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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한국문화

한국만의 정서라는 정과 한에 대하여

by 격암(강국진) 2024. 4. 9.

한류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자 종종 들리는 말이 있다. 한국인만이 가진 정이나 한이라는 정서가 외국인들에게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한국인만의 정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정과 한이라는 개념이 외국인들에게 신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알 것도 같다. 그것은 그들의 문화가 과학적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일 것이다. 과학적이라고 하면 좋은 것같기만 하지만 사실 현대 문명의 한계가 그 과학문명의 한계이기도 하며 우리는 지금 그런 한계를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정이나 한에 관련된 한국인의 태도가 서양인들에게 참신하게 느껴지는 것일 것이다. 

 

정이나 한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할 수있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는 유한하며 미래는 알 수 없다'는 태도를 빼놓을 수 없다. 정이 사랑이 아닌 것은 정은 사랑보다 노골적이지 않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 말에 미운 정이라는 말도 있지만 미운 사랑이라는 말은 없다. 서양 사람에게 미운 정이라는 말은 뜨거운 얼음같이 모순된 말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하지만 사실 미운 정이라는 말만큼이나 정의 개념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말이 없다.  

 

나를 고생만 시킨 사람에게도 미운 정을 느낀다는 것이 한국인의 말버릇인데 미운 사람에게 정을 느낀다는 것은 이상한 말이다. 그래서 정을 설명하는데 미운 정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미운 정이라는 개념이 없다면 정은 그냥 사랑일 뿐이다. 따로 정이니 뭐니 하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다 낡아 빠진 신발에도 정을 느끼고 어디에 가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라 특별할 것이 없는 물건인데도 나와 함께 오래한 물건에는 정을 느낀다. 즉 나와 오랜간 인연이 있었던 것이라면 그것이나 그 사람에게 좋은 기억이 있건 나쁜 기억이 있건 마치 그것이 나의 일부라도 되는 것처럼 헤어지는 것에 대해 후련하면서도 섭섭한 마음을 느끼는 것이다. 

 

한도 마찬가지다. 한은 그냥 분노와 슬픔이 아니다. 한에는 저항할 수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체념의 개념이 들어 있다. 그래서 깊은 분노이고 깊은 슬픔이다. 한은 마치 자연재해처럼 예측할 수 없이 이따금씩 닥쳐와서는 우리의 삶을 뿌리까지 흔들어 버리는 세상에 대한 감정이다.  그래서 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유한하며 미래는 알 수 없다는 느낌이 들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정과 한의 개념이 한국인만의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보다 나는 이 정이나 한의 개념이 실은 지금 시대에 걸맞는 보편성을 가졌다는 말을 하고 싶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과학의 시대에서 확률의 시대로, 과학의 시대에서 망의 시대로 넘어가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과학적 태도는 객관적이고 고정된 지식의 시대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인과적인 관계로 이어지고 환원주의적인 분석으로 분석되어 지식이 된다. 우리는 하나 하나의 지식을 검증하고 누적시켜서 그렇게 쌓아 올려진 지식의 탑을 가지고 객관적 세계를 구성한다. 검증되고 쌓아올려진 그 지식의 탑을 점점 더 크게 만드는 것을 일찌기 학술연구적 이상이라고 부른 미국 교수도 있었다. 이 객관적 지식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명확한 논리와 증거로 짜여져 있으므로 일종의 독재적 힘이 작동한다. 지식이 힘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독재적 힘을 발휘한다. 잘 모르는 사람은 아는 사람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아는 사람의 명령이 곧 지식의 명령이고 검증된 지식에 따라야 하는 것이 과학적 시대의 윤리적 덕목이기 때문이다. 

 

현대과학을 탄생시킨 서구사회는 이같은 과학적 태도가 문화적으로 아주 넓고 깊이 퍼져있다. 그래서 그들로서는 노장 사상같은 것은 매우 신비적으로 들리는 말이다. 그들에게 선불교란 매우 이질적인 것이다. 과학적 태도에 대한 낭만주의적 저항이 서구사회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낭만주의적 저항이 진정한 힘을 얻었던 적은 없었다. 과학적 발전과 지식의 누적이 멈췄던 적이 없었고 그런 힘으로 이뤄낸 근대화로 부를 쌓아올린 서구에서 낭만주의적 감성이 주류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오히려 근대화가 압축적으로 이뤄져서 과거의 문화적 정신적 유산이 많이 남아있는 동아시아 국가들에게서 그들이 가진 적이 없었거나 그들이 잃어버린 것을 발견하게 된다. 

 

과학의 시대에서 확률의 시대로 혹은 과학의 시대에서 망의 시대로의 전환이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의 유한함을 자각하고 미래는 예측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과학이 무섭게 발전할 때에는 과학적 방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같았지만 사실 과학적인 방법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단순한 것에서만 성공적이다. 그 단순한 것에서의 성공도 대단한 것이라 과학문명은 대단한 성취를 이룬 것이 사실이며 앞으로도 중요한 것으로 남을테지만 일단 그런 성공들이 이룩되고 난 다음에는 그 한계도 점점 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과학의 중심이 물리학에서 화학으로 화학에서 생물학으로 옮겨가면서 점차로 사람들은 뇌나 사회같이 복잡하고 강한 피드백을 가진 시스템에서는 과학적 방식이라고 말해지는 방법으로는 쓸모 있는 이해를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때문에 경제학이 우울한 학문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손을 뻣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막대한 데이터를 써서 확률론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약간만 복잡한 것도 다 이렇게 접근해야 한다. 예를 들어 로봇의 몸에 수십개의 관절이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 관절들이 동시에 움직여서 로봇은 물건을 잡을 수 있다. 그런데 이걸 과학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은 너무 복잡하고 느리다. 그래서 사람은 쉽게 팔을 들어 장애물 너머에 있는 캔을 잡을 수 있지만 로봇은 어렵다. 확률적인 접근은 다르다. 확률적인 접근은 주어진 목적을 이뤄내는 이상적인 관절 컨트롤을 많은 경험에 의해서 근사해 내는 것이다. 알파고가 바둑을 두는 방식도 기본적으로 이렇다. 과학적으로 이기는 공식이 있어서 다음 수를 계산해 내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에 근거해서 이길 가능성이 높은 수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렇게 일단 복잡한 것은 논리적이고 인과적이 아니라 확률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나면 우리는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가치도 즉각적으로 깨닫게 된다. 현대인들은 담배가 폐암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믿는다. 이건 너무 자명한 사실같다. 그런데 흡연자가 폐암에 걸릴 확률을 추정하는 것은 사실 굉장히 어렵고 그래서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반세기전에는 그래서 사람들이 필터도 없는 담배를 하루에 몇갑이나 피웠다. 폐암환자들의 생활에는 인종, 식습관, 유전적요인등 아주 많은 것들이 영향을 준다. 담배를 안피는 사람이 폐암에 걸리는가 하면 평생 담배를 피웠는데 건강한 사람도 있다. 이래서 폐암과 담배사이의 인과관계를 데이터 분석을 통해 결론내리는 일이 어렵고 느렸던 것이다. 덕분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폐암으로 죽었을 것이다. 

 

신입사원을 어떤 사람으로 뽑아야 일을 잘할지, 어떤 아이디어가 시장에서 성공할지, 어떤 회사에 대한 하나의 좋은 뉴스가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지는지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이런 것들을 대개 인간의 감에 의존해서 해결해 왔고, 조금 더 나은 경우는 통계학을 이용해서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지금은 엄청난 데이터를 모아서 AI를 만드는 기법으로 분석하는 일을 하고는 한다. 이 모든 것은 다 확률추론과 데이터 분석에 대한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인간이 아직 정복하지 못한 세계를 인간이 정복하려고 하는 분야가 바로 데이터 분석들이 벌어지는 분야다. 다리를 놓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믿을 수 있고 빠르고 값싸게 평가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면 얼마나 많은 사회적 비용이 절약되겠는가? 

 

이런 새로운 시대로의 변환은 그래서 과학의 시대에서 확률의 시대로의 변환이고 빅데이터 시대로의 변환이며 AI 시대로의 변환이고 망의 시대로의 변환이다. 이걸 망의 시대로 부르는 것은 더이상 사회가 하나의 거대한 기계처럼 작동하지 않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의 존재를 느끼면서 살아가는 시대다. 겸손한 사람들의 시대다. 지식만 알면 다른 사람을 볼 필요가 없는 시대가 아니라 더 많은 데이터를 위해서 서로 의존하고 소통해야 하는 시대다. 지식의 힘을 무시해서는 안되지만 우리가 가진 지식의 힘에 대해 겸손해야 하는 시대다. 

 

그렇기 때문에 정과 한의 개념이 말이 되기 시작한 시대인 것이다. 쓸모 있는 사람과 쓸모 없는 사람, 나를 괴롭게 한 사람과 즐겁게 한 사람의 구분을 명확히 하는 것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세옹지마의 이야기로 보면 옳지 않다. 변방 늙은이의 말이라는 뜻을 가진 세옹지마의 이야기에서 말이 도망갔다라는 사실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 다른 가치와 의미를 가진 일이 된다. 좋은 일이 되었다가 나쁜 일이 된다. 그리고 그런 일의 흐름은 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무지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에게 좋은 사람처럼 보였던 사람이 사실은 독이 되고 있을 수도 있고, 그 존재가 잘 느껴지지도 않는 사람이 나중에 지나서 보면 내 인생을 결정적으로 뒤집는 영향을 준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분법적으로 이거다 저거다를 확실하게 구분하여 인식하려고 하는 태도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언제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초등학교 때의 소원을 쓴 일기장을 2-30대가 되서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미래의 우리는 지금과 같은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게 다 이뤄져도 그게 꼭 지금의 우리에게 좋은 일이 아닐 수 있다. 

 

2002년 월드컵때 붉은 악마 응원단을 보고 서양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박근혜 탄핵때 광화문을 채운 100만명을 넘는 인원을 보고 서양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그들의 개념대로라면 전체주의적이고 무지한 대중이 아니면 그렇게 단합된 힘을 보여주지 못한다. 미국에서는 카테리나 태풍이 불어서 지역이 고립되자 약탈이 시작되었다. 심지어 경찰도 도둑질을 한다. 서양인들에게는 개개인이 독립적이고 지성적인데도 거대한 집단으로 하나처럼 움직이는 집단은 이해불가능한 것이다. 배운 사람들은 모래처럼 흩어지고 못배운 사람들은 무질서하다. 뭉치는 교양인들이란 있기 어렵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게 어느 정도 된다. 그걸 이 글의 문맥에서 말하자면 한도 알고 정도 알기 때문이다. 확률의 시대나 AI의 시대, 빅데이터의 시대나 망의 시대란 집단지성의 시대다. 누군가의 계획없이도 사람들이 뭉쳐서 거대한 일을 해낼 수 있다. 한을 알고 정을 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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