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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한국문화

마블의 영웅과 무빙의 영웅

by 격암(강국진) 2023. 9. 15.

23.9.15

한국과 미국의 영웅은 명확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이때문에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디즈니 플러스 드라마 무빙이 나오기 이전까지도 그 차이는 명백했다. 하지만 나는 점차 그 차이를 더 강하게 느끼고 더 지겨워하게 된 것같다. 예를 들어 디즈니에서 하고 있는 다른 드라마 아소카는 스타워즈 이야기의 연장판인데 잠깐 틀었다가 꺼야 하는 수준이었고, 아직 나오지도 않았지만 레벨문이라고 하는 넷플릭스 드라마의 예고편을 보니 화면은 화려한데 장면 장면만으로도 또 이거야 하는 것이 있어서 영 볼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는 한국의 슈퍼 히어로 영화가 드디어 재미도 있게 만들어 지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슈퍼 히어로 영화나 드라마들이 이전보다도 더 수준이 떨어진 채 그들의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명백하다는 미국의, 나아가 서구의 영웅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건 서구의 봉건주의다. 왕이 나오고 왕자와 공주와 기사가 나오는 이야기말이다. 그것이 서부영화 스타일로 바뀌었건, 스타워즈나 듄처럼 우주판으로 바뀌었건 서구 컨텐츠의 바닥을 흐르는 정서는 거의 마찬가지다. 특히 서구의 모든 슈퍼 히어로 영화에는 이 봉건제가 바닥에 깔려 있다. 

 

이를 잘보여주는 것은 다른 영웅과 비교하는 것이다. 한국의 영웅은 이렇지 않다. 한국의 영웅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나는 송강호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송강호도 좀 멋있게 나오지만 전에는 송강호는 폼나는 연기가 거의 없었다. 그냥 자기 삶을 주체하기도 바쁜 소시민이다. 그런데도 어떤 이유로 영웅이 된다. 그걸 잘 보여주는 작품이 봉준호의 괴물인데 괴물에서 괴생명체와 싸우는 가족은 아주 찌질하다. 특히 송강호가 그렇다. 그렇지만 가족들은 내 딸, 내 조카, 내 손녀를 구해야 한다는 마음에 용기를 낸다. 한국의 영웅은 결코 일상의 문제에서 벗어나서 구름같은 곳에서 살고, 슈퍼파워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머리도 좋은 사람이 아니며 사실 어떤 슈퍼파워가 있다고 해도 그게 모든 문제를 해결할 정도가 아니라서 오히려 협박당하고, 이용당한다.

 

이걸 볼때 나는 서구의 영웅은 봉건 시대의 지배층을 모델로 하고 있다면 한국의 영웅은 시대가 어려우면 나라를 지키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일어나는 의병을 모델로 하고 있다고 느낀다. 서구에서 나라를 지키는 것이 귀족이라면 한국에서 나라를 지키는 것은 평상시에 사회 지도층 운운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대중이고, 조용히 살던 시민들이다. 이런 차이때문일 것이다. 서구 영웅 서사에서는 일상 생활에 대한 고민이 거의 없다. 배트맨은 타고난 재벌이다. 스파이더맨이나 슈퍼맨은 그보다는 일상의 고민도 가진 캐릭터로 그려지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천재고, 능력이 너무 엄청나서 그렇게 산다는 것이 너무 분명하다. 아이언맨은 천재이자 부자이고, 캡틴 아메리카는 그냥 멋지기만 하다.

 

이들은 진정한 보통 사람의 고민보다는 훨씬 더 높은 곳에서 산다. 아내의 낡은 옷을 보며 마음이 무겁다거나 아이의 교육비가 부족하다거나 실직할 것을 걱정하면서 더럽고 치사한 것을 참는 것이 아니라 기업합병이나 세계 평화를 논하는 수준에 있는 것이다.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아픔이 절박하지는 않아서 서구의 영웅은 자잘한 일상이 그 영웅의 본질까지 위협하는 일이 없다. 한마디로 진짜 찌질해져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식의 교육비가 부족해서 자신의 신념을 꺽고 나쁜 일도 좀 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유혹은 아주 진지하게 느끼는 일이 없으며 그런 유혹이 있다고 해도 그건 우주나 국가를 건 큰 스케일에서 벌어지는 일이라서 흑백이 불분명하다.

 

그에 비하면 한국의 영웅들은 약하다. 특정 능력이 뛰어날지 몰라도 그걸로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고, 대부분 그렇게 머리가 좋지도 않다. 그리고 대개 가난하다. 그들은 중산층도 되지 못하고 아예 서민층에 속하는 것처럼 사는 일이 많다. 영웅이라서 앞에 나선 사람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평상시에는 왕따당하고, 모든 일에 서툴다는 말을 듣거나, 요령이 없다고 핀잔듣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이라서 고생스러운 삶을 사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이들은 영웅이 된다. 말하자면 우리 동네의 바보 팔푼이가 영웅이 되는 식이랄까? 드라마 무빙에서 이걸 잘 보여주는 것은 류승룡이다. 그는 슈퍼파워를 가졌지만 어리석고 길을 잘 찾지 못하며 마음이 약해서 자주 운다. 이용도 잘 당하고 배신도 당한다. 그리고는 가난하게 굽신거리며 산다. 닭집을 하면서 혼자 딸을 키우는 것이다. 

 

이들이 영웅이 되는 이유는 결코 어떤 추상적인 이데올로기나 명분때문이 아니다. 이들은 언제나 착한 일을 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도 아니며, 남탓 안하고 찌질하지도 않은 사람들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영웅이 되는 이유는 이들은 윤리적 부끄러움, 이들의 서민적 정체성과 더 어울리게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쪽팔림'을 느끼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부당한 일을 당하는데 아무도 안 도와 주는 상황을 모른 척 하는 것을 이들은 너무 쪽팔려 한다. 아이가 버려졌는데 그것에 등돌리는 어른이 되는 것이 너무 쪽팔리다. 물론 나의 삶은 이미 너무나 무겁지만 그래도 이들은 참고 참다가 쪽팔려서 거리로 나선다. 특히 어른이 아이에 대해 가지는 책임감은 이들의 가장 강한 동기다. 어른은 아이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것이 한국의 정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거지 같은 세상을 아이들에게 까지 물려주는 것은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들의 각오는 이렇게 이미 싸구려 감상주의나 알아듣지도 못할 추상적 명분때문이 아니라 원초적 쪽팔림 때문이므로 이들이 들고 일어설 때는 그 힘이 더 설득력이 있다. 이들은 먹고 사는 사람들이 없는 사람에게 적선하듯이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먹고 살만 하니까 누굴 돕기 위해 일어서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어쩌면 자기 자신을 위해 일어선다. 이렇게는 도저히 못산다는 것이다. 이것까지 버리면 사람으로 사는 것이 의미가 없다. 그리고 이 한국적 영웅들이 절대 버릴 수 없다는 것에 포함되는 것이 바로 어린 아이들이다. 

 

강풍 웹튠에 기반한 디즈니 플러스 드라마 무빙은 역시 이점을 잘 보여준다. 슈퍼 히어로들은 간단히 인간들에게 제약당하고 이용당하고 추적당한다. 그 대단한 힘은 공권력을 이겨내지 못한다. 평범하지 못한 이들은 튀어나온 못이 되어서 사회적으로 오히려 아주 힘들게 사는 쪽에 속하게 된다. 그래도 나쁜 일에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그들은 그들의 힘을 숨긴다. 그래서 그들은 권력을 등지고 숨어 다닌다. 그냥 조용히 산다. 그걸로 주변 시민들을 협박하는 일도 없다. 그래도 그들이 자신의 힘을 다시 보여주게 되는 것은 결국 다음 세대의 아이들때문이다. 강풀 스토리는 정확히 한국적 영웅서사를 반복하고 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도 세부사항이 중요하다. 그래서 누군가가 스타워즈가 정말 재미있다고 말하고 심지어 무빙보다 더 재미있다고 말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다만 나같이 중년이 넘어 이것저것 본 사람의 개인적인 소감을 말하자면 나는 이제 왕나오고 기사나오는 이야기가 지겹다. 누굴보면서 족보따지고, 품격따지고, 타고난 핏줄 따지는 일이 지겨우며, 일상의 아픔같은 것을 전혀 모르는 슈퍼 히어로가 무섭다. 미국이 강대국으로 70년전에 한국을 도와줄 때 그것은 고마운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을 얼마나 이해할까. 그들에게는 남북한으로 한반도가 갈라져야 한다는 것, 전쟁에 패전한 일본이 분할통치되는 게 아니라 조선이 분할 되어야 한다는 것이 별거 아닌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세계를 보고 있는데 그 세계에서 한반도란 그저 아주 작은 땅이며, 경제규모로 보면 더더욱 작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한국도 미국처럼 강대국이 되는 날이 올까? 인구나 땅넓이를 생각했을 때 그건 어려울 것같다. 하지만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그리고 한국적 영웅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를 기억한다면 한국은 좀 더 바람직하게 세계를 도울 수 있지 않을까? 미국과 한국의 영웅서사를 보면서 나는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나는 한국의 영웅쪽이 더 현실적이고 좋다. 서구의 영웅은 마치 르네상스 이전의 예술에서 그리는 그리스 신화의 인물들이나 성경속의 영웅같지만 한국의 영웅은 르네상스 이후의 예술이 보여주는 보통 사람들같다. 나로서는 한국이 더 시대에 어울리는 컨텐츠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민주주의의 선두주자를 주장하는 서구가 왜 봉건 신화에 이렇게 집착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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