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우리를 똑똑하게 만드는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AI를 어떻게 쓰는가에 달린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AI를 우리가 할 일을 대체하는 기계로 생각하는데서 멈춘다면 AI의 사용은 우리를 오히려 더 어리석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점점 더 AI에게 많이 의존하고, AI가 주는 답을 당연하게 여길 것이다. 그런 일만 계속한다면 AI를 사용하는 일은 우리를 더 게으르게 만들 뿐이다. AI는 굉장히 능력이 있지만 그 능력에 분명한 한계도 있는 부하직원과도 같다. 우리는 회사의 사장처럼 AI에게 뭐든지 시킬 수 있지만 단순히 AI에게 내가 할 일을 네가 하라는 식이어서는 안된다. 그리고나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그런 게으른 사장은 지금도 회사를 망친다. 앞으로도 AI를 그렇게 쓰는 사람은 스스로를 망칠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먼저 AI가 아무리 똑똑해도 최종적인 판단은 자기 스스로가 하고 책임은 AI가 아니라 자신이 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가치나 행동을 판단한다는 것에는 절대적 답이 없다. 그래서 보편적인 데이터로 만든 AI가 언제나 대신해 줄 수 있는게 아니다. 예를 들어 아이를 교육시키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해보자. 우리는 먼저 그 교육의 목적이 시공간적으로 어떤 테두리안에 존재하는가를 따져야 한다. 이번 달에 있는 시험을 잘 보는 것이 교육의 목적인가? 몇년 후에 있을 대학입시가 교육의 목적인가? 아니면 사회에 나가서 독립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목적인가? 이에 따라서 좋은 교육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다 다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아이가 배워야 할 것이 이 동네에서 잘 사는 법인지, 한국에서 잘 사는 법인지, 세계에서 잘 사는 법인지에 따라 아이가 배워야 할 것은 다를 수 있다. 그리고 물론 내 아이의 특수한 사정에 따라 좋은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다 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AI에게 우리 아이가 10살인데 어떻게 교육 시켜야 할까라고 단순하게 물으면 그 답은 애매모호하거나 그 목적이 의심스러운 답일 것이다. 자기 자신도 교육의 목적을 모르면서 AI에게 교육을 어떻게 시켜야 하냐고 묻고 좋은 답을 바래서는 안된다. 이것은 교육만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중요한 질문에 있어서도 같은 문제가 있다. 만약 우리가 단순한 사실 확인을 원하는 거라면 이런 문제가 없을 수 있지만 문맥에 상관없이 같은 의미가 있는 사실이란 없다. 사실의 의미도 문맥에서 나오고 따라서 결국 사실의 확인이라도 중요한 사실의 확인은 같은 문제가 있다. 어떤 문맥에서 그 사실이 중요하다는 말인가? 질문이 애매하면 거짓말하지 않는 AI라도 우리에게 쓰레기같은 사실들만 보여줄 것이다.
AI가 강력해 질 수록 우리는 우리가 뭘 원하는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우리가 AI에게 어떤 일을 부탁할 때 우리의 의도는 단순하게 말해서 나를 행복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일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AI에게 부탁하는 말의 의미를 고민하지 않을 때 실질적으로 우리의 말은 우리를 죽여달라거나 불행하게 만들어 달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1997년에 나온 데블스 애드버킷은 악마와 거래하는 주인공이 파멸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초등학생이 동네 골목 대장이 되고 싶어서 총을 들고 나가면 인생을 망친다. 소원을 이뤄줄 강력한 수단은 종종 위험하다. 어리석은 사람이 뛰어난 AI에 의존하면 악마와의 거래처럼 되어서 결국 자신을 망치게 되기 쉽다. 최근에 AI들이 나오니까 사람들이 너도 나도 수십가지의 AI들을 쓰라고 권장한다. AI를 쓰는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게 뭘 의미하는 지를 고민해서 써야 한다.
특히 자신의 역할과 의미가 뭔지를 고민해서 써야 한다. AI는 내가 할 일을 대신하는 기계라는 생각만으로 AI를 자주 써서는 안된다. AI라는 뛰어난 부하직원이 생겼다면 나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고 그 AI를 써야 한다. 당신이 뭔가 플러스 알파하는 것이 없이 AI로 일을 자동화한다면 그말은 당신은 해고당할거라는 뜻이다. AI가 나를 대체하는게 아니라 AI와 인간이 협업하는 것이다. AI가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일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도록 써야 한다.
현재의 AI에 대한 담론은 대부분 단순한 낙관론 아니면 비관론으로 구분되어질 수 있는데 이런 담론들의 공통된 특징은 인간의 역할이 없다는 것이다. 좋은 세상이건 나쁜 세상이건 기술의 발전에 따라 저절로 온다는 식으로 말해지지 그래서 인간은 미래를 위해 뭘 해야 하는가하는 것이 없다. 나는 이것이 지금의 AI에 대한 이야기들이 가지는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AI가 어떻게 인간이 행복한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인지를 말해주는 AI 시대의 비전이 없이 AI가 좋다거나 나쁘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지옥이 온다면 말할 것도 없고 인간의 역할이 없이 돼지처럼 AI에게 사육되어 아무 역할도 못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 천국이라면 그게 정말 천국일까? 보람이 있는 일이라면 사람은 잠을 줄여가면서 일해도 행복하기 마련이다. AI는 우리가 추구할 수있는 어떤 가치를 제공하는가? 뒤집어 말하면 AI는 지금의 우리의 어떤 문제와 억압을 해결해 주는가?
자동차가 없을 때 이동하자면 낡은 수단을 써야 하지만 자동차라는 도구가 생기면 차를 타면 된다. 하지만 거기서 멈춰서는 안된다. 자동차라는 도구를 써서 해낼 수 있는 새로운 일을 고민해야 한다. 문자를 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기록을 남기거나 말을 소리나는 대로 적어놓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이 그런 기능만 해서는 안된다. 그건 그냥 기억력의 감퇴를 가져올 뿐이다.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더 체계적으로 만들기 위해 글쓰기와 독서가 사용되어져야 진정한 문자를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AI는 어떤 일에서 인간보다 뛰어날까? AI는 일이 빠르고 기억력이 좋다. 그래서 다른 무엇보다 더 넓은 세상과 나를 연결해 준다. 연결의 미디어로서의 AI가 진짜로 중요한 AI의 의미다. 나대신 일하는 휴머로이드 로봇이 아니다. AI는 내가 다룰 수 없는 정보를 다룰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생각을 했다고 하자.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하는 것이고 널리 알려진 것일까 아니면 새로운 것일까? 같은 생각이라도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생각일 때와 거의 아무도 하지 않은 생각일 때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 그런데 인터넷 검색이나 AI의 도움 혹은 전문가의 도움없이는 이런 질문은 간단히 답해 질 수 있는게 아니다.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내가 특이한 핫도그를 생각해 냈다고 해보자. 이 핫도그는 이미 팔리고 있는 것일까? 이미 있는 어떤 음식맛과 비슷한 것일까? 이 생각을 사업화하고 싶다면 그 점을 확인해야 한다. 아직 AI가 이런 쪽으로 완벽하게 전문가처럼 도움되지는 않지만 발전은 빠르고 이미 상당히 도움이 된다. 마찬가지로 내가 학교 교육에 있어서 체육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하자. 그래서 이런 생각을 가지고 논문을 쓰거나 책을 써야 할까? 이런 일을 제대로 하기 전에 우리는 이런 생각이 이미 어떤 책에 나오거나 누군가에 의해서 주장되고 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다른 사람이 한 일을 반복하게 될 뿐일 것이다.
AI를 잘쓰기 위해서는 질문이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질문이 구체적이기 위해서는 앞의 예들이 보여주듯이 내 생각이 있어야 한다. AI는 내 생각을 실현시켜주고 구체화시키는 일을 잘한다. 반대로 말하면 자기가 스스로 생각하지는 못한다. 왜냐면 욕망과 가치판단을 가지는 것은 사용자인 인간이지 AI가 뭘 하고 싶어 하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AI가 어떤 욕망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가 AI를 애초에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바둑을 이기도록 만들어진 AI는 마치 바둑을 이기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처럼 행동할 것이다. 인간의 언어활동을 반복하도록 만들어진 AI는 분명 때때로 스스로 욕망을 가진 것같은 행동을 할 것이다. 그게 데이터 안에 들어 있는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만나는 남자마다 유혹하고 싶은 여자의 대화만 가지고 채팅봇을 만들었다면 그 채팅봇은 대화가 시작하면 금방 나를 유혹하는 말을 하려고 할 것이다. 왜냐면 대화란 그렇게 흘러야 한다고 데이터로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그런 채팅봇은 마치 나를 유혹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같은 착각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가치판단과 욕망이란 그냥 존재하는게 아니라 어떤 경계안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바둑을 이기고 싶은 욕망이 있는가 하면 바둑을 즐기고 싶을 뿐인 욕망도 있고, 바둑을 통해 접대를 하고 싶은 욕망도 있다. 따라서 이런 모든 인간의 행동 데이터를 한꺼번에 학습한 AI는 기본적으로 욕망이 없다.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생각해 보면 유혹하는 챗팅봇처럼 그저 데이터의 편향을 반영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내 생각, 내 욕망이 중요하다. 그래야 AI의 도움을 얻어서 그것을 현실화하고 구체화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그렇게 하는데 계속 성공할 때 남들이 보면 나는 AI를 사용함으로 해서 더 똑똑해 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왜냐면 원하는 것을 얻어가는 능력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AI는 내 생각을 구체적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를 세상과 연결시켜줄 가능성도 있다. 지금의 나는 마치 바퀴만 달면 잘 굴러갈 자동차와 같을 수 있다. 그러니까 바퀴만 구해주면 나는 완벽해진다. AI는 인간보다 훨씬 더 빠르게 정보를 처리하고 애초에 훨씬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우리 개개인들을 완성해 줄 수 있다. AI의 핵심은 혼자서 모든 걸 잘하는게 아니라 연결과 협업에 의해서 더 큰 능력을 만들어 내는 것에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세상은 훨씬 더 효율적으로 운영될 것이다.
하나의 생각은 나와 내 AI를 통해서 더 구체화될 수 있지만 그 생각이 다른 사람과 다른 AI와 연결될 때 훨씬 더 현실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어딘가에는 자본은 있지만 아이디어가 없고 기술은 있지만 자본과 아이디어가 없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어딘가에는 버려지는 자원이 있고 버려지는 인력이 있을 수 있다. 그럴 때 아이디어가 그들과 결합하면 그 모든 것이 맞춰져서 그 일은 일어나기 쉬울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상당 부분 그런 결합이 어렵기 때문이다. AI는 그 연결을 지금보다 훨씬 더 잘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할 때 AI는 인간을 더 똑똑 하고 쓸모 있게 만들 수 있다. 다만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고 해도 AI의 더 많은 발전이 필요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AI를 잘 써야 한다. 잘 쓴다는 것은 반드시 많이 쓴다는 뜻이 아니다. AI와 함께 지속적으로 그리고 장기적으로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도록 AI를 써야 한다. 자동차가 있다고 반드시 자동차 세상이 오는 것이 아니고 도로를 깔아야 하고 교통법도 만들어야 한다. 운전면허 시스템도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AI가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세상은 인간과 사회의 변화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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