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다른 사람과 함께 합리적으로 생각하기에 대해서 써보겠습니다. 일단 이 주제 이전에 언젠가 합리적으로 살기 위한 세가지 원칙들이라는 글에서 쓰기도 했습니다만 내가 생각하는 한 개인이 합리적으로 생각하기 위한 원칙은 이렇습니다.
첫째, 나의 테두리를 인식하라.
둘째, 나의 감정을 인식하라.
세번째, 내게 주어진 시간을 인식하라.
이 원칙들을 간단히 다시 이야기해 보자면 먼저 우리는 우리가 지금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가, 무엇을 당연시 여기고 있는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어떤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고 인식하고 생각합니다. 뭔가를 당연시 여긴다는 것을 알아도 언제나 그것의 너머 까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합리적인 판단을 하자면 이 테두리를 최대한 우리의 의식 위쪽까지 끌어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뭔가를 그냥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판단을 하거나 우리가 꼭 지켜야 할 뭔가를 지킬 생각이 없으면 우리는 편협한 판단을 하거나 어떤 기괴한 논리에 넘어가서 자신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암묵적이었던 것을 인식의 단계로 끌어올리는 일중의 첫번째는 인류역사에서 법전을 만든 것일 수 있습니다. 글로 써놓고 이것은 꼭 지켜야 한다고 명백히 한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 기초적인 테두리는 법에서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합니다. 보통 상식이라는 말로 대충 말해지기도 합니다.
나의 테두리를 인식한다는 것은 우리가 판단을 내리는 근거가 되는 기초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이며, 나의 권리와 의무는 무엇이며 지금 어떤 환경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한 생각들이 이 테두리를 이루게 됩니다. 우리는 대개 이런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에 저는 이걸 무지의 장벽이라고도 부릅니다. 우리는 그걸 옳다고 여기면서 그 너머는 보지 않는다는 것이죠. 물론 우리는 때로 이 당연한 것들 너머를 보고 우리의 인식의 경계를 넓히기도 합니다. 인간이 아닌 동물의 생명의 가치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어떤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나서 생각을 전개하고 새로운 정보를 해석합니다.
그러나 최대한 노력했다고 해도 모든 것이 우리의 의식위로 올라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우리에게는 감정 혹은 직관 혹은 느낌이라는 형태로 표현되는 내부로부터의 조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 잊어버리거나 억눌러서는 안됩니다. 논리적으로 그리고 말로 설명할 수 있는 형태로 문제를 형식화하고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보고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대개 우리에게는 우리가 뭔가를 왜 해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자신의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결국 모든 것은 다 말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결국 자신이 어떤 환경속의 존재인지를 완전히 모릅니다. 아이가 자신이 얼마나 부모에게 기대며 살고 있는지를 다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문에 논리적으로는 가장 행복해야 할 상태가 실질적으로는 가장 행복한 상태가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는 뭔가를 잊어버리고 있을 수 있으며 우리의 직관이 그걸 말해주고 있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이런 의식적 무의식적 조언들에 모두 귀를 기울이되 우리에게는 유한한 시간만이 존재한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행동하지 않고 시간이 지나가면 생각도 직관도 유효시간이 끝나버립니다. 환경자체가 변해 버립니다. 인간의 수명도 유한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우리가 내려야 할 중대한 판단들에는 대개 마감날자가 붙어있습니다.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아서 행동이 없는 것 자체가 중대한 결정이고 행동입니다. 우리는 하염없이 더 확실한 답을 찾기 위해 정보만 모으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같은 것을 종합하자면 저는 일단 뭔가에 대해 정보를 모으고 읽기도 하면서 문제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그리고 나서는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마음속에서 차츰 답이 나타납니다. 그 답은 논리적인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냥 왠지 터무니없는 것이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내가 왜 그렇게 하는지에 대해 조목조목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할 때 중요한 것은 내가 언제 결단을 내릴 것인가를 미리 대충 생각해 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제까지는 반드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인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면 그때까지는 되도록 판단하지 않습니다. 정보가 들어오도록, 내 마음이 흘러가도록 내버려 둡니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는 외부의 정보나 영향을 끊고 내 마음이 자유롭게 흐를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논리적으로만 결단을 내려서는 안됩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미리 미리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을 봅니다. 준비를 미리 미리 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특히 이래도 저래도 좋은 것은 뒤로 미룰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걸 치워둬야 마음을 비우고 마음이 흘러가도록 할 여유가 생깁니다. 하지만 미리 결정해 둘 필요가 없는 것을 결정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어느 쪽이든 이렇게 하자고 결정해 버리면 그 다음일을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자꾸 이것 저것을 미리 결정하고 단언한 다음에 그 다음 그 다음을 상상하면서 미래를 그리고 그러다가 벽에 부딪히면 처음으로 돌아와서 다 뒤집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건 시간낭비입니다. 미래는 우리가 예측한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필요없는 것은 미리 결정해 둘 필요가 없는 겁니다. 아니 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정하고 나면 자꾸 그 다음으로 마음이 가기 때문입니다.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지만 많은 중대한 문제들은 사실 아무 일도 안해도 저절로 해결됩니다. 세상이 변하고, 사람이 변하고, 문제 자체가 변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과 안중요한 것은 섞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결정해야 하는 모든 일들이 다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은 물론 그것도 더 잘할 방법이 있겠지만 이렇든 저렇든 크게 문제가 되지 않고 언제나 말하지만 미래는 모르기 때문에 그에 맞춰서 또 결정을 해나가면 됩니다. 그러니까 10원짜리는 10만큼 신경을 쓰고 1억짜리는 1억만큼 신경을 써야 합니다. 이건 당연해 보이지만 중요한 것을 구분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모든 것을 뒤섞어서 건수마다 비슷한 에너지를 쓰게 됩니다. 10억짜리 전세계약서 쓰러가는 길에 야채가게에 들러서 두부도 사오면 좋겠네라는 식의 생각을 하는 겁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중요한 일은 중요하게 경건하게 다뤄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의식수준에서 알고 있다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중요한 판단에는 마음의 평화가 필요합니다.
또 중요한 것은 즉흥적인 판단입니다. 우리는 즉흥적인 판단을 꽤 자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일이라면 그래서는 안됩니다. 중요한 것도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만 어떤 일이 꽤 중요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예를 들어 집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랜 고민끝에 한 집을 사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집을 계약하러 갔는데 예상치 못한 일로 그 집을 계약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 집을 선택하는데 한달이 걸렸을 수도 있고 1년이 걸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오랜간 고민한 일이라도 정작 행동을 취하는 상황에서는 일이 확 뒤집어 질 수 있습니다. 종종 예기치 못하게 일은 흘러갑니다.
문제는 그 순간입니다. 그럴 때 이왕 집사러 나왔으니 이 집은 어떻습니까라는 말에 5분만에 살 집을 바꿔서는 안됩니다. 아마도 그럴만한 때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이건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정 그런 즉흥적 판단을 피할 수 없다면 그럴 때는 숨을 한번 크게 쉬고 최대한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다시 하려고 해야 합니다. 당황한 순간에 즉흥적으로 이거 아니면 그럼 이거하는 식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중요한 일이 아니라서 이거든 저거든 상관없는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사실 사기꾼들이 이런 방법을 많이 씁니다. 마술사는 관객이 어딘가에 정신을 팔게 해서 시선을 끌고 마술을 부립니다. 사기꾼들도 사기칠 대상이 빠르게 판단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몰아넣습니다. 왜냐면 그럴 때 잘못된 판단을 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친구가 단순히 친목 모임이라고 해서 갔는데 알고 보니 마약파티였습니다. 나는 예측과 달라서 당황합니다. 자연히 거기 있는 사람들은 이런거 아무 것도 아니라면서 너도 해보라고, 여기 사람 다 하지 않냐고 합니다. 그런 순간 순간적으로 그래 아무 것도 아닌 거구나 하면서 이왕 파티에 왔으니 한번 해보지 하는 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적어도 한번 숨을 쉬고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데 지금 내가 뭘 선택하는 건지를 생각할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자동차 중고 판매상이 세상에 없는 매물을 내놓고 그걸 찾아온 사람에게 그건 팔렸다면서 이걸 보라고 하면서 차를 파는 것도 비슷한 방법입니다. 예측과 다른 당황속에서 중대한 실수가 생깁니다. 능숙한 세일즈맨은 그걸 유도하는 겁니다.
예측과 다르면 누구나 당황을 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훨씬 더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즉흥적인 판단을 계속 하는 겁니다. 당황하면 허둥지둥 일을 본래의 계획대로 만들려고 빠르게 일들을 결정합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진짜 현명한 사람은 남이 보기에 둔하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왜냐면 중요하지 않은 것은 부주의하게 대충하고 중요한 것은 남들이 보기에 지나치다고 생각할 만큼 꼼꼼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며 결코 일을 빠르게 즉흥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 똑똑한 사람은 무슨 판단하는 기계같지요. 이일 저일 중요한 거 안중요한 거 가리지 않고 일들을 뒤섞어서는 척척 무한한 확신을 가지고 결정해 나갑니다. 살다가 보면 예상하지 못한 일은 언제나 생기지만 그래도 이 사람은 계속 선택을 척척 합니다. 사실 교과서를 외워서 답을 하는 학교에서는 이런 사람이 똑똑해 보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육의 실패입니다. 이런 사람은 로봇같이 움직이고 자기 생각이나 깊은 생각없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진짜 합리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미리 주어진 정답지를 외우고 그대로 일들을 빠르게 해치우는 것은 중요한 판단을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렇게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리를 하고 나면 우리는 오늘의 진짜 문제를 고민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과 함께 합리적으로 생각하기 혹은 합리적으로 행동하기입니다. 우리는 모두 개인적으로는 매우 유한합니다. 그래서 혼자서 모든 일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잘 모르는 것은 남에게 물어봐야 하고 친구나 전문가의 의견도 참고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할 때 위에서 쓴 원칙은 수정되거나 확장되어야만 합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뛰어난 집단 지성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뭘 해야 할까요?
집단지성을 위한 세가지 원칙중 첫번째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위에서 말한 한 개인의 합리적으로 판단할 조건을 망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서로 대화를 하고 정보를 주고 받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그것을 주장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꼭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우리의 생각을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강요받기를 거부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부모들이나 어떤 직장상사나 어떤 형과 누나는 자식이나 부하직원이나 동생에게 끊임없이 네가 뭘 아냐라던가 그게 뭐냐고 윽박지르듯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옆에 있으면 당연히 마음의 평화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위에서 말한 합리적인 판단이 안됩니다. 겉으로는 내가 하는 판단같지만 실제로는 강요받은 생각을 어설프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생각을 한다기 보다는 누군가의 어설픈 손발이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는 집단으로서의 사고가 개인의 사고보다 못합니다. 결국 독재자 혼자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왜 내손발처럼 자연스레 움직이지 않냐고 멍청하다고 욕을 하는 꼴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사실 남에게 독재자처럼 구는 사람들 치고 진정으로 머리좋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상황이 바뀌면 독재자처럼 구는 그 사람이 또 누군가의 앞에서는 바보처럼 행동합니다. 집단적 사고라는 개념자체를 모르고 수직적 상명하복만 아니까 그렇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건 문화의 문제입니다. 게대가 독재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유한합니다. 유한한 인간임을 느끼는 사람이 어떻게 남에게 독재적으로 행동하겠습니까? 다만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합리적으로 살기 위한 방법을 파괴하는 것에 대해서만 강하게 화를 낼 뿐입니다. 독재자에게 항의했더니 너는 왜 그렇게 폭력적이냐고 말한다면 어처구니 없지만 자신의 사고 방식이 그렇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종종 그런 식으로 상황을 인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첫번째 원칙은 물론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남의 의견과 내 의견을 합칠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어느 주식전문가가 삼성주식이 내일 오를 거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삼성주식을 사야 할까요? 이 상황은 나의 판단과 전문가의 판단을 합쳐야 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나는 전문가가 주식 문제에 대해 나보다 훨씬 더 전문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조건 전문가의 의견에 가중치 1을 두고 내 의견을 무시한 채 삼성주식을 사야 하는걸까요? 아니면 반반의 가중치로 의견을 합쳐야 할까요? 아니면 전문가의 의견을 무시하고 내 의견대로 해야 하는 걸까요?
일단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확률을 말하지 않는 전문가를 조심하라고 말한 신호와 소음의 저자 네이트 실버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혹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주식 가격의 예측같은 것은 누구에게도 확실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측은 확률을 말해야 합니다. 비가올 확률이 80%이라고 말하듯 삼성주식이 오를 확률이 100%인지 70%인지 말해야 합니다. 네이트 실버는 자기예측에 대해 확률을 말하지 않거나 말할 능력이 없는 전문가는 무시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확실한 것들에 대해서는 하나의 값이 아니라 분포를 떠올려야 합니다. 미래처럼 불확실한 것은 아직 결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자기의견을 최대한 세게 말하는데 익숙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태도는 집단 지성을 망가뜨립니다. 여기 열명의 사람들이 있다고 해봅시다. 서울이 어느 방향에 있는지 확신하는 사람은 사실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서울은 분명히 여기에 있다고 단언하듯 말해버리면 결론은 그쪽으로 나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누군가가 별근거도 없이 그렇게 확신하는 태도를 보인거라면 집단적 결론이 망쳐집니다. 그 누군가가 결정에 대한 책임의식도 없이 그저 내 의견은 의견중 하나였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주 한심한 주장입니다. 그 말은 자기 주장은 확신에 차서 세게 말하고, 전문적인 것처럼 말해서 집단의 결정을 주도하려고 하면서도 책임은 지지 않는다는 것이니까요. 이건 이거 꼭 먹으라고 해놓고는 그러게 누가 내 말을 믿으래라고 말하는 식입니다.
집단적인 사고를 합리적으로 하기 위한 두번째 조건은 사람들이 과장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의견이 어느 정도나 확신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인지를 솔직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집단적 사고 속에서 개개인들은 말하자면 하나 하나의 센서들과 같습니다. 만약 어떤 센서가 매번 미친듯이 울려댄다면 그런 센서의 신호는 무시되어야 합니다. 합리적 집단사고의 기본은 상호존중과 자기 반성입니다. 목사의 의견이라고해도 토목공사에서도 의미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토목공사에대해 이야기하면서 목사가 토목학과 교수에게 당신이 뭘 아냐는 식으로 말하기 시작하면 집단은 미쳐돌아가게 됩니다. 광신자가 집단결정을 독점합니다. 진짜 아는 사람은 미래는 불확실하며 따라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고 말하는데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확신에 차서 다른 사람들을 비웃으며 이것도 모르냐고 당당하면 집단의 판단결과가 이상해 질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이쯤하고 이제 다시 상황을 고쳐 봅시다. 우리는 전문가가 단언하지 않고 얼굴표정이든 숫자든 어떤 수단을 통해서 자신의 확신을 표현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문가의 의견과 나의 의견을 합쳐야 합니다. 수학적으로는 이것은 두 개의 확률분포를 가중치를 두고 더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으며 좀 더 수학적으로 쓰면 베이지안 사후확률의 계산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여전히 우리는 가중치가 뭐가 되어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느 쪽의 의견이 더 중요한 것일까요?
여기에는 기억해야 할 중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일 삼성의 주식이 오른다는 예언과 오늘 삼성의 주식을 산다라는 행동은 반드시 당연한 인과관계로 연결되어져 있지 않다는 겁니다. 주식을 사는 투자는 여러가지 방식이 있으며 대개 하루 주식을 사서 내일 파는 초단타 투자를 정상적인 주식 투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지 못하는데 내일 오를 것같으면 오늘 사고 내일 떨어질 것같으면 오늘 파는 식으로 주식을 초단타로 투자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있다고 해도 권장되지는 않으며 거액의 투자금이라고 하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문제는 전문가와 내가 같은 게임을 하고 있는가가 불확실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누구도 똑같은 게임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각자 상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주식전문가가 나보다 무한히 전문적이라서 그 주식 전문가에 비하면 내 의견이 전혀 고려할 가치가 없다고 해도 그 주식 전문가의 예측을 믿고 하루 사고 하루 파는 투자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바둑이라는 게임의 규칙을 나는 모르는데 누군가가 시키는데로 바둑을 두는 것과 같습니다. 매번 정확한 명령이 내려온다면 그것도 가능하겠지만 전문가의 조언은 드문드문 주어집니다. 이러면 전혀 모르는 게임을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마도 그 주식 전문가에게는 자기 나름대로의 '상식적인' 주가 투자 방식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식 전문가는 부자들만 봐서 주식투자는 100억쯤은 있는 사람이 하는 거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당장 마이너스 통장으로 빚내서 일주일 안으로 환금하고 그 빚을 갚아야 하는 사람이 주식 투자를 한다고는 상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고려해서 더 합리적 판단을 내리고자 할 때 우리는 먼저 그들이 하는 게임과 내가 하는 게임이 비슷 한지를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전을 던지면 앞면이 나올 확률이 0.5라고 하는 것은 언뜻 들으면 당연한 것같지만 크고 무거운 동전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던질 수 있다면 주로 앞면만 나오도록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도 즉 그렇게 예측하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이렇게 예측이란 정보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주관적입니다. 서로가 알고 있는 게임이 서로 다르면 예측이 달라집니다.
꽃을 주면서 청혼을 하면 여자가 받아들일 확률이 얼마냐고 AI에게 물었더니 그 확률이 80%라고 답했다고 해봅시다. 이런 답에 대해 나는 한국인이야라고 말하면, 아 한국인이군요. 한국인이라면 그 확률이 85%입니다라고 답이 수정될 수 있습니다. 나는 키가 작아라고 말하면 키작은 한국이시군요. 그렇다면 확률이 60%입니다라고 답이 수정될 수 있습니다. 나는 강국진인데라고 말하면 죄송하지만 강국진이 누구인지 몰라서 확률을 모르겠습니다라고 답이 수정될 수 있습니다.
권위있는 전문가든 최고의 AI든 어떤 확률을 말할 때 그들은 그들의 게임을 하면서 확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모두 같은 게임을 하고 있거나 비슷한 게임을 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육전문가는 뭔가를 상식적이라고 여기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육전문가의 의견이 항상 옳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집단적 사고를 합리적으로 하기 위한 마지막 조건은 그래서 모두가 같은 게임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대화입니다. 차를 운전하려면 우리는 사방의 흐름에 대해 모두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왼쪽에 차가 나타나서 그걸 알려주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지나치게 소리를 지르면서 그것만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그럴 때 문제가 생깁니다. 운전은 차의 주변 모두에 관련된 것인데 왼쪽만 보는 사람이 자기가 보는 것이 전부라고 믿고 그걸 기준으로 신호를 너무 세게, 너무 자주 보내는 겁니다. 그러면 운전은 위험해 집니다. 운전자와 동승자가 지금 같은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치도 이렇습니다. 국가의 행정은 여러가지를 종합해서 결정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사람들은 크고 작은 문제를 가집니다. 좁은 시야를 가진 사람들이 소리를 질러댑니다. 엄청난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며 공포에 빠져듭니다. 지금 운전대를 잡은 사람은 미쳤다고 야단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한쪽만 있는게 아닙니다. 위험을 경고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자기 눈에 보이는 것에만 몰두하는 사람이 대개 바보입니다. 정치가 제대로 되려면 우리는 정치의 다양한 측면들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종합적인 이해가 뭔지에 대해 평상시에 대화가 필요합니다. 전체에 대한 감각을 공유해야 합니다.
이런 일들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집단이 모이면 종종 한 사람 한 사람보다 더 어리석어집니다.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서 바보같은 집단이 됩니다. 서로에게 자기 의견을 강요하고는 책임을 지지 않고, 확신도 없으면서 자신감에 넘쳐서 의견을 말하고 전체에 대한 생각도 없이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작은 가족단위로 살던 수렵채집인의 사회가 거대한 국가를 만들어 문명을 건설하던 때에도 나왔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더 큰 집단을 만들고 모여서 서로의 힘을 합치려면 위에서 말한 것들이 필요합니다. 언어를 발달시키고 서로의 얼굴 표정 변화를 인식하는데 예민해 지고 성문법을 만들고 계량형을 통일하는 등 여러가지 일들을 했기에 수렵채집인들은 문명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건 쉽지 않았지만 문명이란 결국 그런 일들을 해내야 가능한 것입니다.
과학과 컴퓨터 그리고 전자통신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인간 사회는 그 어느때보다 복잡하고 더 빨리 변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집단적으로 합리적으로 사고하는데 있어서 도전이 됩니다. 그래서 세계는 지금 민주주의의 위기 속에 빠져 있습니다.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확신이 없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니까 점점 더 무지한 확신자들이 집단을 이끌게 됩니다. 문제가 복잡하니까 그 문제의 전체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교육을 시킨다는 것도 어려워집니다. 그나마 세상은 빨리 빨리 변하니까 사람들의 공부가 세상을 쫒아가지 못하는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집단적으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시대적 문제가 되었습니다. 인류가 꼭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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