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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이해하기

민주주의는 영원할까?

by 격암(강국진) 2024. 7. 22.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하라리는 그의 다른 책 호모 데우스에서 인본주의는 3-400년밖에 안된 사상이며 인류 역사에서 이정도 기간동안 유행한 사상이 변하거나 사라지는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어떨까?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부터 시작하여 21세기까지 수천년간 유지된 사상인가?

 

그런데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노예제에 기반한 것이었다. 평등이 없는 가운데 민주주의가 있었는데 그게 정말 민주주의인가? 사실 노예제가 사라진 것은 최근이고 여성이 투표할 권리를 가지게 된 것도 겨우 백년 남짓이다. 한국에서는 일제시대가 끝나면서 보편적 투표권이 생겨났기 때문에 백년도 안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남녀모두 참정권이 없었다고 해야 하고 심지어 일본인 여성도 1945년에 일본이 2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하기 전에는 참정권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모두가 투표권을 가지는 시대가 백년은 된 것인가? 나는 그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성년자가 투표권을 가지지 않는 문제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운영에 있어서 전문가의 역할은 점점 더 커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많은 판단이 전문가의 영역에 있다. 오늘날 처럼 복잡한 세상에서 나는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뽑는 것도 과연 전문적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사회의 개개인이 충분한 보편적 이성을 가지고 사회적 판단을 다수결 투표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인류 역사상 한번도 사실인 적이 없었다. 언제나 투표는 특권층들만의 투표였거나 아니면 명백히 개개인의 이해가 그런 판단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보편적 투표권의 문제나 전문성의 문제는 오히려 가면갈수록 더 심각해져서 요즘은 새로운 이름이 필요할 정도가 되었다. 그것은 다른 사상내지 다른 게임의 문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회적 다양성과 복잡성의 증가는 다수결이나 소통에는 많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성당에 다는 사람과 무신론자가 있다고 하자. 이 사람들이 낙태문제에 대한 토론을 하는게 의미가 있을까? 이건 마치 축구선수와 농구선수들에게 공을 손을 잡아도 되냐고 묻는 것과 같다. 축구선수는 축구라는 게임의 맥락에서 답할 것이고 농구선수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답은 뻔하다. 답이 뻔한데 다수결을 하거나 소통을 많이 하면 그 답이 달라질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사람들의 환경적 차이와 입장이 아주 다양한 가운데 그걸 단순히 투표나 소통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점점 비현실적이 되어가고 있다. 축구나 농구같은 게임의 차이는 각각의 게임들은 다양한 측면들의 총합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마찬가지로 각각의 인간들은 다양한 측면들을 가진 문화나 철학이나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옳은가 그른가를 묻거나 4가지나 5가지선택지 중의 하나의 답을 고르라는 질문은 점점 무의미해 지는 것이다. 각각의 사람들이 가지는 복잡다단한 입장, 어떤 하나의 행동에 의미를 주는 다양한 문맥들을 고려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세계는 점점 더 수 많은 사이비 종교인들이 넘쳐나는 것같은 비합리적인 곳이 되어간다. 사람들은 물론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실제로도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 전체 사회가 한 걸음을 어느 쪽으로 걸어야 할까를 논해야 할 상황에서 사람들은 서로 소통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다른 문맥들 속에서 그 걸음을 해석한다. 서로의 소통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보다 정책과 사회의 복잡성 때문이지만 그것 이외에도 행동의 일관성을 둘러싼 믿음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 또 다른 한가지 이유다. 이런 이유들이 합쳐지면 실질적으로는 하나의 집단의 믿음은 그 집단 바깥에서 보면 사이비종교와 다를 것이 없다. 과학자 단체, 검사 단체, 의사 단체, 노동자 단체, 여성 단체, 자영업자 단체, 농민 단체, 학생 단체, 기업인 단체등 온갖 종류의 단체들은 사실 이걸 보여주고 있다. 

 

즉 오늘날의 사회에는 전체 사회 구성원이 믿고 의지할 강력한 질서가 사라져 가고 있다. 심지어 그런 것을 전체주의적이라 나쁘다고 말하면서 다양한 의견들이 서로 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만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물론 누군가가 어떤 권력으로 다른 사람을 침묵시키는 것은 나쁘겠지만 어떤 결론도 도출할 수 없을 정도로 이야기만 무성한 가운데 나중에는 그 의미를 찾기 힘든 다수결 투표로 결론을 내버리거나 어떤 복잡한 법률시스템이나 관료주의안에서 일이 굴러가게 만드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크고 복잡하며 빨리 변해가는 세상속에서 사람들은 적어도 압도적인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이 관련된 작은 세계안에서만 살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등이나 정의가 서로 다르다. 의사나 검사의 입장에서 혹은 세습하며 기업을 운영하는 재벌들의 입장에서 혹은 식당 자영업자의 입장이나 일용직 노동자의 입장이나 외국인 노동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볼 때 서로가 너무 다른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재벌 4세로 사회적 평균의 입장에서 보면 부유하게 자라난 사람도 자신은 어릴 때부터 고생이 많았으며 가난했고 지금 자신이 이뤄낸 것은 전부 자신의 피나는 노력 때문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은 아주 크다. 종부세를 내야하는 비싼 부동산을 가진 사람에 대해 눈물흘리는 사람도 우리는 흔히 본다. 그리고 똑같은 사람이 초등학생에게 급식을 무료로 주는 것에 반대하면서 한국의 출산률 걱정을 하기도 한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요즘같은 세상에서 사람들이 각자 입장이 다르다는 말을 하면 그건 당연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각자 이기적으로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사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거나 그런 입장차이가 쉽게 조절가능하고 조절되고 있다고 믿어도 되는 것일까? 그건 모두가 사회적 시스템의 수혜자라는 사실을 망각하거나 잘은 모르지만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은 잘 돌아갈거라고 막연히 말하는 것과 같다. 의사가 의사만 생각하고 환자는 환자만 생각하면 정말 의료시스템이 유지될까? 검사가 검사입장만 생각하고 일반 시민은 자기들 입장만 생각하면 정말 사법시스템이 유지가 될까? 사회시스템이 무너지고 난 후에 아 그러고 보면 우리가 모두 이기적이어서는 우리는 망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셈인가? 

 

물론 과거를 돌아보며 이런 문제는 과거에도 있었고 우리는 이제까지도 그럭저럭 잘 살지 않았냐고 말하는 사람들의 지적에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이런 낙관론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일단 이제까지의 세상이 그럭저럭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무엇보다 경제성장이 계속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전반에는 엄청난 전쟁들이 있었고 그때는 세계적으로 교육도 보편화되지 않았으며 환경오염도 지금같지 않았다. 그러니까 성장이 계속 되는 동안 모두에게 기회가 있을테이니 비록 지금이 불만스러워도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더 행복한 미래가 펼쳐질 수 있을 거라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비싼 대학교육을 시키면 내 자식은 새로운 세상에서 좋은 삶을 누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20세기는 그런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의 세계는 이렇다. 일단 전통의 부유한 선진국인 일본과 서유럽국가들 그리고 미국이 모두 경제가 좋지 않다. 엄청난 재정적자를 누적시켰고 연금도 고갈된지 오래다. 어찌보면 정상인 나라가 없다. 국가가 빚을 갚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 일본같은 나라는 금리를 미국 수준으로 올리면 국가가 당장 파산할 것이다. 1년 예산으로 국가부채에 대한 이자도 못낼 것이다. 신흥 세력인 중국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중국의 싼 물건들이 선진국 사람들의 삶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었고 중국의 빠른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했지만 이제는 중국이 더 성장이 불가능하다. 세계 질서가 유지되는 가운데에서는 말이다. 그렇지만 중국의 경제성장이 멈추면 반대로 중국은 사회가 불안정해질 것이다. 세계의 인구는 80억명을 넘어섰고 자원과 환경문제는 너무나 심각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막연히 고도 성장이 지금의 문제들을 해결해 줄거라는 믿음이 유지될 수는 없을 것이다. 금값이 오르고 비트코인처럼 국가가 관여하지 않는 화폐가 인기를 얻는 것은 결국 기존의 세계 질서가 그만큼 불안하다는 뜻이다. 

 

지금의 세계는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와 결별하고 완전히 대안적인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도록 노력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그것은 인구가 많아지자 수렵채집 생활을 뒤로 하고 농경생활을 시작했던 때를 연상시키게 하고 서구의 중세에서 교황중심의 종교시대가 끝나고 상공업중심의 세상이 펼쳐졌던 때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즉 수렵채집에서 1차산업으로, 1차산업에서 2,3차 산업으로 생활방식을 바꿨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압력을 받고 있는가? 한마디로 더 지능적인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압력을 받고 있다. 더 강력한 사회적 협동이 아니면 생존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는 개척하거나 새로이 발견할 땅도 없다. 자원이 당장 고갈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환경파괴와 인구증가가 계속되면 정말 100년뒤에도 사람이 지구에서 살 수 있는게 맞을까? 예를 들어 깨끗한 물이 없어서 물을 먹는 것만으로도 한달 생활비의 절반 가량이 나가는 세상이 되어도 그게 인간답게 사는 것일까? 이런 질문이 웃긴다고 우리는 단언하지 말아야 한다. 불과 40년전에는 맹물을 돈주고 사먹는 시대가 올거라는 것에 대해 한국 사람들은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미세 플라스틱때문에 결국은 물고기를 먹지 못하게 될거라는 주장은 어떤가? 정말 우리는 그것을 비웃을 수 있는게 맞는가? 이런 문제들에 어떤 해결책을 내놓기 위해서는 당연히 더 강력한 사회적 협동이 필요한데 내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기존의 민주주의의 이상으로는 오히려 사회적 질서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이것은 그야말로 문명의 몰락이 아닐까? 대안은 무엇인가? 대안은 화성에 식민지를 건설해 인간멸종을 막는게 대안인가? 

 

지금의 인류는 AI같은 것때문에 멸종위기를 겪고 있는게 아니다. 과거의 방식이 성공적이어서 인구는 폭발했다. 그리고 세상은 복잡해졌다. 그 결과 이제 과거의 삶의 방식이 통하지 않는 수준까지 도달한 것이다. 그러니까 전쟁이든 전염병이든 환경오염이든 뭔가가 인류의 숫자를 줄이고 지금의 인간 사회를 괴멸시키게 되든지 아니면 다시 한번 인류는 문화적으로 진화해야 한다. 어쩌면 그 둘 다가 모두 일어날지도 모르고 어쩌면 이게 인류 역사의 끝일지도 모른다. 인류는 지구입장에서 보면 통제불능으로 확산한 암세포같은 것이었다는 것이 전부일 수 있다. 

 

지금도 지구상의 많은 지역에서는 많은 인간들이 괴롭게 살고 있다. 세계 인구의 10%인 8억명이 만성적 영양실조에 걸려 있고 매년 약 9백만명이 굶주림으로 죽는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당연히 한국보다 훨씬 못사는 나라에 살면서 독재와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당연히 민주주의와 번영을 꿈꿀 텐데 과연 그게 가능할까? 전세계 사람들이 모두 한국인만큼 잘 사는 세상, 미국인만큼 소비하는 세상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더 지능적인 사회는 어떻게 가능한가? 어떻게 우리는 더 추상적인 관념을 이해하면서 지금보다 훨씬 더 뛰어난 문명을 건설할 수 있는가? 지금 처럼 더 많은 교육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하면 그게 가능할까? 그게 가능하다면 예를 들어 영국이나 프랑스나 일본이나 미국은 이상적인 세계에 도달했는가? 인도나 중국이나 베트남이나 아프리카에게 그 교육을 보급하는 것만으로 정말 인류에게 희망이 있는 것일까? 교육을 하고 공장을 세우면 좋은 미래가 온다는 비전은 정말로 여전히 옳은가? 중국인이 미국인처럼 소비할 수 없다는 현실이 우리를 억누르고 있지 않은가? 

 

이런 걸 생각할 때 사람들의 입장은 다른게 당연하고, 다양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소통하고 민주적 절차에 따르면 어떻게든 좋은 세상이 올거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무책임하게 느껴진다. 그게 꼭 잘못된 것만은 아닐 것이며 단순한 억압따위로 사회적 질서가 만들어 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답은 아니겠지만 수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자기 주장을 하라는 메세지를 던져왔던 진보정치는 사회적 협력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무책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더 강력한 사회적 협력을 위한 문화적 진화다,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다. 그것 없이는 인류는 생존의 위기에 빠져든다. 과거의 방식은 더이상 통하지 않기 때문에 수렵채집인들이 더이상 채집할 것이 없으면 굶어죽듯이 비슷한 일이 인간에게 생겨날 가능성이 크다. 안일하게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만으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미래에도 민주주의의 이상은 남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상당히 지금 과는 다른 것일 수 있다. 미래 사회가 지금과 같다면 미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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