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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한국문화

뛰어난 대중과 한국

by 격암(강국진) 2023. 7. 19.

23.7.19

플라톤이 전체주의의 기원이라고 말하는 칼 포퍼가 아니더라도 잘 쌓아올린 건축물을 연상하게 하는 논리적 사고방식은 반드시 옳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다. 예를 들어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에서 환원주의적 태도를 비판하는 화학자 로얼드 호프만이나 '낭만주의의 뿌리'에서 이사야 벌린이 소개하는 낭만주의 철학자들은 모두 이런 태도를 취하고 있다. 과학은 위대한 인류의 결과물이지만 과학과 같은 논리적 구조물로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그것을 맹신하는 태도는 전체주의를 만들고, 사이비 과학을 만들어 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계몽주의를 꿈꾸는 사람은 아직도 세상에 많다. 그 사람들은 궁극적으로는 어떤 규칙들에 반영되어지는 잘짜여진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그것을 모두가 배우고 익히면 국가같은 사회공동체가 훌룡해 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런 시스템은 결국 그 이데올로기에 정통한 사람들을 정점으로 하는 기계적인 시스템이 될 뿐이다. 결국은 조종사가 맨 위에 있고 다른 사람들은 그 조종사의 명령에 따르는 집단이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잘못된 계몽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이 계몽주의는 이렇게 사람들을 결국 부자유한 로봇으로 만들고 종국에는 어리석은 행동을 해서 집단이 망하기 때문이다. 책상앞의 어떤 개인의 생각에 한계가 없을 수가 없다.

 

잘못된 계몽주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불합리하고 이기적인 짐승같은 존재로 보면서 그들의 머리속에 진리를 집어넣어야 세상에 문제가 없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이 하는 말이 얼마나 그럴듯하던간에 그 끝에 가면 그런 생각들은 사람들을 지배하여 타인이 만든 규칙에 따라 조종되게 만드는 세상으로 결론이 난다. 이는 사회계약론을 말하던 몽테스키외의 태도이며 오늘날 사회를 지배하는 경재학자들이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종교는 단순하게 요약하기 불가능한 것이지만 한국에서 자주 보이는 기독교와 불교의 입장도 이런 주제에 새로운 시각을 던져준다. 기독교는 사람들이 신에게 충성하라고 말한다. 어찌보면 충성스런 신의 노예가 되는 것이 기독교의 구원이다. 이때문에 사방에 사이비 종교가 넘쳐난다. 신을 종교적 지도자로 대체하면 그 종교적 지도자가 뭘 해도 의심하면 안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반면에 불교는 스스로가 깨닫는 것이 종교의 목표다. 부처의 노예가 되는게 아니라 중생 하나하나가 모두 깨달은 부처가 되야 한다고 가르친다. 나는 진정한 기독교나 진정한 불교가 뭔지에 대해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 다만 지금의 시대는 노예들의 시대가 아니라 모두가 깨달은 자가 될 것을 목표로 하는 깨달음의 시대라는 것은 말하고 싶다. 지금은 소수의 강력한 지도자와 사상가가 이끌 수 있는 시대가 아니고 대중이 혁신적이고 깨어있을 때만 그 사회가 경쟁력을 얻는 때이다. 

 

이는 반드시 그게 윤리적으로 바람직하고 민주적이니까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신속하게 적군을 무찔러야 하고, 극한의 행동을 해야 하는 군대에서는 민주주의는 옳지 않다. 그런 곳에서는 상명하복을 강조하는 것에 이유가 있다. 하지만 군대조직으로 시장경제를 실시할 수는 없다. 시장경제는 각 개인들이 나름대로 주체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혁신을 만들어 낼 수 있고, 더 좋은 상품이 선택되게 만들 수 있는 더 지능적인 사회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일찌기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지적했듯이 시장경제가 자유로운 인간들을 통해 최선의 답을 찾아낸다는 자유주의적 주장은 현실에서는 말 그대로 실천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적어도 이제까지의 시장은 언제나 더 큰 권력이 만들어 내는 어항속에서만 자유를 허용했다. 대표적인 예가 환률주권인데 고전 경제학에서는 무한정한 자유가 더 빠른 발전을 가져온다고 하지만 각각의 나라는 화폐를 발행하고 환률을 조정하는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뿐만이 아니다. 노동자의 권리가 무엇이고 기업가의 권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 있어서도 세상에는 무수한 규칙이 있다. 그 규칙들은 다 주관적인 가치판단을 포함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규칙들이 요구되었다. 결국 지금 세상에서는 순수 자유주의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복지나 연금도 다 반자유주의적인 것이다. 세상의 흐름은 이미 사회주의적으로 많이 변했다. 

 

그러나 자유주의를 비판한다고 해서 그 반대가 답인 것도 아니다. 그 반대가 바로 위에서 말한 잘못된 계몽주의이기 때문이다. 그 반대의 예가 바로 지금은 역사적으로 실패한 실험이 되버린 공산주의다. 이 사람 저 사람, 나는 정의를 아니까 이러저러한 구조를 법제화해서 그런 규칙을 가지고 경제게임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런 잘못된 계몽주의의 끝은 언제나 권력의 독점이고 사람들을 로보트로 만드는 전체주의다. 나는 언제나 시민들의 자유를 소중히 생각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어떤 객관적 시스템이나 이데올로기를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면 그 결과는 같다. 그걸 실천하는 과정에서 규칙은 점점 복잡해지기만 하고 결국 자유는 오직 그 법과 이데올로기의 설계자에게만 허용되어 누군가가 책상앞에서 휘두르는 펜끝에 따라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이게 될 뿐이다. 

 

현실적으로 세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빠르고 무섭게 변해가고 있다. 어떤 잘못된 정책 하나가 10년동안 그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는다면 나라가 회복불가능한 피해를 받을 수도 있는 그런 시대다. 인터넷에 대한 규제하나를 10년간 안풀어서 인터넷이 10년늦게 들어오면 어찌될까? 코로나 정책을 생각해 보라. 그것의 대응 하나를 잘못하면 어찌되는가?

 

그래서 지금의 세상은 점점 더 사회가 집단적으로 빠르게 움직이되 지능적일 것까지를 요구한다. 그런데 이러한 요구는 모순적인데가 있다. 전체주의는 그 전체 집단의 지능을 소수 리더 집단의 지능이하로 낮춘다. 따라서 군대처럼 집단적이지만 지능적이지는 않은 사회를 만든다. 순수한 자유주의는 사회공동체 자체를 파괴하기 때문에 존재하지도 않지만 규칙을 느슨하게 설정한 자유주의 국가는 집단적인 대응을 한정없이 늦어지게 만든다. 그러니까 이것도 저것도 답이 못된다. 우리는 이 둘의 절묘한 중립을 추구한다는 말장난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것도 안된다. 

 

어디에도 답이 없는 이유는 하나다. 문제를 해결할 주체를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오직 깨어있는 다수의 시민들, 깨어있는 대중에 의해서만 해결된다. 백만명이 모였을 때 군대식으로 질서를 잡자고 하는 것은 전체주의다. 그런데 리더가 없어도 질서를 스스로 잡는 뛰어난 대중이 존재한다면 자유도 허용된다. 해결책의 핵심은 결국 깨어있는 개인들이 다수 존재하냐는 것이다. 그것없이는 게임의 규칙이 이거니 저거니 따져봐야 소용이 없다. 자유는 그냥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깨어있는 대중이 있을 때만 긍정적으로 힘을 발휘한다. 문제는 법이나 규칙이 아니라 사람이다. 범죄없는 나라는 법을 고치는 것만으로 이룩되는 것이 아니다. 

 

규칙을 존중하면서도 규칙을 초월해서 움직이는 지능적인 군중이 있어야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사회가 만들어 진다. 재난이 닥쳤을 때 메뉴얼만 따지고 있는 사람들은 피해를 줄이지 못한다. 그렇다고 재난이 오면 규칙은 다 없어지고 폭도로 변하는 사람들은 더 큰 피해를 남긴다. 재난의 상황에서 리더가 없거나 약간의 도움만 줘도 스스로 재난을 해결하기 위해 조직될 수 있는 군중만이 예측못하는 재난에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전체주의냐 자유주의냐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세상이 깨어있는 시민들로 채워질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있다. 그 답은 분명 일정부분은 교육일 것이다. 하지만 교육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이미 사람들은 초중고 대학까지 합하면 16년의 교육을 흔히 받을 뿐만 아니라 직업교육도 계속하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충분히 깨어있는 시민을 만들 수 없을 만큼 세상은 복잡하고 빠르게 변하고 있다. 지금의 상황은 자기 생활에 바쁜 일반 백성들이 한자 배우기가 너무 어려워서 무지하자 세종대왕이 익히기 쉬운 한글을 만들었어야 할 때와 비슷하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지금의 시스템을 그냥 유지하면서 더 많이 공부하라는 말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깨어있는 시민들로 세상을 채우는 또 다른 방법은 효율적 정보처리다. 인터넷이 등장하기 이전과 이후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 그 이전에는 언론을 장악하면 정보가 흐르지 않게 되기 쉬웠다. 이는 정보를 처리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지배함으로 해서 사람들을 암흑에 빠뜨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SNS와 스마트폰과 유튜브 방송같은 것이 난립해서 정보의 봉쇄가 더 어려운 시대에는 사람들이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세상에서도 정보는 너무 많고 정리는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진정한 깨어있는 시민들의 사회란 인공지능 기술이 보편화된 사회라고 믿는다. 개인들에게 쏟아지는 감당할 수 없는 정보를 처리해 줄 수 있는 도구가 있어야 각각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질문의 답을 제대로 알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이라고 항상 옳은 말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지와 나쁜 의도로 퍼뜨려지고 있는 가짜뉴스들이 사라져야 사람들의 눈에 진짜 세상이 보일 것이고, 또 그런 깨어있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조직되는데에 있어서도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래는 물론 불확실하다. 지금으로서는 짐은 각 개인의 어깨위에 놓여져 있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한국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그 미래를 좋게 본다. 하지만 나는 자칭 사회적 지도층을 말하는 부자들이나 지식인들이 한국의 경쟁력이라고 믿지 않는다. 윤리적으로건 지능적으로건 그런 리더들을 비교하자면 유럽이나 미국이나 심지어 일본에 훨씬 더 괜찮은 사람들이 많다고 믿는다. 다만 대중은 다르다. 한국의 대중은 수준이 높고 현명하다. 이건 그냥하는 말이 아니라 한국의 문맹률이 낮고 교육열이 매우 높아서 생겨나는 일이다. 이는 또한 한국이 오랜 민주국가의 역사가 있기에 생겨난 일이다.

 

조선은 사실상 입헌군주제의 민주국가에 가까웠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이룩한 수준의 민주주의를 일본은 메이지유신이라는 19세기 후반에나 있었던 사건에서 이룩했다. 서양국가들은 수천년전에 있었던 고대 그리스 운운하면서 그들의 민주주의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사실 기사가 왕에게 충성하는 봉건제 제도가 유지된 역사를 보면 민주주의의 역사에 있어서 한국보다 더 긴 역사를 가진 나라는 세상에 없다고 나는 믿는다. 그들이 자랑하는 프랑스혁명도 1789년의 일이다. 조선의 건국은 1392년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라. 유학의 본고장이라는 중국에서도 유교적 이상에 따라 나라가 세워진 적이 없다. 왕권신수설운운하는 종교적 시대를 뒤로 하고 추상적 사상에 기반하여 나라를 세우고 운영한 시대가 언제인가를 따져보면 조선의 건국은 서양 민주국가를 앞선다. 

 

이런 긴 민주국가의 역사가 의병의 역사를 만들었다. 규칙에 따라서 사는게 아니라 각각의 개인들이 정의라는 가치관 아래 살기 때문에 백성은 왕이 도망가도 스스로 뭉쳐서 나라를 지켜낸다. 왜냐면 그 나라는 본래 그 왕의 개인소유였던 봉건국가가 아니라 정의라는 추상적 가치관를 따르는 민주국가였기 때문이다. 일반 백성이 왕에게 정의가 뭔지, 도의가 뭔지를 따질 수 있는 나라가 조선이었다. 우리는 현대를 생각하면서 이런 행동의 의미를 과소평가하지만 진정한 봉건제 아래서는 지배자에 대한 충성보다 더 위에 있는 가치가 현실적으로 없다. 있어봐야 공자같은 사상가가 아니라 신같은 추상적 존재다. 조선에서는 정의를 지키자고 의병이 일어났던 것이고, 심지어 나라가 망해도 정신 수준이 낮았던 일본의 문화에 융합될 수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조선사람들이 익숙한 정의는 없고 천황숭배같은 종교같은 지배만 있었기에 정신적으로 뛰어난 문화를 경험했던 조선인들은 일본인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는 건 인간 이하로 사는 거라고 오랜 역사속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이래서 한국의 미래에 희망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시대적 문제는 이정도로 해결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또 혁신이 필요하다. 뛰어난 대중을 가지는 것은 그래서 더 뛰어난 집단적 지능을 이룩하는 것은 오늘날 다른 어떤 일보다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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