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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젊고 지친 사람들에게

노자의 무위에 대하여

by 격암(강국진) 2025. 4. 29.

노자에는 하지 않음으로서 일을 한다는 무위의 철학이 여러군데 나온다. 젊었을 때부터 노자를 읽기는 했지만 오늘은 문득 이 무위에 대해 생각이 나서 몇마디 적어본다. 도덕경 37장의 첫머리에는 이런 말이 있다.

 

도는 항상 하는 일이 없지만 하지 않는 일이 없다.

 

하는 일이 없는데 왜 하지 않는 일이 없을까? 모든게 저절로 척척 이뤄진다는 것인가? 무위의 철학은 물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결과를 기다린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좁은 마음, 조급한 마음, 좁은 시야에 갇혀서 바쁘게 이리뛰고 저리 뛰어서는 오히려 일만 저지른다는 뜻이다. 도덕경의 53장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내가 약간의 지혜라도 가졌다면 나는 큰 길을 걸을 것이며 옆길로 들어설까 경계하리로다.

 

사람들은 부지런히 지름길을 찾는다. 지름길의 예는 일하지 않고서 돈을 버는 법이라던가, 돈을 내지 않고서 물건을 얻는 법같은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자신들이 부지런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지름길을 찾아 헤메지 않는 사람들을 어리석거나 게으르다고 말한다. 이런 말이 옳은가 그른가는 절대적으로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서둘러 이런 말을 하기 전에 작은 세상과 큰 세상의 차이에 대해서 주목하고 자신을 계속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럴 때 이제까지 자기 성찰이라는 것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자신이 작은 세상에 스스로를 가두고 쓸데 없이 일을 부지런히 망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작은 세상에서 바쁜 사람은 아무 것도 안하고 있어도 이미 당첨된 복권을 가진 사람인데 그 복권을 돈으로 바꾸는 대신 그걸 스스로 찟어버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돈 좀 있었으면 좋겠다고 푸념까지 한다.

 

작은 세계와 큰 세계의 차이란 예를 들어 도박장과 그 바깥 세상과의 차이다. 도박장 안에서는 도박을 이기는 사람이 승자고 존경받는 사람이다. 하지만 도박장을 포함하는 더 큰 세계에서 보면 애초에 도박을 하지 않는 사람이 승자고 존경받는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도박을 끊을 수 있다면 도박에서 단기간에 돈을 잃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되고, 반대로 도박에서 돈을 따는 것이 위험한 일이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경험한 작은 세계와 큰 세계의 차이는 어린 시절의 세계와 어른이 된 후의 세계다. 누구나 어린 시절이 있고 그래서 부모님이 만든 작은 세상인 가정안의 세상만 보이던 시절이 있는가 하면 초등학교 시절의 세상만 있었던 시절이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몸과 정신이 자라면 더 이상 그 세상에서 살 수 없고 더 큰 세상에서 살게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럴 때 과거의 자신을 돌아본 사람은 알게 된다. 예전에는 중요한 문제같았고 중요해 보이던 것들이 더이상 문제로 보이지 않고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다. 친구가 비싼 신발을 신었는데 자신이 못신었던 일이 혹은 어떤 게임을 마음껏 못했던 것이 정말 아쉬웠던 일 같은 거 말이다. 그때의 나에게 그것들이 소중했다는 것은 사실은 알지만 나이가 들면 어른들이 왜 나의 그런 문제에 대해서 둔감했는가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다. 아이건 어른이건 모두 문제가 있고 어른들은 어른들의 문제로 바빴던 것이다. 이런 작은 세상과 큰 세상의 차이란 세상에 아주 많다. 그리고 나이가 30이 되고 50이 되어도 우리의 세계는 여전히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다.

 

보다 큰 세계의 눈으로 보면 작은 세계의 일이란 몇가지 문제를 가지게 된다. 첫째로 작은 세계의 일은 소위 조삼 모사의 일이 될 수 있다. 조삼 모사란 원숭이에게 먹이를 주는데 아침에 세개 저녁에 네개를 주겠다고 했더니 화를 내더라는 일을 말한다. 그걸 본 사람이 그러면 아침에 네개 저녁에 세개를 주겠다고 하니 원숭이가 기뻐하더라는 것이다. 조금만 큰 시야로 보면 같은 일인데 그걸 보지 못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이 조삼 모사다. 작은 세계의 일이란 종종 결국 차이가 없는 것인데 그걸 이루려고 시끄럽게 굴고 바쁘게 구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에너지를 낭비하며 싸움도 나기 때문에 결국은 손해가 크다.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둘째로 작은 세계의 일은 인생의 예측 불가능성을 더 잘 보여준다. 여기 주식투자를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서 판단을 할지 모르지만 주식을 10분마다 사고 판다면 어떨까? 그렇게 해서 돈을 버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하는 사람이 제대로 된 투자가일까? 주식 그래프만 보고 서둘러 사고 팔고, 소문에 사고 팔고 하는 식으로 바쁘게 하는 사람은 조금 큰 시야로 보면 결국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예측하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쁜 소식도 반드시 나쁜 소식이 되는게 아니다. 모든 사람이 그 정보를 동시에 듣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그 나쁜 소식을 들었을 때 지금의 주식가격은 이미 그 나쁜 소식이 반영된 상황일 수 있다. 그러면 나쁜 소식이 들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주식이 오를 수도 있다. 좋은 소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순간순간의 소식들에 일일이 반응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주식 투자의 예가 좋게 들리지 않는다고 하면 다른 예들도 많다. 아이를 키우는 문제는 어떤가? 아이의 성적이 떨어졌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 정답은 없지만 조급하게 매일 매일 생각을 바꾸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100점맞던 아이가 90점 맞으면 성적이 떨어졌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면 아이의 실력이 똑같아도 성적은 오르고 내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이의 키를 잰다고 하자. 아이의 키를 매일 매일 재는데 그 키가 160, 158, 161 하는 식으로 여러가지가 나왔다. 이걸 우리는 아이의 키가 커지고 작아지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측정이 부정확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성적표의 점수를 보면서는 1점 1점에 의미를 너무 두는 경우가 많다. 그런 부모들은 흔히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끝없이 한다. 그리고 그런 태도가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한다. 아이들이 진짜 목표를 가질 수 없게 하고 부모만큼이나 조급해지게 만든다. 과연 그게 도움이 될까?

 

마지막으로 작은 세계는 큰 세계로 변할 수 있다. 우리가 지금 보이는 목적과 의미에만 몰두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꿈을 세우고 그 꿈을 향해 10년이고 20년이고 노력해서 그 꿈을 달성한 이야기를 멋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에 편향된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그리고 요즘처럼 세상이 빨리 바뀌는 시대에는 오해의 소지가 크다. 어린 시절에 자신의 꿈으로 아이는 뭘 세워야 할까? 어떤 꿈이든 훌룡한 거라면 초등학교때 초컬릿을 잔뜩 먹기를 소원하는 아이는 자신의 의지를 꺽지말고 30이되고 50이 되어도 초컬릿을 많이 먹기를 희망해야 한다. 이런 꿈은 어리석으니 어른들과 상담해서 꿈을 세워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은 사실상 어른이라는 타인이 제공한 꿈에 평생을 바치라고 아이에게 권하는 것이다. 그 어른들은 얼마나 현명하다는 말인가? 아이유나 페이커에게 가수나 프로게이머가 되지 말라고 했던 어른들이 없었을까? 미래의 아인쉬타인을 공장노동자로 만든 사람이 없었을까?

 

작은 소나무 씨앗이 서둘러 자신은 큰 소나무의 모양을 가지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씨앗이 묘목이되고 묘목이 큰 소나무가 될 때 각 단계 단계에서의 모양은 서로 다른 법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각 단계 단계에서의 꿈을 소중히 여겨야 하지만 아직 분명히 보이지 않는 다음단계라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한다. 가장 아름다운 묘목이 가장 좋은 묘목은 아니다. 요리사가 되려는 사람은 어쩌면 가게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하는 법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런데 청소나 설거지부터 잘하는 것은 중요하겠지만 반드시 그걸 잘한다고 요리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청소나 설거지에만 집중하면 오히려 요리사의 길은 멀어질 수도 있다. 요리사의 예에서 설거지에 집중하는 것의 문제를 보기 쉬운 것은 우리가 요리사라는 최종 목표를 처음부터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생이란 꼭 이렇지 않다. 내가 무엇이 될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가 그렇게 분명하지 않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잘하고 있다는 건 뭘 말하는 것일까?

 

인생이란 학업을 마치고, 취직해서 은퇴할 때까지 그 직장에서 일하는 것이고, 은퇴를 하고 나면 조금 한가하게 살다가 죽는 거라는 설명은 정말 옳은 것일까? 여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살지 못한다. 이미 평생직장같은 개념은 깨졌다. 살다보면 IMF 국가부도나 큰 병을 앓는다는 식의 큰 위기도 온다. 그러니까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생각에 너무 집중하면 그 인생개념이 깨지거나 따르기 어려울 때 더 큰 문제가 생긴다. 이러저러한 것은 당연하다는 어떤 고정관념이 우리를 쓸데없이 괴롭게 하고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한다.

 

둘째 문제가 더 중요하다. 인생이란 이런거라는 앞의 설명이 설사 옳다고 해도 그것이 정말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예를 들어 인생이란 삼시세끼 밥을 날마다 먹다가 결국은 병들어 죽는 것이다라는 설명은 나름의 진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말이 옳다고 해서 그게 인생에 대해서 정말 중요한 부분을 말하고 있는가? 인간은 그저 삼시세끼 밥을 먹기 위해 사는 것이고 그게 전부일까? 이런 말은 의미가 없지만 인생은 취직해서 은퇴하는 것이라는 설명은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그건 왜 그런가? 혹시 그런 설명은 인생에 대해서 아직 뭐하나 말한게 없는 게 아닐까?

 

인생은 이런 것이다라는 단언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를 가정하는 것이다. 그 작은 세계를 당연시 하고 변하지 않을 거라고 너무 확신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니 어떤 세계에 살건 그 세계도 유한하고 따라서 남의 세계를 무시하거나 폄하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가 인생은 그런 거라며 부지런히 그 인생을 사는 것이 꼭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항상 더 큰 세계의 가능성에도 주목해야 하고, 그걸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 행복해도 그렇지만 불행하다면 더더욱 그렇다. 뭔가를 지나치게 당연하다고 굳게 믿어서 자신을 작은 세계에 가두고 그 안에서 맴도는 일을 계속 해서는 답이 없다.

 

이 말이 반드시 직장을 관두고 세계 여행을 떠난다던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던가하는 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 이미지에 너무 빠지는 것도 남들이 주입한 생각에 빠지는 것이고 선입견에 빠지는 것이다. 그래서는 진정한 탈출은 어렵다. 변화는 대개 훨씬 더 내적인 것이고 겉으로는 대단치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저 책이라면 한권도 안읽었던 사람이 한달에 한권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고, 매일 매일 산책을 하면서 자신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는 것일 수도 있으며,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 대해 생각을 고쳐먹고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일 수 있다. 작은 세계와 큰 세계의 차이를 물리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중요한 것은 겉보기보다 내 생각을 고쳐먹는 것이며 몸이 어딘가 다른 곳에 있는게 아니다.

 

무위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을 하면서도 세상에는 큰 불확실성이 존재하고 앞으로의 일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다. 열린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고, 혹시 내가 놓친 중요한 것은 없는지를 살피면서 사는 것이다. 몸은 바쁘게 움직이지만 정신은 나가 있는 사람은 많다. 특히 당황하고, 긴장한 사람들이 더 그렇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차분한 마음으로 하루 하루를 보내는 사람이 오히려 많은 것을 하고 있는 사람일 수 있다. 긴장한 사람이 보기에 그 사람은 그저 아무 것도 안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말이다. 가장 훌룡한 소방관은 마을에 불이 날 곳을 미리 미리 체크해서 불이 애초에 나지 않게 하는 사람이다. 불이나면 그걸 열심히 끄는 사람도 영웅이지만 우리는 보이지 않는 영웅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불이 안나는 마을에 살면서 한가하게 아무 것도 안하는 것같아 보이는 소방관이 실은 가장 많은 일을 하고 있는 소방관일 수 있다. 가장 바쁘게 살고 있는 것같은 사람이 실은 해야 할 일은 하나도 하지 않는 사람 혹은 쓸데 없는 일을 자꾸해서 재앙을 불러들이고 있는 사람 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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