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과학이 서로 충돌한다는 지적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사실상 이 문제는 과학혁명의 시작시기인 데카르트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새로이 등장한 과학적 방법론은 아직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는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었지만 이미 종교인이나 윤리학자들을 걱정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철학자 듀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 진것이 바로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이라고 말한다. 이 세상이 마음과 물질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존재들로 이뤄져 있다는 말은 과학이 다루는 영역을 측정하고 관찰할 수 있는 물질로 정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과학은 물질을 기술하지만 진리를 보고 윤리적 옳음을 보는 마음은 물질이 아니라서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 바로 심신이원론으로 제출된 데카르트의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이같은 해결책은 처음부터 만족스러울 수 없었다. 서로 다른 존재라는 마음과 물질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설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대충 봉합한 문제는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점점 심화되었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할 수록, 과학이 세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면 할수록 인간이 진리라고 여겼던 사실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알려지면 질수록 마음의 영역이라고 여겼던 부분에 대한 과학적 영향력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같은 주관적인 영역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그저 물질일 뿐이라는 믿음도 퍼지게 되었다.
인문학과 과학의 분열이나 통합은 이같은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인문학은 철학과 예술, 윤리학, 종교학을 포함하고 바로 마음이 다룬다고 하는 영역에 관련되어 있다. 과학은 물론 물질을 다루는 영역이다. 그러므로 인문학과 과학의 분열이란 심신이원론의 불완전성에 대한 것이고, 인문학과 과학의 통합이란 심신이원론을 보다 만족스러운 관점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20세기에 나온 많은 철학이나 문학이 심신이원론이나 인문학과 과학의 분열 혹은 논리와 감정의 분열같은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그같은 많은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심신이원론의 문제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그 이유는 해결책이 없었거나 해결책이 제출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추상적 철학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라는 소설은 이 문제를 다루면서 퀄리티라는 일원론으로 마음과 물질의 분열을 통합하는 철학을 제출하는데 이 책은 대중 철학소설로서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지만 이 책이 심신이원론의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저 문제를 보다 명확히하고 들어둘 가치가 있는 하나의 관점을 제출했달까?
사실 애초에 인간의 언어로 이 문제가 해결가능한가 자체가 확실치 않다. 인간의 언어란 결국 인간이 만들어 낸 관념들의 집합이다. 물질이나 마음이라는 단어들도 그 정의가 추상적인 인간이 만들어 낸 관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데 단어와 단어로 이어지는 어떤 철학이론이나 과학이론을 만들었을 때 그것이 심신이원론을 분명히 해결한다는 주장은 마치 과학이론에 대한 지식만으로 과학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과 비슷한 냄새가 난다. 누군가가 그 철학이론에 공감하여 심신이원론의 문제가 분명히 해결되었다고 말해도 그것은 그냥 개념적 혼동에 불과한 것이며 다른 사람은 그런 확신에 도달할 수 없는거 아닐까?
과학에도 이런 문제가 있다. 양자역학은 일상의 경험을 넘어선 데이터로 만든 것이라 수학적 묘사를 제외하면 일상어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러니까 양자역학을 수학을 빼고 이해했다고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언어적으로 말하자면 전자는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다라는 말은 무의미한 모순적 표현일 뿐인데 어떻게 이걸 이해할 수 있는가? 그나마 과학에는 수학이라는 언어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과학이론이 객관적으로 옳음을 확신할 수 있다. 실험도 할 수 있다. 철학은 어떤가? 누가 기기묘묘하고 모순적 언사가 가득 찬 철학이론을 만들어 심신이원론을 해결했다면 그게 자기 만족외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심신이원론이 해결되어서 어떤 결과가 나온다는 말인가? 새로운 과학이라도 나오나?
심신이원론이 단지 철학자나 과학자의 문제가 아닌 이유는 누구나 알 수 있는 문제 때문이다. 만약 마음이란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거라면 우리는 모두 물질이며 과학의 대상이 되고 만다. 그럴 때 우리는 뭐가 되는 걸까? 인간이란 그저 기계이며 로봇일까? 이러한 결론이 아니었다면 심신이원론이나 인문학과 과학의 분열은 그저 학자들 사이의 논쟁거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정체성과 인본주의의 뿌리를 흔드는 문제이다. 따라서 누구나 불안감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럽다.
나는 이 심신이원론의 문제 또는 인문학과 과학의 분열문제에 대해서 누구나 이해할만한 한가지 시각이 가능해졌다고 믿는다.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과학이론도 철학적 배경도 필요없다. 그 시각이란 지식을 문제 해결 과정의 수단으로 보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문자 지식 패러다임으로 이 방식은 문자를 통해서 정보를 기록 변형하여 지식을 생산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지식이 문제를 해결한다. 인문학이란 이 문자 지식 패러다임에서 과학 패러다임을 제외한 부분이다. 과학 패러다임은 문자 지식 패러다임의 일부이지만 그 차이는 엄격히 측정해서 얻어진 데이터에만 근거하기 때문에 과학지식은 반증가능하고 매우 객관적이다. 인문학처럼 기본적으로 인간들에게 주관적으로 얼마나 호소력이 있는가에 의존하지 않는다.
과학과 인문학을 그 자체로 통합하려는 시도는 어느 한쪽을 파괴하는 것같은 현상을 만들거나 매우 추상적인 형이상학을 요구하기 쉽지만 문자에 기반한 문명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과학과 인문학을 바라보면 그 둘은 모두 문자 지식 패러다임의 결과물일 뿐이며 단지 객관성을 달성하기 위한 조건만 다를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학문의 통합이지 물질이나 마음의 통합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모든 관념은 학문의 결과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물질이 뭔지 알고, 마음이 뭔지 안다고 말하는 것은 착각이다. 우리는 물질이나 마음에 대해서 우리가 만들어 온 수 많은 지식때문에 그게 뭔지 아는 것이다. 그 지식들의 집합이 학문이다.
아무런 지식없이도 나는 물질과 마음의 차이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문자를 쓰지 못하고 추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했던 선사시대의 수렵채집인에게 물질과 마음의 분열은 아무리 들어도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말일 것이다. 그나 그녀에게는 주관성과 객관성이라는 말도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일 것이다. 수렵채집인에게는 돌멩이를 발로 차서 발가락이 아픈데도 이 감각경험이 반드시 돌멩이의 존재를 확증해 주지 않는다는 말은 미친 소리로 들릴 것이다. 수렵채집인에게는 보고 느끼는 것이 곧 현실일 것이기 때문이다. 심신이원론같은 것이 생겨난 이유는 뭔가를 봐도 있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고, 욕망하는데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규율에 따라서 행동해야 하는 문명사회의 생활조건이 우리에게 그와 관련된 고민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인문학과 마음을 동일시하거나 문자를 마음과 동일시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기록할 수 없는 것, 말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과 특히 많이 관련된 것이 마음이 아닌가? 이런 지적은 타당하다. 그래서 심신이원론의 보다 완벽한 해소는 문자 지식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자 지식 패러다임은 문자를 써서 문제를 해결하는 지식을 생산하는 접근법이다. 그런데 우리는 AI 패러다임도 가지고 있다. AI 패러다임은 AI를 만들어서 문제를 해결하며 이 AI는 데이터에 기반한 컴퓨터 최적화를 통해서 만들어 진다. 인문학과 과학이 모두 지식이라고 할 때 AI도 지식이다. 그래서 AI는 제 3의 지식이라고 불려야 한다. 그런데 AI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지식이다. 인간이 다룰 수 없는 양과 형태의 데이터에 기반해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지식을 생산하는 문자 지식 패러다임과는 달리 컴퓨터 최적화로 만드는 지식이 AI 이기 때문이다.
즉 AI 패러다임의 존재는 인간이 기록할 수 없는 것, 말할 수 없는 것에도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모든 무지의 영역에 모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AI 패러다임이 있으니 언젠가는 문자나 AI에 비견될만한 새로운 기술도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렇게 하나 둘 내가 지능 패러다임이라고 부르는 문제 해결의 패러다임이 늘어가는 가운데 이제까지는 우리가 모른다거나 도저히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하는 것도 하나둘 손에 가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마음을 이런 무지와 관련지어 이해하고 이 지능패러다임들이라는 측면들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자 지식 패러다임이 설사 인간의 마음을 모두 담을 수 없다고 해도 인간의 마음도 결국은 미래에는 더더 잘 표현되고 기록될 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일단 이렇게 믿으면 물질과 마음의 분열로 괴로워하는 일은 없어지게 된다. 왜냐면 물질과 마음의 분열이나 과학과 인문학의 분열, 객관성과 주관성의 분열은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부정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심신이원론은 사실 물질일원론으로 대체되어야 하는거 아닐까? 그렇다고 할 때 인간이란 무엇인가? 기계나 로봇인가? 하지만 AI라는 제 3의 지식까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생각은 사라진다. 표현은 이상하지만 인간은 AI다. 그래서 인간은 고유한 존재다.
인간이 AI라는 건 인간이 기계라는 말보다 더 끔찍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AI라고 부르는 것의 핵심은 정보와 최적화다. 그리고 우리는 자연에서도 진화라는 과정이 정보를 흡수하고 최적화과정을 진행하며 우리가 그 진화과정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래서 인간은 자연판 AI인 것이다.
인간이 기계라는 말과 인간이 AI라는 말은 서로 다르다. 기계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고 인간의 설계도대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기계라면 자동차를 대량생산하듯이 인간을 대량생산할 수 있으며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를 기계로 파악하기 싫어하는 것이다. 가치가 없어지니까 말이다.
하지만 AI는 데이터를 최적화하여 압축한 것이다. 일단 최적화의 방식이 뭐건 간에 데이터 혹은 정보 자체가 같지 않으면 같은 AI는 만들어 질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은 수십억년의 진화의 결과물이다. 그 진화속에서 흡수한 정보와 탄생이후에 겪었던 개인적 체험에서 흡수한 정보의 총체가 지금의 나다. 이 정보는 기록으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나는 마치 인간처럼 행동하는 AI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지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AI는 이미 존재한다. 하지만 기계의 경우에는 정확히 똑같은 복제라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AI의 경우는 원자단위까지 그대로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면 정확히 똑같은 복제라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결국 제 아무리 뛰어난 AI라도 인간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각각의 인간이 가진 고유한 정보가 그 AI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이게 기계와 AI의 차이다.
이런 지적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이것을 심신이원론 문제의 해결책으로 생각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마음이라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인간이 기계라는 결론은 AI 패러다임의 등장과 함께 무효화되었고 인문학과 과학의 충돌이 주는 불안감은 해소되었다. 이건 명백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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