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란 개념은 흔히 욕심같은 단어와 연결되고 경제적 문제와 연결되면서 철학적이지 않게 생각되어지지만 나는 누구인가 즉 정체성의 문제를 논할 때 빼놓을 수가 없다. 내가 무엇을 소유했다고 하는 것은 그것과 나와의 관계가 아주 긴밀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숲에 있는 것은 뭐하나 내 것이 없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수렵채집인과 부동산과 통장 잔고가 얼마나 되는지를 날마다 신경쓰며 살피는 현대인의 자아상이 같을 수가 없다. 그래서 BMW 열쇠만 가지고 다녀도 여자를 유혹하기 쉽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즉 BMW로 대표되는 고급차를 소유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남자를 다르게 보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다는 것이다.
동물도 자기집을 지키고 자기가 사는 영역을 지키며 다람쥐도 자기가 모아놓은 도토리를 지킨다. 그러니 소유란 개념은 적어도 애매한 개념상으로는 동물도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소유의 개념이 발달하려면 우리는 최소한 두 가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첫째는 기억력이다. 붕어는 3초밖에 안되는 기억력을 가졌다고 한다. 붕어가 뭔가에 대해 소유권을 기억하려면 3안에 그 사실이 다시 확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그걸 잊어버릴 것이다. 둘째는 정교한 사회적 소통이 가능한 개념들이다. 과연 기억력이 있다고 한들, 돼지들이나 소가 먹이통에 든 음식을 가지고 니것 내것이라는 개념을 가질 수 있을까? 사람은 왜 그런 것을 가지게 되었을까?
소유권의 발달을 설명하는 한가지 방식은 농업혁명이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내가 농사지은 것은 내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농사를 지어서 잉여 식량이 남으면 그 식량도 내것이어야 한다. 그런 소유권이 인정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농사를 짓지 않을 거이다. 농사를 지어놓으면 남이 가져가고 농사를 열심히 지어서 먹을 것을 비축해도 남이가져간다면 농사를 짓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저 수렵채집인들처럼 숲에 달린 열매는 먼저 발견하고 가지는 사람이 주인이라는 식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농업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착각을 하는게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농업을 하는 사람은 문명인이고 수렵채집인은 야만인이라는 생각이다. 이는 오늘날 농업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소수의 수렵채집인을 우리가 보면 그들은 문명인이 아니고 야만인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지만 농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이나 일어나던 때의 기준으로는 이런 생각은 옳을 수가 없다. 어느날 수렵채집인 중의 누군가가 농업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독점적 소유권이란 무엇인가를 탁 하고 깨달아서 그 다음날부터 문명인으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사실 혁명가는 당대의 사람들의 생각에 따르면 비합리적인 사람일 수 밖에 없다. 당대의 문화는 오래된 것이기 때문에 익숙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자연히 시간에 따라 최적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새로운 문화는 새롭기 때문에 그 가능성에 비해 문제 해결 능력이 떨어지기 쉽고 문제도 많을 수 밖에 없다. 옛날 문화가 가지는 모순과 한계가 극에 달해서 그것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문화로의 비약이 일어나는 것이지 그런 일이 없다면 문화적 혁명이 요구하는 댓가 때문에 혁명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대중화 되기 전에 마차를 타던 사람들은 자동차를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었다. 비싸고 시끄럽고 연료도 계속 있을 지 알 수 없으며 다른 말들을 놀라게 하고 매연을 내뿜고 너무 빨라서 위험하다고 말이다. 결국 사회적 환경의 변화가 마차의 비효율성을 부각시키지 않았더라면, 그러니까 사회가 변화하지 않았다면 자동차는 대중화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건 21세기에도 플로피 디스켓과 팩스를 쓰는 일본을 보면 알 수 있다. 보수적 일본사회가 안바뀌니까 새로운 기술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농업혁명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농업의 발달은 언어의 발달을 일으켰고 결국은 문자의 발달을 가져왔다. 참고로 농업혁명과 문자의 발달은 4-5천년의 차이가 있다고 여겨진다. 농업의 시작은 만년전이고 문자의 발달은 5천년전쯤 이라는 것인데 물론 이 숫자들은 바뀔 수 있지만 그래도 두 시기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래서 최초의 농부들은 구술문화속에서 농사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문자가 발달하기 이전 농경사회는 구술언어를 발달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농업과 구술언어의 관계가 닭과 달걀같은 것일 수는 없다. 누군가가 수렵채집인의 삶 속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그걸 유지했다. 그러려면 그들은 이미 발달한 구술언어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적어도 농부생활을 유지할 정도로는 발달한 언어를 말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농사를 짓는 건 미친 짓이다. 남들이 다 훔쳐갈 것이다. 그러니 굶어죽을 수 밖에 없다.
그럼 이런 언어들은 농업혁명전에 왜 발달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해 우리는 농업혁명보다도 훨씬 전부터 사용되었던 도구들에 눈을 돌리게 된다. 석기의 역사는 3-400만년이나 된다. 그리고 그 이전 수십만년전에도 뼈나 나무나 가죽으로 만든 도구가 사용되어졌었다는 증거들이 있다. 다만 석기와는 달리 이런 도구들은 사라지기 마련이고 당시에는 문자도 없었으니까 기록이 거의 없어서 도구의 역사가 정확하지 않을 뿐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문자가 쓰이기 이전인 선사시대는 물론 그보다도 전인 농업혁명이 있기 전에도 인간들은 집단을 이루고 도구를 사용하면서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도구의 사용은 학습과 소유권을 의미한다. 도구가 발달하려면 적어도 누군가가 만드는 것을 보고 배워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만든 도구는 자기거라는 개념이 있어야 도구를 쓸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선사시대의 인간들도 짐승같은 간단한 언어만 쓰던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내가 만든 도구는 내 것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면 인간은 농업도 시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침팬지도 도구를 쓴다. 도구를 쓰는 새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인간은 도구를 써서 태어난 자기 이상의 존재가 된다는 점에서 다른 생명들과 확실히 차이를 보였던 셈이다. 인간은 타고난 이빨이나 타고난 팔다리 타고난 피부로만 살았던 것이 아니고 도끼나 칼을 만들고 그릇과 옷을 만들었다. 그리고 계속 그렇게 하고 더 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언어도 만들어질 필요가 있었다.
그 복잡한 언어가 있었기에 농업혁명도 가능했다. 농사는 오랜 기간의 노동과 그에 따른 생산물에 대한 소유권이 필요하다. 그걸 주장할 수 없으면 농사는 지을 수 없다. 결국 니것 내것을 가르는 소유권의 시작은 언제나 우리 몸에 달려 있는 팔다리가 아니라 그렇지 않은 도구들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창을 만들어도 그걸 땅에 내려놓는 순간 내것이 아니게 된다면 창을 만들기 보다 남의 창을 쓰는게 더 편하다. 이래서는 오랜동안 고생해서 좋은 창을 만들 이유가 없을 것이다. 결국 그것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 셈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소유권의 역사에 대해서 중요한 부분을 빼뜨리고 있다. 농업의 시작은 확실히 소유권의 개념을 완전히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런데 왜 농사를 시작했을까 하는 부분이 필요하다. 농사가 좋아서라는 말은 답이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혁명이나 개혁은 새로운 문화를 표준으로 만들기 위해서 댓가를 요구하기 때문에 기존의 생활방식이 별로 문제가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수렵채집하는 생활로 살아갈 수 있다면 작물을 키우는데 엄청난 시간이 걸리는 무모한 농사로 먹고 살려는 시도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결국 농사를 시작한 사람들은 노인과 약자들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들은 수렵채집 생활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그 생활 기준으로 보면 죽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장기간 여행할 수 있고 사냥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냥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씨를 뿌리고 그것이 식량이 되는 몇달에서 1년동안 노동하며 기다린다는것은 미친 짓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동하는 순록떼를 쫒아가면서 살아가는 유목민은 현대에도 있다. 그리고 그들중 더이상 여행이 불가능한 노인이 생기면 그들은 어떻게 될까? 현대에는 그들은 별도의 정착지에서 살아가지만 옛날에는 그냥 버려지고 죽는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타고난 약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수렵채집 생활은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없다. 이 말은 결국 누군가는 버려지고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걸 막기 위한 수단이 농업이었을 것이다. 노인을 죽이지 않고 자식을 죽이지 않고 약한 가족을 죽이지 않으려면 수렵채집을 하지 않으면서도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농업이 처음부터 수렵채집보다 매력적이고 살기 쉬운 방법이었을 리가 없다. 살 방법이 없으니까 이거라도 해야 한다는 식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농사를 짓는 사람이 수렵채집인보다 훨씬 더 가혹한 노동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렵채집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긴 여행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어딘가에 주저앉아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실질적인 문명의 시작이 되었다. 농업이 인간의 소유개념이나 언어발달을 가져오고 결국 수렵채집인들은 지구상에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혁명은 배부른자의 놀음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의 용기다. 소유권의 발달도 이런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이 만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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