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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젊고 지친 사람들에게

공평이라는 오만

by 격암(강국진) 2025. 5. 29.

우리는 자유와 평등같은 이상을 언제나 이야기한다. 그리고 차별은 나쁜 것이라는 말도 끝없이 듣는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우리는 공평하게 일을 처리해야 하며 불공평은 나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말들은 모두 다 옳은 말이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면 많은 추상적인 단어들이 그러하듯이 공평이라는 말은 객관적이고 절대적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점을 이기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기득권이 개혁을 반대하는 논리로 써서 예를 들어 노예를 부리는 주인도 이것이 공평하다고 할 수 있고, 여자를 노예부리듯 취급하는 남자도 이게 공평하다고 할 수 있다. 꼭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공평의 애매함이 무시되는 것도 아니다. 대중에게 이게 공평하다는 생각을 주입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결론을 절대적 진리처럼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들도 뭔가를 말하면서 이게 원래 그렇다는 말을 하기 좋아한다. 따라서 공평은 객관적이고 절대적으로 정의 되지 않는다는 말은 대개 억압된다. 

 

그러나 현실의 왜곡은 어딘가에 문제를 만들기 마련이다. 세상이 복잡하고 빨리 변할 수록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개념으로 평등이나 공평을 다루는 경우 모순은 커지게 된다. 30년 전의 공평이 정말 지금도 공평일까? 파리의 공평이 서울의 공평이고 부자들의 공평이 빈민들의 공평일까? 우리는 다양한 환경과 문맥에 따라서 공평의 개념이 흔들린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흔히 시스템을 더 복잡하게 만들어서 여전히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공평이라는 목표에 도달하려고 한다. 그러니까 여러가지 조건을 더해서 자원을 분배하고, 의무를 분배하고, 권리를 분배하면 여전히 그 복잡한 전체 시스템은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특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건 단순한 자연법칙이 현실에 잘 안맞으니까 점점 더 복잡한 자연법칙으로 현실을 설명하려는 노력과 같다. 

 

그러나 이런 복잡성의 추구는 그 한계가 분명하다. 시스템을 개혁하는 것도 어렵고, 개혁해도 그 시스템의 복잡성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생긴다. 게다가 시스템이 복잡해지면 질수록 점점 더 이런 모순이 커지기 때문에 나중에는 공평이라는 말이 손도 댈 수 없는 누더기가 되고 말기 쉽다. 우리는 오늘날의 한국에서 몇천원짜리 횡령은 엄하게 처벌되는데 몇백억 사기친 것은 봐주는 판결따위가 나오는 것에서 그런 일을 목격하고 있다. 자원봉사 표창장은 한 가족을 파멸로 이루게 할 정도로 대단한 범죄혐의이고 법카를 10만원어치 쓴 것은 엄격히 처벌해야 할 문제인데 명품백은 아무 것도 아닌 현실도 그렇다. 

 

이런 현실에서 누군가가 자상한 목소리로 혹은 현학적인 말로 잘 모르니까 그러는데 내가 뭐가 공평한 건지 알려줄께라고 말하는 것을 나는 오만이라고 생각한다. BTS가 군대가고 나도 군대가는 것이 정말 공평한 것일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 확신은 없다. 나는 그것이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사람과 공평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모두 옳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다 대고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왜 그게 공평한 건지 설명해 줄께라는 오만을 부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공평이라는 이상은 허상이니까 어떤 시스템도 객관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일까? 법이란 걸 그럼 뭐하러 지켜야 하는가? 공평하다는 개념이 이렇게 불확실한데. 당신이 말하는 것은 상대주의가 아닌가? 이런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이래도 공평이라는 개념을 살려낼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공평은 우리가 함께 살기 위해서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공평을 위해서는 우리에게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내가 이제까지 말한 공평에 대한 오만한 태도를 버리는 것이다. 인간은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어떤 인간도 똑같이 자라나지 않는다. 그래서 말하자면 어떤 인간은 발이고 어떤 인간은 눈이고 어떤 인간은 손으로 살아간다. 그렇다고 할 때 발과 눈과 손이 받아야 할 공평한 댓가는 뭘까? 뭐가 공평한 걸까?  오만한 태도를 버릴 때 우리의 첫번째 답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뭐가 공평한지 모른다. 남의 입장이란거 아무리 공부해도 내 입장처럼 느낄 수도 없을 뿐더러 요즘에는 그 입장이나 환경이라는게 자꾸 바뀌어서 애써 노력한 평가도 자꾸 바뀌니 뭐가 공평한지를 모른다. 이미 우리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운운하던 시절부터 인간의 능력으로는 공평이 뭔지를 모른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니까 수박과 쌀을 교환할 때 어느 비율로 교환해야 하는 지를 그 잘난 인간의 이성을 써서 법으로 딱 정하는게 아니고 시장의 법칙이 공평하게 만들어 줄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은 그 자본주의가 세계로 퍼진지도 몇백년이나 흘렀다. 그런데 공평이 뭔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공평이 뭔지를 모른다고 할 때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감사함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일부로서 이 세상에 의존해서 살아간다. 비록 때로 내가 불공평하게 뭔가를 빼앗길 때도 있어 보이지만 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것이 나에게 주어지기에 나는 살아 있는 것이다. 프로 야구 선수가 아무리 위대해도 프로 야구 리그보다 위대하지는 않다. 게임이 있으니까 그 안에서 영웅도 있는 것이다. 환경으로 존재하는 이 세상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함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 태도가 필요하다. 세상은 언제나 공평하지는 않다고 느껴지지만 그래도 우리는 많은 것을 받아서 살고 있으며 그 반대도 사실이다. 즉 우리도 종종 세상에게 공평하지 않게 행동했지만 세상은 그런 우리를 너그럽게 포용해 줬다.

 

이런 감사함의 태도를 기본적으로 가지지 않고 개인주의적으로 이건 내거고, 이건 나의 당연한 권리고 하는 식으로 주장하고 생각하는 것, 특히 그것을 강조해서 주변에게 말하는 것은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내것은 내것이고 남의 것은 남의 것이지만 그걸 너무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 실은 그것이 그렇게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 것중에 순수히 내 힘으로만 내 것이 된 것은 하나도 없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사람들의 호의와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내것이 된 것이다. 우리에게 이런 감사한 마음이 없으면 반감이 생기고 각자가 그럼 우리 정말 각자 상관하지 말고 살자고 하면 모두가 피해를 본다. 소위 정체성 정치라고 비판받는 진보 정치의 문제가 이것이다. 그것이 물론 좋은 점이 있지만 개인주의적으로만 접근될 때 사회적 융합을 깨뜨리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공평에 대해서 이것만이 있다면 그건 너무나 보수적인 사고가 되기 쉽다. 하지만 말했듯이 우리는 지금의 상태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모른다고 여기는 것이다. 공평에 대해서 필요한 두 번째 입장은 현실은 우리가 끝없이 개선해서 만들어 낸 불완전한 추측같은 거라는 것이다. 국가 예산을 여러가지 분야에 분배할 때 그것을 어떻게 분배하는게 옳을까? 이것에 대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답따위는 없다. 우리는 예산을 집행하고 그 결과를 평가하고 새로운 변화를 인지하고 그걸 참조해서 예산 분배를 조금 바꿔본다. 이렇게 새로운 데이터에 기반하여 조금씩 조금씩 예산 분배를 바꿔가는 과정을 계속 해야 한다. 왜냐면 인간의 어떤 계산으로 답이 딱 나오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현실은 계속 개선되어야 할 불완전한 추측에 기반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개선을 포기해서는 안되고 우리는 새로운 데이터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앞에서 말한 점점 더 복잡하게 시스템을 개선하는 사람들과 이런 태도가 다른 점은 그들은 정답이란게 있다고 여긴다는 점이 다르다. 정답은 없고 있을 수도 없으며 우리는 계속 개선을 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복잡한 시스템을 만들자는 생각은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건 그 선택은 보완이 필요한 불완전한 것이다. 이건 자전거를 타는데 복잡한 규칙에 따라서 자전거를 운전하면 자전거를 운전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과 규칙도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그때 그때 환경을 살피고 자신의 균형감각에 따라 적합한 선택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차이다. 이 차이는 미묘하지만 크다. 앞에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 자전거를 탈 수 없다. 

 

현실은 개선되어야 하고 여러 사람의 의견은 잘 평가되어야 한다. 모두가 모두에게 고마움을 가지고 현실은 어떤 개인이 잘 알 수 있는게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공평에 대한 이런 설명은 불만족스럽고 애매하게 들린다. 누군가가 인간은 이러저러하며 이러저러한 것이 당연히 공평하다라고 딱 말할 때 우리는 시원함을 느낀다. 하지만 그런 단순하고 명쾌한 평등이나 권리에 대한 주장은 요즘 세상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데올로기다. 그것들은 때로 강한 힘을 발휘하지만 반대로 결국은 어떤 댓가를 치루게 한다. 이데올로기의 광신자들이 어떤 일을 하는가를 보면 안다. 이데올로기에 빠져들면 그들이 당연시 하는 어떤 것에 대해서 의문을 표하는 것은 모두 사악한 의도를 가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설득과 대화가 통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절대적으로 시공간을 초월해서 옳은 정답이 아니라 겸손하게 끝없이 새로운 판단을 찾아나서는 태도다. 공평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사회적 집단으로서 우리가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 공평이라는 목표를 포기할 수는 없다. 그래서 감사함과 궁리가 필요하다. 현재의 시스템이 불완전하므로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가 불공평한 일을 당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힘든 사람들을 도와줄 필요가 있다. 내가 시스템의 승자이므로 내가 얻은 것은 내것이라는 관점에 너무 빠져서는 안된다. 그래도 우리는 선택이 필요하고 시스템이 필요하다. 불쌍하다고 수박을 공짜로 나눠줘야 한다면 수박농사는 불가능하다. 수박농사가 있으니까 사람들이 수박을 먹고 살 수 있는 것이니 가격이나 보상 시스템을 무시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그러나 그 시스템은 뭐가 되었든 불완전하다. 세상은 결국 누군가에게는 불공평하다. 우리는 그걸 기억해야 한다. 최소한 우리나 우리의 자식이 불공평한 일을 당했을 때를 생각해서라도 말이다.  좋은 세상은 그 궁극에는 좋은 시스템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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