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나를 믿는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다. 자존감이 없는 사람은 남의 시선에 잘휘둘리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항상 엉뚱한데 있는게 아닌가 싶어서 불안하니 행복하기도 쉽지 않다. 위선과 허세와 허풍에 아주 많은 중요성을 둔다. 그렇다면 나를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자존감이란 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말그대로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미친 소리다. 나는 하늘을 날 수도 없고 노벨상을 받을 수도 없으며 차은우처럼 잘생겨질 가능성도 없다. 굳이 수학적으로 말하자면 가능성이 0이 아니라고 해도 실질적으로는 0이다. 그건 내가 김연아처럼 피겨스케이팅을 하고 손흥민처럼 축구를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터무니없다.
그렇다면 자존감이란 뭘까? 자기에게 점수를 매겨서 자기는 100점은 아니지만 90점은 된다고 믿는 것? 이런 말도 전혀 말이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말도 안되는 말이다. 인간을 1차원적으로 점수를 매겨서 평가한다는 발상이 말도 안되는데 무슨 점수가 있을 수 있는가?
나는 스스로 자존감이 상당히 낮았던 어린 아이였고 청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할 때 이 자존감이 뭔가를 생각해 보면 자존감의 의미란 나에게는 이렇게 다가온다. 그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믿음이 있는 것이다. 즉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믿음이 있는 것이다. 어떻게 살지를 알고 그것을 믿으면 후회가 없다. 그리고 남의 시선도 그리 두렵지 않다.
어떻게 살지를 안다는 것이 세상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거나 인생에 고통과 상실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오해다. 어떻게 사는가에 대한 강의가 있다면 제일 처음에 말해야 할 것은 삶에는 불확실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운이 있다. 적어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언제나 생긴다. 우리는 유한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지를 안다는 것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내가 항상 최선의 선택만 했다는 뜻이 될 수는 없다. 다만 나는 당시의 시점에서 최선을 다했으며 나의 원칙을 지키고 살았다는 뜻이 될 뿐이다. 내가 선택한 주식에 전재산을 걸었는데 그게 대박이 나서 먹고 살 걱정이 하나도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시점으로 보면 내가 어떤 주식이 그렇게 될지 알 수 없었고 전 재산을 거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은 바보짓이었다. 그러니까 전재산을 걸지 않을 것을 후회하고 내가 잘못살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생에서는 올바른 방법을 따라도 고통이 있고, 상실이 있다. 부자가 되거나 유명인이 되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최고의 선택을 했어도 결과는 상당부분 운에 달린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상실과 고통을 참아야 한다. 유한한 인간으로 사는 한 그것은 절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그걸 줄이려는 노력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려고 하고 조금의 고통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면 그런 행동이 오히려 더 큰 고통과 상실을 가져온다. 어떤 한가지 손실에 대한 집착이 인생 전체를 망가뜨리는 경우는 흔히 있다. 사람은 가진 것에 감사하고 살아야 하는데 한마디의 모욕에 흥분해서 인생을 거는 일도 쉽게 생겨난다. 한번 체면을 상한 것을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이 글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설명하는 글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내용은 이미 내가 여러번 쓴 적이 있다. 예를 들어 합리적으로 살기 위한 세가지 원칙들같은 글이 그렇다. 그래서 여기서는 그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인생 철학이라고 부를 때 자존감은 자신의 인생철학이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데서 멈추기로 하자.
내 인생철학이 없으니까 자기 선택들을 불안해 하고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꾸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한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것에 집착하고 세상에서 떠드는 말에 잘 흔들린다. 그렇다면 이 인생철학은 어떻게 가질 수 있는 것일까? 내가 인생철학을 설명하는 글을 썼지만 사실 그런 글을 읽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문제는 자신의 인생철학을 충분히 검토하고 수정하고 실험한 경험이다. 그런 것이 없이 누군가가 쓴 글을 읽는 것만으로는 믿음과 확신은 생겨나지 않는다. 아니 그 이전에 그 글이 가지는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인생철학에 대한 글은 길게 쓰면 이해하기가 어렵다. 긴 철학책을 읽어본 사람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러나 그걸 짧게 줄이고 요약하면 이번에는 말의 애매함이 증가한다. 이건 어느 정도 자전거 타는 법을 말로 설명하는 것과 같다. 아무리 써도 말 그자체가 전부를 담을 수 없고 읽기 쉽도록 요약해서 쓰면 진리를 담은 시처럼 변해서 해석의 여지가 많은 글이 된다.
결국 우리는 오랜 구도를 통해, 그리고 남의 행동이나 남의 말에 힌트를 얻어서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스스로 오랜간 고민하고 그걸 끝없이 반복해서 말하고 글쓰고 실천하면서 다시 그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그렇게 해서 생겨나는 것이 자존감이다. 자존감이 없는 것을 마치 말몇마디 듣고 스스로에게 난 뭐든지 할 수 있어라고 말하면 생겨나는 것으로 여겨서는 곤란하다. 나를 믿는 것에는 근거가 있어야한다.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어려운 질문을 회피하지않고 그것과 싸워온 시간이 나에게 믿음을 주고 결국 자존감을 준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나태한 사람은 자존감이 있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린 아이들도 자존감을 가진 경우는 어떨까? 혹시 자존감이라는 것이 자기 정당화된 착각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어린애들이 무슨 구도를 했다는 것인가? 그렇다. 인생철학이라는 것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환상일 수 있고 실제로 상당히 자주 그렇다. 좋은 예는 허술한 종교일 것이다. 허접한 종교 속으로 도피해서 세상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렇기 때문에 한때는 자존감이 넘치던 사람이 그걸 잃고 망가지는 경우도 많다. 내가 사는 방식에 크게 좌절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할 일도 없다. 자기 철학이란 결국 실패와 고통에 대한 분석속에서 나온 수정에 의해 탄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고금의 어떤 천재 사상가라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유한하다. 절대적인 인생철학이란 있을 수 없다. 천재에게도 철학적 좌절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허름한 헛간이 궁궐과 같은 것은 아니듯이 구도의 길을 통해서, 공부하고 고민해서 만들고 믿게 된 인생철학이 초등학생의 생각과 같을 수는 없다. 인간의 지식이 유한하다고 해서 초등학생과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의 지식이 같다는 뜻은 아니다.
대학에서 강의하는 강단철학이 쓸모 없다는 말을 듣는 이유는 그것이 어떤 거대한 지식 시스템에 대한 애매한 말들의 잔치를 벌이기 때문이다. 니체철학만 평생을 연구했다는 교수도 있다. 그런데 모든 철학자의 철학을 백과사전식으로 공부해서 우리가 어디에 도달할 것이며 니체를 읽었다고 정말 그것이 내 인생진로의 결정이나 연애같은 구체적인 일상의 일에 도움이 될까? 말은 소중한 것이지만 말을 태산처럼 쌓아놓기만 한 것은 대학교수나 되는 것이 아니면 소용이 없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 코앞에 있다. 우리는 그걸 고민하고 그 결과를 일반화하고 그래서 세상에서 말하는 지식과의 일관성도 고민한 끝에 자기 인생철학이라는 것에 도달한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물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말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자기인생에 성실하고 진실한 태도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의 선택과 행동에서 교훈을 얻는다. 실패를 해도 진실되게 문제에 부딪히면 배우는게 있다. 그렇지 않고 말장난으로 회피하고 쾌락과 자극으로 회피해서 괴로운 고민을 진작에 그만둔 사람은 당연히 배우는게 없다.
저 밑바닥에서 우리는 진실을 알고 있다. 이러니 저러니 다른 사람에게 말장난을 하면서 나도 내 철학이 있고 내 주관이 있다고 말하기는 쉽고 그걸 남이 부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성실했는지 자신은 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이 나태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그걸 증상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그 증상이란 자존감이 없다라는 증상이고 앞에서 말했던 자존감이 없으므로 해서 나타나는 증상들이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지금 당장 자존감이 없는 사람은 어찌해야 할까에 대해서 쓰고 이 말을 멈추자. 공부니 구도니 쉽게 되지 않고 금방 안된다는 것은 알았다. 그런데 당장 오늘을 살아야 하는 내가 자존감이 아무래도 없다면 어쩔 것인가? 당장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믿어라. 누군가를 절대적 권위로 여겨서는 안되지만 당장 불안하다면 어쩔 수 없다. 누굴 믿어야 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자기 철학을 만드는 것보다는 쉽고 원칙도 생각하면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믿어라. 배워서 도움이 됬다는 사람을 믿어라. 차분하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믿고, 세상의 유행을 쫒기만 하는 사람은 피해야 하지만 세상의 흐름에서 너무 떨어져 있는 사람은 피하라. 그런 사람은 악마인지 천사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사이비 종교는 믿지 말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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