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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는 것의 구조

by 격암(강국진) 2025. 1. 22.

일찌기 미국의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껍질을 깨고 성장하는 유기체처럼 교육을 파악하면서 교육을 로맨스-세밀화-일반화의 3단계가 반복되는 과정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로맨스의 단계는 어떤 새로운 분야에 눈뜨고 관심을 가지게 된 단계다. 세밀화의 단계는 그렇게 눈 뜬 새로운 분야에 대한 구체적 지식들을 빠르게 쌓아가는 단계다 그리고 마지막 일반화의 단계에서 사람은 잔뜩 쌓아올려진 지식들을 일반화과정을 통해서 압축하는데 그렇게 되면 수많은 지식들은 어떤 일반화된 규칙의 여러 예들에 불과하게 되므로 새로운 지식들은 더이상 신기하거나 새롭지 않게 된다. 

 

예를 든다면 우리는 살다가 어떤 새로운 것에 눈을 뜬다. 그것이 과학일 수도 있고, 이성교제일 수도 있으며, 요리일 수도 있다. 아니면 야구나 문학일 수도 있다. 일단 그게 무엇이든 우리가 전에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던 어떤 것에 대해서 알게 되면 우리는 흥미를 가지고 그 분야를 탐색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로맨스의 단계다. 로맨스의 단계를 지나면 우리는 그 새로운 분야를 어떻게 탐험해야 하는지 알게 되고 빠르게 경험을 늘려 간다. 이것이 바로 세밀화의 단계다. 그러다가 온갖 경험이 축적되면 우리는 서로 아주 달라보였던 사례들이 비슷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그 분야에 대해서 일반화의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이 단계에 이르면 본래는 새로웠던 분야는 더이상 새롭지 않고 자극적이지 않다. 우리는 그 분야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모르는 것이 없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생각하고 교육이라는 것을 우리가 우리의 지식을 늘려가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자. 여기서 우리는 안다는 것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지게 된다. 왜냐면 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각각의 단계에 대응하는 3가지의 종류가 있어보이기 때문이다. 로맨스의 단계는 지적인 비약을 준다. 이것은 전에는 전혀 모르던 분야에 눈을 뜨는 앎이다. 이에 비하면 세밀화 단계의 앎은 훨씬 세부적이다. 세밀화가 가능한 것은 로맨스의 단계를 통해 새로운 분야에 눈을 떳기 때문이다. 영화라는 것에 대해 눈을 뜨고 나면 밤이고 낮이고 영화를 볼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지식이 빠르게 성장하는 것이 영화에 대한 세밀화의 단계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로맨스의 단계의 지식은 하나의 거대한 깨달음에 가깝고 세밀화단계의 지식이란 일반화단계에서의 지식이라고 할 수 있는 일반론에 대한 깨달음에 비해서도 자잘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로맨스의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면 옆에서 아무리 뭘 가르쳐 줘도 도통 흥미가 생기지 않고 그런 지식이나 경험은 금방 사라져 버린다. 예를 들어 밤이고 낮이고 영어공부를 하고 영어수업을 들었는데도 그저 시키니까 하는 것이고 이걸 왜 하는지 납득이 안된다면 영어실력은 늘지 않을 것이다. 집앞에 아무리 멋진 미술관이 있고 음식점들이 있어도 그런 세계에 눈 먼 사람에게는 그건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나 마찬가지다. 혹은 우리가 일반화에 이르지 못하면 엄청나게 쌓였을 뿐 정리가 되지 못하는 지식은 점차로 우리에게 피로를 줄 뿐일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세상은 그냥 무한히 복잡해 보일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흔히 우리가 뭔가를 안다고 말할 때 혹은 지식을 늘리고 있다고 말할 때 세밀화단계의 지식을 말한다. 왜냐면 이때는 지식을 정량화하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뭘 아는 지 뭘 모르는 지 말하기 쉽다. 그러나 로맨스의 단계의 지식이나 일반화단계의 지식은 깨닫기 전에는 내가 뭘 모르는지 모른다. 재벌가의 아이들만 만난 아이는 어쩌면 자신이 평범하다던가 심지어 우리 동네에서 가난한 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 아이의 시선이 작은 동네를 넘어 더 먼 곳까지 도달하게 되면 그 아이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할 것이다. 자기 반에서의 인기 순위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거라고 생각하는 아이는 정작 앞으로 정말 대단한 인물이 될만한 친구를 바보 멍청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자기가 뭘 모르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게 진짜 앎이고 진짜 지식일까?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뭘 지식이나 앎으로 부르는가 하는 것은 그냥 우리가 부르기 나름이다. 다만 우리는 안다는 것은 이렇게 어떤 구조를 가졌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초등생일 때 초등생으로서 충실하게 사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훌룡한 초등생이 되는 것이 영원한 목표가 될 수는 없다. 과거에 대한 집착으로 어른이 되어서도 옛날에는 자기가 인기가 있었다는 둥, 자기가 반에서 1등이었다는 둥하는 것은 오히려 비참하고 초라한 것이다. 우리가 어떤 세계에 갇혀서 그 안의 지식만 생각하고 그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이런 모습을 만든다. 

 

우리가 뭔가를 배우고, 어떤 정보들을 많이 수집하게 될 때 우리는 뭔가를 알게 된다. 그 앎의 결과 우리는 어떻게 바뀔까? 우리가 로맨스의 단계나 일반화의 단계에 있다면 그 앎은 우리를 상당히 많이 바꾸게 된다. 세밀화의 단계에서는 앎들은 자잘하다.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바뀌는 스스로를 느끼며 그것은 심지어 매우 충실한 시간으로 느껴지지만 사실 그 변화의 정도는 크지 않다. 한국의 불교에서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돈오돈수인가 돈오점수인가하는 논쟁이 있다. 깨달음과 수행이 한번에 이뤄지는가 아니면 순식간에 깨닫지만 수행은 점차적으로 이뤄지는가 하는 논쟁이다. 이 논쟁은 이제까지 말한 안다는 것의 구조를 생각하면 매우 흥미로운 것이다. 아마 그런 논쟁이 있는 것이 이런 구조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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