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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젊고 지친 사람들에게

결혼의 종말과 조직의 논리

by 격암(강국진) 2025. 11. 27.

군사부일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국가의 군주와 스승 그리고 아버지가 서로 같다는 뜻을 가지며 과거 봉건시대의 결혼과 가족에 대해서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말해 준다. 하나는 아버지가 가족 안에서는 리더요 왕같은 존재였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 시대의 사람들은 가족 공동체를 포함해서 모든 조직과 공동체를 봉건 조직의 논리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국가는 거대한 가족이고 반대로 가족은 작은 국가다. 국가에는 왕이 있고 가족에는 가장이 있다. 이같이 봉건적 조직원리가 국가에서 가정에 이르기 까지 모든 조직에서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던 것은 동양에서만의 일은 아니다. 과거에는 전세계에서 대부분의 경우에 그랬다.

 

이렇게 사회 조직의 논리가 모든 조직의 논리로 이해되고 그 결과 가족같은 작은 공동체에서도 당연시 되는 일은 자연스럽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국가와 가족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우리는 지금 인간이 평등한, 민주적인 공화정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흔히 가족도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가족 안의 구성원인 가족들도 특히 남편과 아내는 평등한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같은 변화는 왜 일어났을까? 왜 완전히 다른 조직의 운영원리가 국가에서 가정에 이르기 까지 모든 차원에 있어서 당연한 것이 되었을까? 그것은 결국 환경이 변했기 때문이다. 다른 환경은 조직의 생존을 위해 다른 것을 요구하고, 따라서 조직의 논리는 바뀌어야 한다. 환경이 잘 변하지 않고 단순한 경우에는 고정적 조직이 일을 처리할 수 있지만 세상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빠르게 변화하는 쪽으로 변해왔다. 그 결과 더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조직, 권력을 혈연에 따라 세습하는 조직이 아니라 선거에 의해서 지도자를 몇년마다 교체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해 진 것이다.

 

인간이 평등하다는 주장은 본래가 당연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남녀가 차별받고 인간이 불평등했던 시대가 정의롭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평등이나 공평같은 개념은 환경이나 문맥과 무관하게 이해될 수 없다. 물바깥으로 나온 물고기의 민첩함은 의미가 없듯이 누군가가 뛰어나다던가 부족하다는 것을 환경을 빼고 말할 수는 없다. 지금과는 다른 환경을 가졌던 과거는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인간이 불평등하고, 남녀가 불평등한 시대라고 이해되고 말기 쉽다. 하지만 지금도 폭력과 강간이 넘쳐나는 우크라이나 같은 전쟁터로 가서 남녀가 정말 평등하다고 주장해 봐야 그런 말은 한국같은 평화로운 나라에서와는 분명히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인간이 평등하다고 아무리 강하게 믿어도 BTS나 대통령같은 유명인이 자기 집에 방문하는 것과 나같은 무명의 사람이 방문하는 것이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평등이란 그런게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런 예들과 함께 현실을 차분히 생각해 보면 평등이란 말은 애매하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인간이 평등하다고 믿고 적어도 나는 인간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아마 옛날에 노예를 부리고 남녀를 크게 차별하던 남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또 세상이 크게 바뀌고 환경이 바뀌는 미래가 오면 우리는 그때의 과거인 지금을 돌아보면서 그때는 인간이 평등하지 못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봉건제는 그것이 사악해서 사라진게 아니다. 봉건제의 몰락은 근대화로 세상이 복잡해진 결과이다. 봉건제에서는 왕에게 백성은 복종해야 한다. 인간은 평등하지 않고 국가의 지배권력은 혈연에 의해 세습되며 독점된다. 봉건국가에서는 기본적으로 모든 것을 소유하고 판단하는 것도 왕이고 책임도 왕이 진다. 그런데 이런 독재적 구조는 복잡한 세상을 감당할 수 없다. 중앙에서 거대한 국가를 인형처럼 움직이려고하면 그 결과는 엉망일 것이다. 그들은 정보처리를 제대로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인간이 평등한 공화정에 따라 살게 된 것이다. 봉건왕조라는 조직의 효율성이 너무 떨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배고픔이나 불평등이나 부패를 포함한 많은 비극을 만들어 냈다.

 

국가가 봉건제에서 공화정으로 바뀌자 크고 복잡한 가문이란 것도 경쟁력을 잃었다. 집안에 돈이 아주 많으면 모르지만 그게 아니면 대가족의 질서란 비현실적이고 낭비스러운 것이 되기 쉬워서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대가족제도는 핵가족제도가 되었고 지금은 그 핵가족마저도 위험해져서 아예 결혼 제도가 사라지려고하는 판이다. 사람들이 옛날 식으로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사는 일이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혼이란 정의하기 나름이겠지만 현실적으로 하나의 가족공동체를 만드는 일이다. 만약 누군가가 공동체의 의미가 없는 것도 결혼이라고 말하겠다면 그게 정말 결혼일까? 서로를 부부라고 말하지만 대학 기숙사의 룸메이트 보다도 못하게 언제든 각자 살 수 있으며, 성생활에도 경제권에도 제약이 없는 걸 결혼이라고 불러야 할까?

 

그런데 결혼이 만들어 내는 가족공동체를 포함해서 모든 공동체는 그곳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도움도 되지만 모두를 오히려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 낭만적인 부분을 빼고 보면 가족은 하나의 회사처럼 하나의 조직이다. 그 조직이 조직으로서 각자 따로 사는 것보다 효율적이려면 그 조직원들이 아무런 질서 없이 각자 움직여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그건 순식간에 망하는 조직이 되거나 아니면 공동체라기 보다는 누군가가 누군가를 착취하는 조직이 된다.

 

예를 들어 자식이 무슨 일을 저지르든 부모가 책임을 지지만 그 자식이 부모의 말은 전혀 듣지 않고, 부모에게 상담도 안하고 사고를 친다면 어떤가? 그것은 인간평등의 세상에서 평등의 이상이 실현되는 아름다운 조직인가? 자식과 부모는 평등하니까, 각자의 생각대로 살면되는 것인가? 단지 문제에 대한 책임은 부모가 지면 되는 것이고? 이게 자식이 부모를 착취하는 조직이 아니면 뭔가? 성공하면 자식의 공이고 망하면 부모가 책임지는 걸 착취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는가?

 

세상이 더 복잡해지자 국가는 물론 가족 공동체도 바뀌어 왔다. 하지만 국가와 가족은 책임의 범위가 다르다. 이 평등한 민주적 세상에서 국민들이 사고를 치고, 망하면 국가 공동체가 다 책임져 주는가? 그럴리가 없다. 물론 복지나 공공재의 확충같은 정책도 있어서 어느 정도는 그런게 있다. 한국인이 사고치면 한국이 보호해 준다. 하지만 세상에는 법이라는게 있고, 사유재산의 분리도 있다. 다시 말해 기본적으로는 당신이 사업하다 망하면 당신만 망하는 것이지 그걸 사회가 책임져 주지 않는다. 공화정을 하는 국가 안에서 인간 평등을 이야기 쉬운 이유는 이렇게 시스템도 있고, 유한 책임도 지기 때문이다. 인간평등은 어떤 의미에서는 봉건국가에서처럼 모든 책임을 왕이 지지 않으니까 각자 자기 인생은 자기가 알아서 살라는 뜻이다.

 

그런데 국가와 가족은 규모가 다르고 규모가 다르면 할 수 있는 것이 다르다. 자식이 보이스 피싱 사기를 당해서 죽을 판이면 부모가 자식에게 네 잘못이라고 죽으라고 하는가? 가족 안에 무슨 복잡한 위원회나 사법부나 경찰조직이 있나? 가족 공동체처럼 작은 공동체 안에서 인간은 평등하다고 하고, 각자가 마음대로 살되 책임은 모두가 각자 지는 거로 하면 이 공동체는 금새 망하거나 아니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누군가를 무한 착취하는 시스템이 된다. 그걸 사랑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결국 길게 보면 사고 치는 사람 따로 있고, 책임 지고 손해 보는 사람 따로 있게 된다. 가족제도가 종종 누군가에게는 가장 무서운 지옥이 되는 이유는 이때문이다. 자식이라고 부모라고 형이라고 동생이라고 다른 가족을 무섭게 착취하는 사례는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조직을 감당하는 누군가가 그 책임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가 되면 결국 그 조직은 망한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이런 사고를 치기 쉬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물론 가족은 서로 소통하고, 민주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가족같이 작은 집단은 평등한 구성원이 민주적으로 모인 조직논리로는 돌아가지 않는다. 누가 되던 가장이 있어야 한다. 그게 꼭 남자일 필요는 없다. 여자가 가장이라도 된다. 항상 같은 사람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가장을 새로 정할 수도 있을 것이며 부모가 아니라 자식이 가장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가족의 일을 토론하더라도 누군가가 일관성있게 일을 결정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평등하게 대화로 해나갈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그건 실제로는 누군가가 비합리적인 큰 희생을 하면서 끌고 나가는 조직이거나 실제로는 각자 마음대로 살면서 아무도 책임 지지 않는 조직이 된다.

 

가장을 정하지 않아도 되는 이상적인 가족은 그 숫자가 작고, 그 가족의 구성원이 모두 매우 이성적이며 마지막으로 그 가족안에서 생기는 낭비나 사고에 대한 처리를 하기 쉬울 정도로 풍요로운 가정이다. 이 풍요롭다는 것도 그 재산을 누군가가 독점적으로 가지는 경우에는 오히려 가부장적 가족이 된다. 그러니까 모든 가족이 각자 다 풍요로워서 돈이 아쉽지 않은 경우인데 시간도 많고 서로에 대한 애정도 많은 경우인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민주적인 가족도 잘 작동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특히 저소득, 저교육층의 경우는 이런 현실과 차이가 있다. 사실 이상적인 경우는 현실적으로 거의 없다. 따라서 민주적이고 평등한 가족론은 결국 가족제도를 망하게 한다. 이대로 나아간다면 결혼은 결국 소수의 부유층이나 가질 수 있는 사치스러운 제도가 되었다가 누구에게도 현실적이지 않게 되어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가족처럼 작은 집단 안에서도 전문성과 서로 다름의 문제가 점점 커지고 있다. 누구도 핵폭탄을 만드는 데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물리학자나 공학자같은 전문가가 결정하는게 아니라 국민투표로 결정하자고는 하지 않는다. 우리는 합리적인 결정은 오직 전문가에 의해서 내려진다는 것을 이 경우 분명히 볼 수 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평등에 대한 주장이 오히려 종종 불평등을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문 요리사와 전혀 요리에 경험이 없는 사람의 의견이 같은 정도의 중요성으로 요리 만들기에 반영되는 것은 평등이 아니라 불평등이다.

 

세상이 복잡하여 사람들이 많이 서로 다른 시대에는 평등한 의견 반영은 있을 수 없다. 만약 아내가 컴퓨터 전문가이고 남편이 요리사라면 컴퓨터를 사러가서는 남편이 아내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 요리에 대해서는 아내가 남편의 의견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하려면 사안에 따라, 환경에 따라 주도적 지위를 차지해야 할 사람이 바뀌어야 하고 만약 사람이 소수이고 그 사람들이 합리적이라면 일이 이런 식으로 실제로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근대 사회속에서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의 의견이 전문가의 의견만큼 중요하게 여겨지고 심지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우도 많이 생긴다.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가족들이 전문가인 가족 구성원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일이 생긴다. 이 경우에는 평등한 구조가 조직의 합리성을 해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근대를 넘어 새로운 시대로 가고 있다. 아직 미래는 오지 않았지만 지금은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그 공화정의 시대도 아니다. 컴퓨터 혁명, 인터넷 혁명, AI 혁명이 우리를 이끌고 가는 곳은 너무나 복잡하고 빠르게 변하는 곳이라서 강력한 가장이 있는 가족도, 평등하고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가족도 모두 경쟁력을 잃고 있다. 그래서 젊은 세대는 도대체 어떤 가족을 만들어야 하는지 모른다.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비극적 미래는 그래서 결혼제도가 사실상 끝나는 것이다. 같이 모여서 살면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여서 살수가 없고, 서로에게 책임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한때는 좋았지만 언제나 2-3년 뒤에는 상황이 너무 달라져서 같이 살 수 없어진다면 결혼이라는 약속으로 평생을 같이 하겠다는 약속을 할 수가 없어지는 것이다. 사실 겨우 백년전에만 해도 이혼이 말도 안되던 시대였다. 그런데 이미 한국에서도 이혼은 별일이 아니게 되었다. 서구 선진국은 더 하다. 우리는 지금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끊어지는 걸 절대 불가능하고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끔은 연예인이 가족과 불화를 일으켜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지금의 경향이 계속 된다면 부모와 자식간의 결별도 별거 아닌 시대가 머지 않아 올지 모른다.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여기까지 읽은 것을 기억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라. 나는 이미 현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미래는 불확실하다. 미래를 예측하면서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문제가 있으면 우리가 그걸 해결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주로 가족제도나 결혼제도가 근대화를 거치면서 어떻게 점점 더 모순을 쌓아왔는가에 대한 것이지만 좀 더 크게 보면 이건 근대 사회의 모순의 누적에 대한 것이다. 결혼이나 가족뿐만 아니라 국가도 위기라는 것이다. 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빠르게 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봉건제가 공화정으로 바뀌었듯이 공화정은 결국 다시 한번 새로운 형태의 조직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시대가 되면 결혼도 구원받을지 모른다. 그 시대의 조직논리가 다시 한번 가족에게 투영되고 다시 모두가 행복하게 같이 살 수 있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 그 미래 시대는 지능적 망의 시대이며 매순간 집단에게 주어진 문제에 따라서 빠르게 리더가 정해지고 조직의 운영이 달라지는 시대이다. 그런데 이런 것이 정말 가능할까? 그 핵심에는 AI가 있다. AI가 새로운 미디어로 사람과 사람을, 사람과 사회를 이어주는 시대가 미래다.

 

연결 방식의 변화는 엄청난 가능성을 가진다. 늑대는 왜 인간과는 달리 문명을 발전시키지 못했을까? 왜냐면 다른 무엇보다 인간에게는 발달된 언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늑대보다 훨씬 더 큰 집단을 만들어도 그 안에서 싸움이 나지 않는다. 모여서 잘 살 수있다. 니것 내것 개념이 전혀 없다면 시간 들여서 농사짓는건 바보짓이다. 구술언어가 발달된 뒤에는 문자가 나와서 훨씬 더 언어가 발달했다. 그 결과 더 크게 뭉칠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짐승과는 전혀 다른 문명 사회를 만든 것이다.

 

근대의 위기는 결국 정보처리의 위기이고 소통의 위기다. 이제는 말과 글로만으로는 사람들이 모여서 살 수가 없다. 그걸로는 정보처리가 충분히 빠르지 않다. 사실 우리는 이미 그 뜻도 모르고, 다 읽어볼 수도 없는 긴 계약서들에 계속 동의하면서 살고 있다. 적어도 스마트폰을 쓰는 사람들은 여러가지에 동의하라 사인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대신 정보를 처리해줄 AI 에이전트가 필요하다. 나는 그런 AI 에이전트들에 둘러싸인 인간을 CEO와 비교하고는 한다. 직원이 있는 CEO는 일을 직원들에게 맡기기 때문에 복잡한 일도 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AI 에이전트들을 내 몸처럼 느끼도록 연결되어 살아가는 인간도 직원에게 계속 명령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니라 직원들이 알아온 정보, 기록한 정보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이같은 시대는 이미 어느 정도 네비같은 장치에 의해서 현실화되고 있다. AI는 기본적으로 데이터를 다루는 기술이다. 네비가 주는 길만을 따라갈 필요는 없지만 네비가 우리로 하여금 복잡한 길에 대응할 수 있게 해주듯이 AI는 일반적으로 조직이 주어진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를 데이터에 기초해서 제안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대기업의 직원들이나 컨설팅하는 회사가 일상적으로 하는 업무들이다. AI는 이런 서비스를 가족이나 협동조합같은 작은 조직에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며 이는 가족에서 국가에 이르기 까지 지금의 근대 조직이 가진 문제들을 완화시켜 줄 것이다.

 

예를 들어 가족의 위기는 흔히 오해에서 비롯된다. 같이 사는데 과거에 대한 기억이 다르다. 이 사람은 참아준 거였는데 다른 사람은 자기가 참았다고 생각한다. 각자 바쁘게 자기 삶을 살다보면 가족들도 서로에 대한 오해만 쌓여가고 강력하게 서로 얽혀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서운하게 느끼고 상처받는 일이 생기게 된다. 결국 정확한 정보가 오해를 막고, 오해를 푼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에 AI가 끼어들어야 하는 이유도 이거다.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고, 기억은 잘못된다. 일상에 빠져 살다보면 시야가 너무 좁아져서 남의 일은 모른다. 나만 억울한 것이다.

 

예전에는 가장이 가족들을 살피고 모든 일을 기억해 둬야 했다. 그리고 나서 일들이 공평하게 흘러가게 했다. 누가 억울한지를 살폈다. 이번에 누가 양보했으면 다음번에는 다른 사람에게 양보시키는 식이다. 이렇게 가장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살피고 기억하는 것이지만 요즘 세상에는 그게 점점 불가능해지고 있다. 부모도 자식을 모르고 자식도 부모를 모른다. 우리는 서로 너무 다르고, 너무 전문화되어 있다. 결국 우린 외부적인 기억장치가 필요하다. 차들이 돌아다니려면 교통신호시스템이 필요한 것처럼 모든 정보를 기억하고 정리해주는 장치가 없으면 가족은 물론 국가 공동체도 분란에 가득 찰 것이다. 마치 언어가 발달하지 못한 늑대 집단처럼 말이다.

 

하지만 아직 이런 미래는 오지 않았고 이런 미래가 올 것인가 하는 것도 우리에게 달린 것이다. 그런 대안이 없다면 결혼제도는 점점 사라질 것이다. 여유있는 사람들의 사치처럼 변해갈 것이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상처주다가 결국은 사라질 것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 같이 잘 살고 싶다. 자식도 많이 낳으면 좋을 것같다. 그러나 우리는 직감적으로 오늘날의 근대적 조직논리가 현실에서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가족이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그 댓가를 치룰 자신감이 젊은이들에게서 점점 줄어들고 있다.

 

봉건 시대의 결혼이나 가족은 물론 이 시대에 맞지 않다. 그러나 근대의 결혼이나 가족도 당연히 성공적인게 아니다. 그들은 모두 실패하고 있다. 부족한 자원을 가지고 실패한 조직의 논리를 가지고 조직은 유지되기 어려우며 가족은 그런 한 사례이다. 그것을 외면하고 우리의 아픔과 한계가 누구의 탓인지를 따지는 것은 마치 21세기에 봉건제를 통해서 국가를 운영하려고 하면서 국가가 엉망으로 흘러가는 것은 왕이 덕이 없거나 어리석어서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을 수 있다. 더 좋은 왕을 뽑으면 나라가 잘 굴러갈 거라고 믿는 것과 같다. 이런 결론은 핵심을 놓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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