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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한국문화

보다 세밀한 다문화적 삶

by 격암(강국진) 2022. 6. 24.

22.6.24

얼마전에 싸이의 콘서트 흠뻑쇼가 300톤의 물을 쓴다고 말이 많았다. 그런데 이 논쟁을 확 뒤집어 엎을 만한 대단한 숫자가 하나 제시되었다. 그건 한국에 있는 골프장들이 하루 천톤씩의 물을 쓰면서 영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9년 기준으로 전국의 골프장수는 467개이고 18홀 기준으로 하면 541개의 골프장이 있는데 그러니까 이 많은 골프장들이 매일 천톤 이상씩 물을 쓰면서 영업을 하고 있다. 그런데 3백톤의 물을 쓰면서 고작 몇번 열릴 콘서트는 물낭비라고 할 수가 있을까? 골프를 치는 행위는 거룩한 행위이고 콘서트를 열고 참가하며 즐기는 것은 천박하고 낭비적인 행위인가?

 

나는 여기서 흠뻑쇼를 옹호하거나 골프장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적어도 이 글 안에서 그것이 결론은 아니다. 그보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일단 우리는 너무 빨리 몇개의 선택된 사실들을 나열하고 이게 좋은거냐 나쁜거냐라고 질문하는 식의 마녀사냥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일이 너무 많다. 인터넷에서 누군가가 죽일 사람으로 떠올랐다는 말을 들으면 모두가 달려가서 그들을 때려잡기 열심이다. 그게 아니라도 누군가가 그렇게 여론으로 맞아죽는데 그저 수수방관한다. 이렇게 모두가 모두를 죽이기에 열심이니 정도구분이 없다. 살인자나 소매치기나 그냥 다 죽일놈이 되는 것같거나 오히려 강간범은 관대하게 처분받고 (강간은 처음이라 형을 세게 집행하지 않는다는 논리) 추행이라고 주장되는 행위는 너무 세게 처벌하는 경우도 많다는 느낌이다. 처벌이 그냥 랜덤하다 즉 임의적이다. 

 

사실의 선택은 정의나 합리를 전혀 다르게 보이게 만든다. 예를 들어 흠뻑쇼를 비판하는 사람은 첫째 지금은 가뭄이다, 둘째 흠뻑쇼에는 3백톤의 물이든다라는 사실을 나열한 후, 이건 나쁜 짓이 아니냐고 말하고 있다. 이 두 개의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여기서 앞에서 말한 골프장의 물쓰기를 첨가하면 흠뻑쇼는 다르게 보이게 된다. 그리고 이건 분명 여전히 사실의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대개 지적되고 나열되는 사실에 집중하지만 언급되지 않는 사실들은 언급된 사실보다 더 중요할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합리적인 세상에 살고 싶다. 그런데 이 합리성이란 건 이렇게 결국 우리가 보고 있는 사실들을 포함하는 테두리에 의해서 결정되므로 절대적 합리성이나 절대적 정의라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테두리를 가지고 함께 살아가야 할까에 대해 고민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삶, 타인의 문화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 자기 기준으로 사는 건 좋지만 그걸 너무 쉽게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 이런 부분에 대해 고민이 없는 사람들은 정말 무섭다. 그들이 이런 테두리의 문제에 고민이 없다는 것은 그들은 자신이 가진 정신적 테두리를 그냥 온 세상이라고 여기고 그걸 당연시 하며 다른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는 절대적 정의나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 자기와는 다른 테두리에서 사고 하는 사람을 전혀 이해하려고 시도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들은 얼마나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정의를 밀어부치겠는가.  

 

보통 국가적 테두리를 강조하는 사람은 그보다 작은 개인적 테두리에 집중하는 사람들을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몇몇 예외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그냥 유한한 인간일 뿐이다. 한국 내에서 불쌍하게 살고 차별받는 사람들은 당연히 자신의 처지에 대해 주장할 만한 것을 주장할 권리가 있지만 누구도 그냥 피해자는 아니다. 우리는 모두 가해자이며 피해자이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저 재수가 좋거나 나쁠 뿐이다. 

 

그래서 참으로 문제는 어렵다. 이렇게 모두가 모두를 가해자이며 피해자라고 말해 버리면 제 아무리 탐욕스럽게 행동해도 다 면죄부를 받는 것같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테두리만 강조하면 비현실적이 된다. 사실 인간이 진짜로 사회를 이루며 살 수 있는 규모는 고작 몇백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인간이 정말로 5천만명을 가족으로 여기며 살 수가 있을까?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을, 내가 사랑하는 배우자와 전혀 낯선 사람을 정말 평등하게 대할 수 있을까? 꼭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걸 증명할 수도 없지만 그렇게 계속 '사회적으로 깨어있게' 살려고 하면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윤리선생처럼 떠드는 사람은 반박은 안 당해도 인기가 없다. 그래서 세상에는 몇몇 이웃과 지인들에게는 매우 자상하면서도 그 작은 테두리를 벗어나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잔혹한 사람이 넘치는 것이다.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의 배고프다는 몸짓에는 가슴아파하면서 굶어죽어가는 이웃아이에게는 냉정한 사람이 세상에는 넘쳐난다. 정치적으로 올바름을 주장하는 PC가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는 지긋지긋하다는 감정과 반감을 들게 만들어 본래의 목적과는 반대의 것을 이루는 일도 있다. 

 

요즘 세상에서 다문화라는 말은 흔히 다른 국가에서 온 사람들과의 관계를 강조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세밀한 다문화 세상이 필요하다. 한국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우리가 모두 같은 문화를 가졌고 따라서 같은 것을 당연시 여긴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당신은 낙태를 권리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천주교신자들에게 그것은 허용할 수 없는 일일 수 있다. 유럽의 문화에서는 남의 배우자와 부둥켜 안고 춤을 춰도 될 수 있고 뺨을 맞대고 인사를 할 수도 있지만 한국 사람이 다른 한국 사람의 가정에 가서 그런 일을 한다면 대개의 사람들은 당황하고 화를 낼 것이다. 우리는 이런 문화적 차이에는 익숙하다. 어떤 차이를 볼 때 저분은 불교신자세요라고 하거나 저분은 프랑스인입니다라고 하면 면죄부를 받는 것같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같은 한국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똑같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이 너무 많다. 그러니까 종교문제나 국적문제를 제외하고 나면 한국인은 모두 똑같은 문화를 가지고 똑같은 테두리를 보면서 산다고 너무 쉽게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어디선가 패륜적인 일이 있다고 하면 온국민이 충격을 받고 흥분한다. 이것이 모두 나쁘고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는 워낙 많은 사람이 있고, 가짜 뉴스도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쓸데없이 피곤해지는 일도 많다. 때로는 너무 심한 간섭과 처벌을 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학폭은 나쁜 것이다. 하지만 과거 학폭논란이 있을 때 진실이 들어나도록 차분히 기다리는 경우가 없고 누군가를 유죄로 선고한다음 그 사람을 그냥 처벌하기 바쁜 경우가 많은 것같다. 유죄인가 무죄인가는 어떻게 아는가. 설사 유죄가 맞다고 해도 그것이 어느 정도의 처벌을 받아야 하는가는 누가 결정하는가. 그런데 그냥 앞뒤도 없이 무죄냐 유죄냐로 사람을 낙인 찍어 버리는 일이 많다. 여론재판이 흔하니까 여기저기서 여론에 고발하는 일도 많다. 

 

우리는 좀 더 세밀한 다문화적 삶이 필요하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는 일과 더불어 우선 전체 국가나 온 세계에서 통하는 보편성을 어느 정도 덜 절대적으로 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남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비판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자신과 다른 윤리적 기준에 따른 행동에 대해서도 마치 외국인이나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에게 하듯이 그럴 수도 있다는 포용의 자세를 어느 정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옳다 그르다의 흑백론으로 접근하면 우리는 저쪽에서 천억훔치는 사람은 내버려두고 백원 천원 훔치는 사람을 죽도록 때리고 있을 수 있다.  육체적으로 강간하는 사람은 내버려 두고 에티켓이니 시선강간이니 하면서 그저 평범한 남자들을 파렴치범으로 만들 수 있다. 

 

지금 이 문제는 이미 너무 심각하다. 그래서 사회적 합리성이 의심받는 일이 자꾸 생기고 사람들이 PC 논쟁같은 것으로 너무 많이 소모되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언제나 문제는 흑백론적인 질문에서 시작한다. 이런게 그래서 나쁜 겁니까 아닌 겁니까 같은 질문말이다. 그 질문의 답이 자명하더라도 첫째로 우리는 여러 테두리의 단계에서 여러 관점에서 동시에 문제를 바라보려고 해야 한다. 둘째로 공존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어쩌겠는가. 그 사람은 죽어도 바뀌지 않고, 죽어도 당신과는 같은 세상을 보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니 차이를 인정할 수 있는 만큼은 인정하고 참고 넘기며 살아야 한다. 같이 살아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더 많은 사람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되도록 많은 사람을 포용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게 현실인 걸 어쩌겠는가. 

 

우리는 화도 나고 짜증도 날 것이다. 그래도 우리의 공동목표는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공동목표는 공존이다. 여러가지가 짜증나지만 그래도 우리는 함께 사는게 더 바람직하다. 그러니 타협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에 대한 관심을 계속 가지는 동시에 서로를 낯설게 봐야 한다. 서로를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으로,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쯤으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날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생기는 부작용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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