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평등은 진보와 계몽의 대표적 메시지이다. 그것은 적어도 프랑스혁명이래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든다는 계몽의 핵심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 메세지를 지겨워하고 있다. 그것을 반드시 부정해서가 아니다 그것만으로 뭐가 되는가라는 생각 그리고 진보가 같은 메세지를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이 지겹다는 생각때문이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PC 즉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지겨움이 퍼지는 현상이며 전세계 여기저기에서 극우들이 정치적 힘을 얻는 현실이다. 정말 백설공주 역할을 피부가 검은 여성이 맡으면 세상이 좋아지고, 동성애자 이야기를 모든 드라마나 영화에서 꼬박꼬박하면 세상이 좋아지는 것일까?
다시 말하지만 이런 글이 그러므로 나는 인간 평등에 반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내가 이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지금의 상황을 보여준다. 고장난 녹음기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며 진보가 아니라 이제는 과거의 유물처럼 보이게 된 진보주의자들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바로 전근대로의 퇴행같은 것으로만 여긴다. 그것이 창의력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진보주의자들이 공부도 없이 계속 같은 일을 하면서 먹고 사는 비결이다. 50년이나 150년전에 하던 소리를 똑같이 해도 되니 얼마나 편하겠는가. 공학자나 과학자들이 50년전에 하던 소리를 하면 공학자나 과학자일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진보주의자들은 대안도 없고 창의력도 없다.
진보주의자란 결국 계몽주의자다. 그들은 대중을 계몽해서 더 좋은 세상이 올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계몽의 메세지는 근대화 초기때부터 있었다. 그러니까 계몽주의자들은 권위주의적이고 종교적이었던 전근대 질서를 부정하고 새로운 계몽의 메시지로 세상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다고 설득해 왔으며 그 핵심 중의 하나가 인간평등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노예 해방이나 여성 해방, 인종 차별에 대한 반대 같은 메시지는 진보주의자들이 끝없이 반복하는 것이 되었다.
그런데 사실 계몽의 메시지는 이게 다가 아니다. 그것은 본래 근대의 미래 비전의 일부였고 그 비전이란 거대한 지식의 시스템, 거대한 기계와 같은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 사회는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우리가 필요한 것을 공급해준다. 마치 자판기처럼 스위치를 누르고 돈을 넣으면 우리가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해 준다. 교육도 음식도 집도 근대화 이래 인간이 건설해 온 사회 혹은 자본주의 시장은 제공한다. 그리고 그걸 이용하는 지식은 모두에게 평등하다. 그래서 그 사회속의 인간은 평등한 것이다. 애초에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왕가의 피를 가진 사람들은 일반 백성과는 날 때부터 달랐다고 믿어졌던 과거와는 달리 말이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는 반드시 악이 아니다. 악의 반대가 선인 것처럼 전근대의 반대가 근대가 아니다. 예를 들어 모두가 종교적이었던 것이 전근대라면 종교를 믿지 않으면 근대화가 되는게 아니다. 과거에 대한 부정이나 비판은 그것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에 비하면 훨씬 쉽다. 그리고 사실상 대안이 없는 비판은 그다지 큰 힘이 없다. 그러니까 제 아무리 과거 시대의 종교가 부패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비판하는 것만으로 새로운 세상이 오지 않는다. 부패한 왕을 비판하는 사람은 양심적인 왕을 찾는다. 그들은 봉건왕조를 끝내고 공화국을 세우자는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우리는 과거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플러스 알파가 필요하고 대안이 필요하다.
사실 과거의 메세지는 나름대로 한때는 진보주의자의 메세지였다. 수렵채집을 하면서 문명을 이루고 살지 못하던 선사시대사람들에게 사회를 이루고 신과 왕을 추앙하면서 살자는 메시지는 분명이 진보적인 것이었고 계몽의 메시지였다. 그렇다면 과거의 진보적 메시지는 그것이 완벽히 충족되었기 때문에 잊혀지고 새로운 메시지로 대체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이 세상이 완벽하게 교화되는 때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도 계몽의 메시지가 있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은 유학의 질서아래 교화시키는 것이다. 서양에서도 신학적 질서 아래 모든 사람들을 교화시키는 것이 계몽의 메시지였다. 그러면 좋은 세상이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교화가 100% 완벽해졌었고 그랬기 때문에 근대의 새로운 진보적 메시지가 출현했는가? 천만에 그렇지 않다.
이것은 과거의 메시지가 틀렸기 때문도 아니다. 과거의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상당한 가치가 있다. 그래서 아직도 사람들은 논어 맹자나 불경을 읽고 성경을 읽는다. 과거의 메시지를 미신으로만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역사 시간에 불교가 국민을 통합하는데 도움을 줬다는 것을 배웠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무시하기 쉽지만 과거의 학문이나 사고도 여전히 가치를 가진다. 다만 근대화 이래 우리는 알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눈치 챈 사람도 있을 줄 알지만 이런 이야기를 한 이유는 우리가 지금 진보주의자의 메시지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근대화 이래 이미 몇백년간 사람들은 계몽으로 세상을 더 좋게 하려고 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노예제도를 다시 도입하자거나 여성의 참정권을 빼앗자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메시지로만 충분하지 않다. 100% 모두가 교화되는 세상은 결코 오지 않는다.
진보주의자들은 그들의 이상을 말하면서 지금의 세상은 그 이상을 충족시키지 않았으니 더더욱 힘내서 교화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실제로 아직도 여성 차별이 심한 곳이 있고 인종 차별도 있으며 노동자에게 가혹한 일을 하는 사업장이나 성소수자들에 대한 편견과 억압이 있는 곳이 있다. 여전히 경찰서에 가면 남편에게 가정폭력을 당하고 사는 여성들을 볼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을 계몽하는 일은 나름 중요한 일이다. 문제는 그것이 안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지금의 세계는 그런 사람들 중심으로 발전하고 돌아가고 있지 않다. 세상의 중심은 다른 곳에 있고 세상이 겪는 가장 절박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지금의 세상은 정치적으로 혼란하고 자본주의는 위기에 빠져 있으며 환경 위기에 고통받고 있다. 이런 위기 앞에서 깃발에다가 환경 위기의 극복은 남녀평등에서 부터라고 쓰고 흔든다던가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는 우선 성소수자들의 인권부터 챙깁시다라고 쓰고 흔드는 것이 정말 설득력이 있을까? 그것에 대해 설득력이 없다는 말을 하면 너는 여성 차별주의자고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비판을 들어야 할까?
지금의 계몽과 진보는 낡았다. 그래서 그들은 오히려 사회적 적폐를 옹호하는 역할을 할 때도 많다. 왜냐면 진보주의자들의 메시지와 행동방식이 너무 낡아서 실질적으로는 봉건 시대의 사고 방식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도 그걸 다 뻔히 배우게 되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자유니 민주니 하는 말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남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들이다. 이기적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성문제로 끌고 들어가서 위협하는 데 진보적 논리를 쓴다. 한때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야기가 나왔을 때 범죄자들이 그걸 남용하면서 죄를 저지른 것은 내가 아니라 내안의 무의식이라고 주장했다는 말이 있다. 지금의 진보는 그 비슷하게 남용되고 있다.
요즘은 낡은 진보주의는 일을 망친다. 그것은 예를 들어 99% 완벽한 남자도 집에서 설거지를 안하는 사람이라면 남녀차별을 하고 있으니 사회적으로 매장시켜버리려고 한다. 그래서 유명인들 중에는 온갖 진보주의자들의 요구때문에 피곤한 사람들이 많다. 유명하면 소고기를 먹어도 외국소를 먹으면 안된다. 하지만 99% 썩어버린 사람도 집에서 설거지를 한다는 이유로 자상하고 남녀평등 사상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선전되는 경우도 너무 많은데 그런 사람에 대해서 진보주의자들은 대개 말이 없다. 간단히 말하면 그들은 나쁜 놈은 좋게 포장되어 선전되고 완벽하지는 않으나 (완벽한 사람은 없다.) 좋은 사람은 비판의 융단폭격으로 결국은 사회적으로 곤란을 겪게 만드는 세상을 만든다. 낡은 진보는 사실상 세상을 바꿀 힘이 없는데 그것은 그것이 너무나 낡았기 때문에 지금의 세상이 그것에 면역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것은 거꾸로 사회를 병들게 한다. 낡았다고 비판받는 유교적 질서도 사실 그 본질은 좋은 것이다. 그것이 전근대의 말기에는 사회를 병들게 했었을 뿐이다.
오늘날 일을 되게 만드는 사람, 대안을 창출하는 사람이 아니라 트집을 잡아 비판하는 사람으로 진보주의자들은 자리잡았다. 이것을 더 고상한 언어로 지적한게 바로 정체성 정치에 몰두해서는 보수에게 이길 수 없다는 지적이다. 정체성 정치란 어떤 사람의 특정한 정체성에 몰입한다. 누구도 여성이거나 노동자이거나 성소수자이거나 하지만은 않다. 인간은 모두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특정한 정체성에 몰입해서 세상을 말하기 시작하면 결국 앞에서 말한대로 트집잡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리고 이것을 이미 보수 단체가 배웠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예전의 진보단체처럼 길에서 시위를 하고 구호를 외친다. 선택적 정의 구현으로 사회적 정의와 평등을 전복하기 위해서다. 3천원 횡령은 살고 죽는 문제가 되지만 300억 횡령은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다. 진보적 논리가 부패와 부정의를 보호하는 방패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낡지 않은 계몽이나 진보도 있을 수 있을까? 있다. 지금의 세상은 근대의 비전이 완벽히 달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를 겪고 있는게 아니다. 근대의 비전 자체가 문제다. 끝없이 크고 복잡해지는 세계 자체가 문제라서 세계가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이 것은 다시 한번 왜 계몽주의가 낡은 것이 되는가를 보여준다. 우리가 말하는 계몽주의는 보통 근대화를 위해 만들어진 정신이다. 그러므로 근대화를 옹호하고 근대화 안에서 작동한다. 그런데 우리의 반성의 대상이 근대 그 자체가 되게 되면 계몽주의니 진보니 하는게 전혀 다른 입장에 서게 된다.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근대의 비전이 무엇인지를 정리하는 것이다. 그 일은 이미 20세기이래 많이 반복되어졌다. 다만 문제는 근대의 대안을 마련하는 일이다. 새로운 대안이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자는 말이고 새로운 계몽주의란 그 세계를 설명하고 새로운 비전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계몽이나 진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렇게 하지 못할 때 진보는 사실상 낡은 목소리의 반복일 것이며 지금의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중대한 문제를 외면하게 될 것이다. 환경파괴를 막는 것은 남녀평등의 실현에서 부터같은 구호를 외치는 일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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