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에는 수 많은 책과 동영상등 여러 컨텐츠들이 세상을 뒤덮고 있다. 그리고 사람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트위터나 게시판의 짧은 글이나 동영상에 익숙해 져서 말하자면 짧게 요약되어 치열하게 이유를 따지지 않는 글을 좋아하기도 하는 것같다. 사람들은 아주 세부화된 작은 주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좋아하거나 아니면 그럴듯한 추상적인 단어를 몇개 나열하는 간단한 조언을 좋아한다. 나는 이런 걸 가벼움의 경향이라고 이 글에서 부르려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런 가벼움의 경향과 동시에 혁명의 경향도 있다. 즉 변화가 크고 빨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디선가 내가 별로 주목하지 않은 분야가 있는데 그 분야는 미친듯이 성장하는 그런 경우가 많이 있다. 요근래에는 양자계산에 대한 뉴스를 많이 봤다. 몇년전만 해도 전혀 실용화가 언제 될지 몰라 보이는 분야였는데 갑자기 금방 우리 집에서 양자컴퓨터가 돌아갈 것같은 뉴스가 쏟아지고 그런 분야에 대한 회사의 주식이 몇배씩 폭등하는 걸 보게 된다.
문제는 이런 가벼움과 혁명의 경향은 서로 충돌한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는 그걸 진화 과정을 통해 설명할 수가 있다. 진화는 돌연변이라는 유전적 변화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장은 아주 중요한 것을 망각하고 있다. 사실 진화과정이란 변화 이상으로 변하지 않는 안정성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만약 유전정보를 가진 DNA가 아주 안정적인 고분자가 아니라면 세포 분열 가운데에서 돌연변이가 마구 발생해서 인간은 죽을 것이다. 모든 생명체가 죽을 것이다. 인간은 태어났을 때 받은 유전자를 수조번 분열하는 가운데에서도 그대로 보존한다. 진화를 하려면 일단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이런 안정성이 없이는 진화 과정이라는게 있을 수 없다.
일찌기 칼 포퍼는 인간의 사고라는 것이 왜 그렇게 잘 발달했는가를 이야기하면서도 이 안정성을 이야기한다. 진화과정에서 실패한 돌연변이는 죽어 버린다. 그러니까 잘못된 시도는 생명이 위험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사고는 언어로 문자로 표현되고 나면 그걸 만들어 낸 사람과는 동떨어져서 수정될 수 있다. 뉴턴의 물리학이 반박된다고 해서 뉴턴이 죽지 않는다. 아인쉬타인이 틀린 말을 했다고 해서 아인쉬타인이 죽지 않는다. 문장으로 문자로 표현된 사고는 그래서 변하지 않는 보존성을 가지고 마구 수정해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진화의 시간 척도로 보면 순식간에 불과한 몇천년 아니 몇백년에 인간이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진화한 것이다.
혁명에 대해서는 부분과 전체를 쓴 하이젠베르크도 마찬가지 말을 했다. 나치를 추종하는 혁명주의자인 청년에게 하이젠베르크는 되는 대로 마구 부시고 바꾸는 것이 혁명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기존의 시스템을 철저하게 따진 후에 바뀌어야 하는 부분에 역량을 집중해야 진짜 혁명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가볍게 좁게 세상을 보는 눈으로 세상을 빠르게 바꿔가면 세상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이젠베르크나 포퍼에 따르면 그건 재앙이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모든 것은 망가지고 결국 혼돈만이 남게 될 것이다. 진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요즘 AI 교과서때문에 시끄럽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나는 말을 하고 책을 읽는 것은 구식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더 편해 보이는 길, 더 효율적으로 보이는 길이 꼭 바람직 하지 않다. 해리포터를 책으로 읽는 것보다 영화로 보는게 훨씬 쉽다. 심지어 더 생생한 면도 있다. 하지만 책으로 읽을 때에만 얻을 수 있는 것도 있다. 뭔가를 빠르게 빠르게 하기만 하면 사고가 단단해 지지 않는다. 교육은 때로 느릴 때도 있어야 한다. 동영상이나 AI에 아이들을 너무 빨리 노출시키는 것이 꼭 지능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건 마치 고전은 어려우니까 고전의 요약본들만 읽히고 넘어가자는 식의 발상이다. 프랑스는 머니까 프랑스 여행 동영상만 보고 프랑스 가본 걸로 하자는 것과도 비슷하다. 아이들은 더더욱 수동적이 될 것이고 AI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기 보다는 AI의 노예가 될 것이다.
빠르고 복잡하게 변해가는 세상을 무시하면서 그저 변하지 않는 것, 관습적인 것에만 매달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린 급류속을 수영하고, 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는 법을 익히는 듯 이런 세상에서 사는 법을 익힐 필요가 있다. 하지만 즉흥적으로 변화하고 적응하면서 산다고 해도 자신의 중심 핵조차 흔들리면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게 된다. 그러니까 적응하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나를 구성하는 핵심을 안정적으로 지키는 것도 필요하다. 그걸 위해서는 자기 성찰이 필요하고 천천히 자기의 사고를 쌓아나가는 시간도 필요하다.
투자는 자기 판단으로 해야 한다는 말은 유명하다. 이 말은 기본적으로 내가 위에서 한 말과 같은 뜻이다. 급격한 변화가 넘쳐나는 투자판에서 자기 생각이라는 게 없으면 그냥 남따라 우 몰려가다가 한번에 다 망할 수가 있다. 남이 보는대로만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결국 가볍기만 해서는 곤란하다. 깊고 더 넓은 시각이 필요하다. 자기를 자기가 관찰하는 메타인지가 필요하다. 그렇지 못하면 세상도 엉망이 되고 세상의 급류에 휘말려 자기 자신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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