 존재이다. 예를 들어 나는 강국진이라는 한 개인이다. 이 개인은 유한하지만 그래도 하나의 의미를 가진 존재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언제나 나로 살려고 하는 것뿐이다. 내가 나로 산다는 뜻이 언제나 세상이 내 맘대로 되도록 기대하거나 의도하면서 행동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일 뿐이므로 무슨 일이 되든 안되든 그것은 반드시 우리에게만 달린 것은 아니다. 성공과 이익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눈앞의 이익이나 순간의 감정때문에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일을 하지 말고 그저 나로서 살아가는 일. 그것이 이 어려운 질문에 답하는 아마도 유일한 방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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